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86화 (87/128)

86화

바다의 두 사자-4

종업원들과 똑같은 표정을 지은 제독이 얼빠진 표정에 걸맞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마법사로구나.”

무슨 마법이 주력인지는 모르겠으나, 손짓만으로 사람을 짓이겨버릴 수 있으면 그리 약한 마법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저 어린 외모라니!

“자네 주군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올해로 열여덟이십니다.”

“허어!”

열여덟치고는 어려보이긴 하지만 못 먹고 컸다면야 그럴 수도 있다.

제독은 마법사를 많이는 알지 못하지만 견습이니 실전이니 해서 마법사 양성에 오랜 기간이 걸린다는 것쯤은 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저런 마법 실력이라면......

“그 거친 해적들을 휘어잡은 비결이 있었군.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마법사 하나 침투시켜서 세력을 잡을 걸 그랬어.”

“그것 말고도 더 있지요.”

“더 있다? 혹시...... 사령술사라는 전대 대선장과 관련이 있나? 대선장의 제자라 하던데.”

제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전까지는 세간에 사령술사란 건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였다. 마법계에서조차도 모두가 그 개념을 아는 게 아닐 정도면 말 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니아트리브의 아소르스 제도에서의 전투기록 공개 이후부터 마법계는 물론이고 사교계를 타고 귀족과 접점이 있는 일반인들에게까지 사령술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죽은 이를 되살려 조종한다는 소름끼치는 특징 때문에 더 그랬다.

제독 역시 경쟁자인 니아트리브를 연구하느라 그 전투기록을 왕실에서 받아보았고 마법계에서 사령술사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마법사들이 경원시하는 사령술사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카스테냐 해군은 절박했다.

“사령술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브란트는 일단 숨기기로 했다. 나중에는 드러낼 순간이 오기야 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세력이 공고해질 때까지는 조용히 숨어 있어야 했다.

“그럼 무슨 마법을 쓰는가? 방금 보여준 것 하나만으로 아소르스를 제패하진 않았을 테고.”

“그건 전장에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제독께 중요한 건 제 주군의 마법실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 상대방은 니아트리브 대함대다. 물마법사가 없다 해도 마법사 하나가 전황을 바꾸기엔 무리다. 니아트리브의 그 대마법사 칭호를 가진 물마법사 정도가 아닌 한.

제독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긴 하군. 그럼 본론부터 말하겠네. 아소르스의 해적을 고용하고 싶네.”

“방패로 말입니까?”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지.”

방패로 쓴단 얘기다.

“믿겠습니다.”

그 뜻을 앎에도 브란트는 예의상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나온 말은 이와는 정반대의 의미였다.

“하지만 제독님. 저희가 동원할 배는 한 척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 주군께서는 가히 천재라고 할 수 있으십니다. 함대 정도는 능히 상대하실 수 있지요.”

중요한 건 주군의 마법실력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제독의 눈매가 좁아졌다.

“나를 시험하려 들지 말게. 아소르스 제도에서 벌어졌던 그 해전은 벌써 유로파 전체, 아니 마법사 집단을 타고 모든 나라에 다 퍼졌을 걸세. 시체를 위장시켜 자폭을 하고 시체를 일으켜 아군을 늘리는 전법을 사용했는데도 물마법사에게 방해받고 끝내는 전멸했지. 물마법사가 없다면야 사령술을 쓴다면 필승이겠다만, 자네 주군은 사령술과는 관련 없다 하지 않았나? 대선장이 그 물마법사라도 되지 않는 한은 마법사 하나로 전황을 바꿀 순 없어.”

“그렇지요. 하지만 사령술사에게 배울 수 있는 건 사령술만이 아닙니다.”

“사령술만이 아니다?”

“마법사가 여기 있다면 잘 알아듣겠지만,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천재가 천재를 이끌어 토대를 닦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으음, 아직 믿기는 어렵지만 일단은 믿어는 보도록 하지. 그렇다면 뭘 원하나. 돈?”

“작위를 원합니다.”

“작위라? 해적이 작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건 아나?”

“물론이지요.”

큰 세력을 일구고 사략함대로 들어가는 것만으로 작위가 내려지는 게 아니다.

단순히 소속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공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의 비호도 있어야 한다. 왕의 명령이 절대적이라지만 귀족 대다수가 반대하면 소용이 없다.

그런 조건을 다 갖추고도 그저 ‘어느 나라의 사략함대 제독’이라는 직위만 받고 정식 작위는 못 받는 경우도 유로파엔 수두룩하다. 그나마 니아트리브나 이슬람권은 다른 나라보다 사례가 흔하지만 안 그래도 해군력 1위로 아쉬울 게 없는 카스테냐에서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귀족이 된다는 게 소수의 예외를 빼면 정말 어렵다는 것은, 여기저기 구르며 생고생을 하며 겨우겨우 평민에서 귀족이 된 알레한드로 후작이 더 잘 알고 있다.

작위를 받아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작위는 줬는데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귀족 사교계에서 따돌림 받는 경우도 많다. 그 대상이 귀족들에게 경원시당하는 해적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제독께서는 다만 있는 그대로만을 증언해주시면 됩니다.”

지금은 다급해 해적의 손이라도 빌리려 하지만 위기를 넘기면 안면을 싹 바꿀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브란트는 일단 증언을 원했다.

“증언?”

“예. 무적함대의 제독이자 후작 작위를 받으신 분의 증언이라면 무거우니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차후 증언만 해주시면 됩니다. 전투기록도 물론이고요.”

“흐음......”

알레한드로 제독은 이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아챘다.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있단 말인가?’

