87화
바다의 두 사자-5
“마법사, 말입니까?”
마법사가 곰곰이 생각했다.
듣자하니 군종마법사단의 마법사는 아닌 듯한데. 혹시 연줄이 있어서 마법사 연맹 쪽에서 도와주러 오는 사람이라도 있나?
“아소르스 제도를 다시 일통한 두 번째 대선장 얘기는 들어봤나?”
갑자기 대선장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 말은, 그 해적 대선장이 온단 말입니까?”
“그래. 자네가 상상도 못한 모습일걸세.”
“설마 무슬림은 아니겠지요?”
마법사들에게는 해적 마법사 하면 대체로 이슬람권의 해적을 떠올린다. 마법사 조직에 철저히 소속되는 유로파와는 달리 이슬람 권역에선 다소 그 구속력이 널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벌이를 찾아 상업이나 해적질에 뛰어드는 마법사 역시 많다. 물론 어디까지나 유로파와 비교해서 많단 거지 극소수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아닐세. 무슬림이 유로파의 작위를 원하진 않을 테니까.”
“작위? 설마 해적이 작위를 요구했습니까?”
“그렇다네. 그래서 그런데 자네가 대선장이 어느 정도 되는 마법사인지 판단을 해줬으면 좋겠네. 내가 본 바로는......”
제독은 이틀 전 식당에서 봤었던 갑옷을 찌그러뜨리는 마법에 대해 설명했다.
“갑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찌그러뜨렸다...... 금속 혹은 공기나 염력 계통 마법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공기는 아니겠지. 그건 나도 못하는 건데......’
“금속과 공기, 염력. 다 해상에선 익숙한 것들이로군?”
“예. 대포알을 빗나가게 한다거나, 함선 속도를 높인다거나 해서 해적들을 수월하게 장악한 거라고 봅니다. 무지렁이들은 사람이나 물건이 들썩거리는 걸로도 무서워서 납작 엎드리니까요. 그보다, 별 집중도 안하고 손짓만으로 그랬다 하셨습니까? 혹시 손에 뭘 끼고 있다던가......?”
“장신구 같은 건 끼고 있지 않았네. 맨손으로 그저 슥 휘젓더니 그렇게 되더군.”
“으으음, 마법 무구도 아닌데 그렇다면...... 그렇다면 꽤나 강한 마법사일 겁니다. 견습 딱지 떼고 족히 이삼십 년은 수련해야 그렇게 가벼운 손짓만으로 마법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선천 마력 보유자를 제외하곤 말이다. 마법에 문외한인 제독에게 부연설명까지 하기는 귀찮아서 마법사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확실히 대선장은 천재라 할 수 있겠어.”
“천재라니요?”
“올해 열여덟이라던데.”
“예에?!”
마법사의 얼굴은 부부금실이 좋다고 소문난 카스테냐 국왕 부부가 이혼한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변했다. 강한 마법사라니 중늙은이 정도를 상상했는데 그와 한참은 멀리 떨어진 숫자를 들은 탓이었다.
아니 그게 말이 돼!? 라는 문구를 얼굴에 써넣은 마법사가 경악한 얼굴을 한 채 굳어버렸다. 제독은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하며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못 믿겠으면 직접 만나보게. 오늘 온다 했으니까. 슬슬 올 시간이 다 되어가네.”
“제독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약속은 철저히 지키는군.
‘원래는 30분이나 1시간 늦게 도착하는 게 귀족 문화이거늘. 하긴 귀족도 아니고 군사적 얘기를 하러 오는 거니 제때 맞춰 오는 게 좋은 거지.’
“들어오라 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복장의 소년이 들어왔고 그 뒤를 검은 갑옷의 기사가 뒤따랐다.
소년의 옷은 이틀 전의 거지꼴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대선장이라는 이름답게, 선장이 입을 법한 복장이었다.
눈에 띄는 푸른 외투에 잘 여민 금색 단추 한 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단추를 꽉 여민 것이 해적이 가질 법한 방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빳빳하게 잘 다린 옷에선 절도가 엿보였다. 외투 밑으로는 하얀색의 직물 바지와 검은 가죽부츠가 매끄러운 광택을 반짝였다. 왼편 허리춤에는 권총집을 찼는데 권총은 없이 비어 있었고 오른편은 회색 망토가 덮고 있었다.
머리에는 역시 아무런 장식도 문양도 없는 푸른색의 선장 모자가 얹혀 있었다. 모자 밑으로 정리는 했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해 보이는 회색 머리칼이 보였다.
옷은 전체적으로 조금 헐렁했지만 눈에 뜨이는 흠은 없었다. 치렁치렁한 장식 하나 없이 밋밋한 복장이나 의뢰한 곳이 귀족 전용 옷가게라 장식 없이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다 한들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는 법인데, 소년의 귀족적인 몸가짐 때문에 진짜 귀족 도련님을 보는 듯했다.
흠이라고 한다면 얼굴 정도.
얼굴 오른편을 가로지르는 검은 안대가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고 어려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얼굴선이 여리여리한 것이 남자답지 못했다.
근육이 불끈거리고 우락부락한 거친 선을 가져야 하며 고기를 먹어야 남자답다고 여기는 시대에, 대선장의 얼굴은 남자답지 못한 얼굴이었다.
“푸른색이라. 니아트리브 해군 복장 같군그래. 색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건가?”
“......”
눈을 아래로 내리깐 소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시는 아니었다.
[브란트, 뭐라고 대답하지?]
그저 어떻게 예를 차리며 대답해야 하는지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예법은 많이 알지만 대부분 에크나르프식 예법이고, 아무리 사석이라지만 소년은 대선장의 직위로 온 상황이라 실수라도 하면 상황이 꼬여버린다.