귀족들 간의 거래에서는 한 문장이라도 그 의미하는 바가 많다. 문장이 품고 있는 의미 말고도 거기에서 더 확장된 의미와 그에 따른 여파를 얼마나 잘 알고 대처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정치적 거래에서 우위가 잡힌다.

브란트의 제시 역시 전형적인 ‘귀족적 거래’의 한 갈래였다. 우리의 실력을 보면 안 잡고는 못 배길 것이라는 도전의 의미가 담겨 있기도 했다.

“다소 어려운 요구기는 하군. 다른 목적은 안 되는가?”

“애초에 그걸 바라고 왔기에 조금 곤란합니다. 그리고 저걸 보십시오. 어때 보이십니까?”

옷차림은 허름하지만 얼굴은 깨끗한 소년이 신중하고 조용히 음식의 맛을 즐기는 모습. 표정은 없지만 음식을 씹을 때 움직이는 부분 말고도 얼굴 근육이 이곳저곳 씰룩이는 것이 영락없이 맛을 탐닉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독은 눈을 감고 있는 그 얼굴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배를 곯던 평민이자 볼품없는 보급 식량만 먹던 수병이, 귀족이 되어 그 화려함을 처음 맛보았던 그 때를.

제독은 브란트가 소년의 표정을 보라는 말에서 뭘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 그래. 저 아이의 목적을 알겠어. 자네도 아나?”

“말씀하지 않으시니 저는 추측만 할 뿐입니다.”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제독은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행복감이 조금씩 묻어나오는 얼굴은 여전히 부지런히 음식을 씹고 있었다.

‘해적이 귀족이라......’

가시밭길일 텐데. 후작이라는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는 제독이나, 그의 시작은 평민. 때문에 지금까지도 귀족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사교 파티에 일절 참석하지 않고 태생 귀족인 부관을 대리인으로 보낼 정도다.

귀족들의 폐쇄성과 자존심, 권력에 대한 욕심을 알고 있는 제독으로서는 저 소년이 카스테냐 귀족 사회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목적을 이루긴 했는데 자신이 예상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은 보통 분노하기 마련.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세력까지 지니고 있는 마법사가 무슨 짓을 벌일지......

“작위를 얻는다는 건 절대 만만한 게 아니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자네 주군은 작위를 얻는다는 걸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는 모양인데, 내가 잘못 봤나?”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제 주군을 아군으로 둔다면, 그보다 더 든든한 아군은 없을 거라 자신합니다.”

제독은 브란트가 아군이라는 단어에 은근히 강세를 주는 걸 알아차렸다.

아. 이거, 정치적인 의미구나.

작위를 받는데 성공한다면 알레한드로 측 줄을 잡겠다!

알레한드로의 증언이 충실해야 작위를 받을 확률이 늘어나니 그런 선택지밖에 없긴 하다.

‘으음......’

그 의미에 제독은 고민했다.

겨울 동안의 연이은 패배에 안 그래도 좁은 입지는 더 좁아진 상태다. 최근엔 제독의 해임안이 올라왔다가 겨우 부결되기도 했다. 무적함대로 승승장구했을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의 출신성분까지 언급되면서 태생 귀족출신으로 제독 지위를 갈아치워야 한다며 여러 귀족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하다니...... 일단은 알겠네. 더 자세한 사항은 자네 말대로 이후에 논의하도록 하지.”

제독은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지금 벼랑 끝에 내몰린 꼴. 아무거나 잡을 게 필요했다. 그게 설령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물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방에서 뭐라고 하건 무적함대는 건재한 것처럼 보여야 하므로.

“넓으신 아량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보다 어서 들지. 기사는 많이 먹어야 힘을 잘 쓰지 않는가.”

“저는 괜찮습니다. 많이 드시지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브란트. 이 산더미같이 쌓인 음식 앞에서 식욕은 물론이고 침조차 나오지 않는다.

“흠, 알겠네. 유익한 대화였다네.”

제독의 말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브란트는 소년의 뒤에 석상처럼 자리했다.

‘충성스러운 친구로군.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소년의 사치스러운 식사는 장장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종업원들이 저 작은 몸에 뭐 이렇게 많이 들어가냐며 놀란 눈으로 쳐다볼 정도였다.

소년보다 일찍 먹고 나온 제독은 음식값을 대신 계산해주었다. 귀족 식당이 비싸긴 하지만 함대 하나를 운영하는 제독의 봉급과 수익은 그 정도는 거뜬하다.

‘만약 저 소년이 정말로 강한 마법사라면...... 조금이라도 은혜를 입혀 놓는 것도 좋겠지.’

소년이 가진 가치에 비하면 참으로 저렴한 투자였다. 그 볼품없는 투자는 제독이 현재 처한 위치를 보여주는 듯 했다.

***

이틀 뒤.

알레한드로 제독은 집무실에서 한창 전략을 구상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 바깥에서 경비의 말이 들려왔다.

“제독님, 마법사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덜컥 하고 문이 열리며 검은색 바탕의 카스테냐 수병 복장을 한 마법사가 들어왔다. 평소 입지 않던 옷이라 불편해서 그런지 솔기를 손가락으로 연신 집어댔다.

“부르셨습니까 제독님.”

“그래. 앉으시구려.”

마법사의 직위는 ‘카스테냐 무적함대 군종마법사단 단장’이었다.

니아트리브 함대와의 결전에 긴급하게 편성된 군종마법사단을 이끄는 마법사. 급수는 대략 3급이며 공기 마법 전문이었다.

이 윗줄의 마법사도 많지만 해전에서 효과적인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한정되어 있었다. 식물을 소환한다거나 흙을 다룬다거나 하는 마법들은 바다에서 쓸모없으니까 말이다.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자네가 만날 마법사가 있어서일세.”

“마법사,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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