말이 없는 소년 대신 브란트가 답했다.
“니아트리브 출생이셔서 지금껏 본 복장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얼핏 봐도 니아트리브 수병을 닮은 이 복장은 소년이 가장 많이 봐서 친숙한 복장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빈민가의 징병관, 실리 제도의 수병 중대에, 맞서 싸운 니아트리브 함대까지.
그거 외에는 다른 나라 수병을 본 적도 없고 다른 나라 군대라면 기껏해야 보르도에서 본 에크나르프 병사 복장인데, 그 또한 니아트리브 수병처럼 푸른색 바탕이라 바다를 닮은 색 외에는 소년의 생각이 닿지 못했다.
“흠, 그래? 카스테냐 어도 곧잘 하는 거 보니 에크나르프 사람인 줄 알았더만.”
그 두 나라는 인접국이라 언어가 엇비슷했다. 카스테냐 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내기 전엔 반쯤은 에크나르프 종속국에 가까웠던 역사도 한몫했고.
브란트가 카스테냐 어를 능숙하게 해 갑옷 양식만 보고 둘 다 에크나르프 인이라고만 짐작했지 설마하니 소년이 섬나라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니아트리브 인이라.’
별거 아닌 것처럼 대답한 것과는 달리, 니아트리브라는 말을 듣자마자 제독의 소년에 대한 평가가 한 단계 내려갔다.
‘제 나라 발음도 못하는 덜렁이 나라 출신이라.’
자기 나라(혹은 자기들 수도) 발음도 못하는 멍청이.
유로파 대륙인들이 니아트리브 인들을 비웃는 고상한(즉 귀족들이 쓰는) 용어였다. 귀족이 아닌 이들이 쓰는 욕설은 니아트리브를 짧게 줄인 니앗 놈들. 니아트리브는 대륙인보다 한 급수 딸린다는 편견이 대륙인들에게는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덜렁이 나라에게 목줄이 붙잡힌 처지로군.’
제독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떠올리곤 씁쓸한 심경을 숨기면서 소년을 환영했다.
“어쨌건 잘 왔네. 앉게나. 이쪽은 3급 마법사 마티아스일세. 무적함대에 소속된 군종마법사단의 단장이지.”
마티아스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소년의 위아래를 쓱 훑어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듣자하니 마법사시라던데, 만나서 반갑습니다. 위명 자자한 마법사왕께서 여기까지 오실 줄이야.”
약간의 오만함과 조롱이 곁들여진 말투. 열다섯 살을 갓 넘긴 듯한 어리고 여린 외모에 만만하게 보인 것일까? 아니면 한낱 해적이 마법사왕이란 오만한 칭호로 불리는 게 고까운 것일까.
소년은 표정변화 없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상대방의 무시는 빈민가 시절에도 지겹게 겪은 거라 별 감흥은 없었다.
소년의 손은 수족냉증에 걸린 사람처럼 차가웠다.
‘얼음장이군. 건강이 안 좋은가?’
하긴, 열여덟인데 저런 어린 외모면 제대로 못 먹고 컸을 테고, 건강도 좋진 않겠지.
“제독님께 설명은 들었습니다. 대에단한 마법실력을 지니고 계신다고요?”
“별거 아닙니다.”
열여덟. 성인취급 받는 나이도 지나고 변성기도 지났을 나이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어린 목소리에 외모도 고작해야 열다섯쯤 되어 보였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계속 아래를 향한 소년의 시선. 하급자와 상급자 간의 대화가 아닌 이상은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는 것이 유로파 전체의 보편적인 관습인데 그 관습조차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런 경우는 자신이 상대방보다 하급자라 여기고 있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거던가 둘 중 하나다.
‘설마, 이 꼬마는 대역인가?’
그 거친 해적들을 휘어잡은 대선장이 이런 자신감 없는 꼬마일 리가 없다.
제독이 음식점에서 만난 소년은 분명 이 둘뿐이라고 했는데. 만일 이 소년이 대선장이 아니라면...... 마티아스의 시선이 검은 갑옷의 기사를 향했다.
이 비쩍 마른 꼬마가 마법사라기보단 차라리 마법사가 기사로 위장하고 있단 게 더 말이 된다.
마법사들은 직설적이고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게 주저함이 드물다. 마티아스는 그 의혹을 곧바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전 의문이 드는군요.”
“무슨 말인가?”
“제독님, 열다섯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강력한 마법사인 게 더 말이 됩니까, 아니면 마법사가 기사 행세를 한단 것이 더 말이 됩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브란트를 향했다. 면갑을 내린 투구 뒤에서 저 기사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안타깝지만 세상에는 보편적인 상식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투구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가벼운 웃음 섞인 말은 명백히 이 어린 소년이 진짜 대선장이라고 가리켰다.
“그렇다면-”
마티아스는 품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반지였다.
“-이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어 보십시오.”
이 반지는 접촉을 통해서만 마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마법무구였다. 접촉을 통한 마력 주입을 이용하는 마법무구는 마력을 저장하는 용도 등으로 여러 마법사들이 보편적으로 쓰는 방식이었다.
소년은 눈앞의 마법사에게서 반지를 낚아챈 뒤 힘을 불어넣었다.
이내 검게 물들었던 반지의 보석이 제 빛깔인 초록색을 되찾았다. 마력이 부여되었단 얘기다.
“아, 아니...... 정말로......!”
마티아스의 눈이 크게 뜨여지고, 제독이 아까 전에 소년의 나이를 말했을 때 경악하던 표정을 똑같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