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85화 (86/128)

85화

바다의 두 사자-3

제독은 호위만 몇 명 대동하고 거리로 내려갔다.

원래라면 장교 전용 식당에서 귀족적 식사를 해야 하겠지만 식재료가 떨어졌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배의 식량을 축낼 수도 없는 노릇.

‘어디보자...... 이 주변에 고급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이 몰린 곳엔 사람이 요구하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온갖 돈 벌 거리가 몰리는 법. 카디스는 해군 본부가 위치한 곳이다보니 수병과 장교가 요구하는 것들이 가득한 번화가가 발달한 곳이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전쟁 소식으로 사람이 빠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장교와 일반병이 원하는 게 서로 달랐기에 이용하는 거리 역시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거리 반대편인 수병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곳은 사람이 뜸해진 지금도 수병들로 북적였다.

‘아 저깄군.’

예전에 한번 갔었던 고급 식당에 도달한 제독은 식당 앞에 멀뚱히 서 있는 한 소년을 볼 수 있었다. 거리가 한산해서 눈에 띄고 얼굴에 한 안대 때문에 더 눈에 띄는 소년은 허름한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거지나 배에서 잔심부름하는 녀석 같았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데.’

알레한드로 제독은 태생 귀족이 아니었다. 평범한 평민으로 태어나 배를 곯고 자라며 수병에서 제독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었다.

식당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은 멍했다. 예쁘게 장식된 간판이 눈길을 끈 건지 아니면 저기서 먹어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건지. 가끔씩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군침을 삼키는 것 같았다.

“꼬마야.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제독의 부름에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니아트리브나 에크나르프와는 색다른 형식의 군복. 그 군복을 입은 이들의 가운데에 둘러싸인 귀족 복장의 인물.

소년의 눈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그냥, 서 있었, 있었습니다. 나으리.”

약간 어눌한 카스테냐 어로 말하는 소년.

“배고픈가?”

“예, 예!”

제독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귀족의 식사는 화려하고 남기는 게 많다. 어차피 버리게 될 거 남는 건 던져줄까.

“따라오거라. 잔반 정도는 줄 수 있다.”

소년의 눈이 번뜩였다. 내리깔았던 눈을 순간적으로 제독을 향했다가 아차 하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보면 안 돼. 카스테냐 귀족에게까지 미움 받으면 더 이상 등 기댈 곳이 없다.’

제독은 순간적으로 마주친 시선에 뭔가 섬뜩함을 느꼈지만 제독은 그런 조그만 것에까지 모두 신경을 쓰기엔 그간 걱정으로 몸이 너무 지쳐 있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 식당에서 검은 갑옷의 기사가 절그럭거리면서 나왔다. 기사는 소년과 제독을 번갈아 보더니 제독에게 예를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카스테냐의 창이자 방패이신 무적함대 제독 알레한드로 후작님을 뵙습니다.”

기사가 일정 수준 이상의 귀족만이 가능한 옷차림과 장식 등을 알아보고 제독에게 인사를 건넸다. 알레한드로 제독은 이름 드높은 무적함대를 지휘하는 인물인 만큼 각국 사교계에서 유명인사였다. 무적함대가 몰락하기 전까지 그의 명성은 계속 유지되리라.

“흠, 날 아시오? 에크나르프 발음이 진하구려.”

“에크나르프에서 온 그저 명성 없는 떠돌이 기사일 뿐입니다.”

떠돌이 기사라. 요즘 세상에 떠돌이 기사는 별로 없는데. 제독의 눈이 살짝 치떠졌다.

“식사하고 나온 거요?”

“식사 주문을 하고 나왔습니다. 데려갈 사람이 있어서요.”

“그럼 혹시 이 아이가 자네 종자인가?”

“종자는 아닙니다만, 관련은 있습니다.”

“그런가?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식사나 하지 않겠나?”

한낱 떠돌이 기사에게 선뜻 겸상을 허락하는 고위 귀족이라.

‘소문대로 많이 힘든가 본데.’

기사를 포섭하고 싶어서인가? 요즘 탈영이 많이 일어난다더니.

“귀하신 분과 자리를 같이한다면 그저 영광일 뿐입니다.”

이유야 어쨌건 좋은 기회다.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 둔다면 차후에 있을 작위 임명에도 좋은 영향을 주겠지.

‘윌리엄에게 미안한데.’

소문을 수집하러 여기저기 쏘다니는 윌리엄을 뒤로한 채 둘은 제독을 뒤따라 고급 식당으로 들어갔다.

***

소년은 눈이 반쯤 뒤집혀 있었다.

이 향기!

이 고기 냄새! 이 기름 냄새!

각종 향신료 냄새가 소년의 코를 통해 뇌에 보석이 빛나듯 반짝임을 심어주고 있었다.

소년의 눈앞에서는 온갖 음식들이 수레에 실려 차곡차곡 드넓은 식탁 위에 올라오고 있었다. 신대륙 개척에 성공한 국가답게, 신대륙의 음식들이 다소 포함된 음식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설탕과 고구마, 옥수수가 있었다. 신대륙을 오가는 상선을 약탈하여 소년 역시 신대륙의 음식을 조금 맛보긴 했지만 제대로 요리할 줄 아는 이가 없어 제대로 된 본연의 맛이 나오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전문 요리사의 손길이 닿은 이 요리들은 신대륙의 식재료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었다.

잘 조각된 설탕꽃이 듬뿍 얹힌 큼직한 칠면조 구이, 사과를 입에 물고 등에 칼집이 큼직하게 새겨지고 그 위에 노란 옥수수알이 뿌려진 새끼돼지 통구이, 각종 채소를 잘게 썰고 그 사이에 닭고기를 채썰어 넣고 새콤한 냄새가 나는 소스를 끼얹은 음식, 달달한 고구마를 설탕 혹은 카스테냐의 전통 소스에 절여 만든 음식, 비싸다고 소문난 굴 요리가 한 접시에, 홍합을 비롯한 이매패류가 듬뿍 들어간 스튜, 평범하게 구워지거나 찐 형태지만 그 안에 들어간 고기나 향신료는 전혀 범상치 않을 음식 등등등......

소년에게는 식재료가 뭔지, 무슨 조리법인지 하나도 알 길이 없었지만 단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음식이...... 먹어달라고 소리치고 있어!’

소년의 눈앞에 가득 쌓인 요리들이 어서 날 먹어달라고 냄새로 손짓하는 환각이 보일 정도였다.소년의 혀가 그동안의 고통을 감내한 것이 이때를 위한 일이었다며 감격의 눈물을 질질 흘렸다.

이리와~ 이리와~

오냐! 간다!

소년의 눈이 번득이며 소년의 손이 가득 쌓인 음식을 향해 내뻗어졌다.

에크나르프와 카스테냐는 가까운 국가라서 식사법(당연히 귀족식) 자체는 비슷했지만 음식이 차려지는 방식은 달랐다.

보르도에서 소년이 겪은 것처럼 에크나르프식 상차림은 여러 가지 요리가 차례차례 나와 ‘여러 음식을 맛보는 것’이고, 카스테냐식 상차림은 여러 음식들을 한꺼번에 차리는 ‘옛 방식’이었다. 에크나르프식 상차림은 생긴 지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유로파 대부분의 지역에선 푸짐한 옛 방식으로 먹곤 했다.

소년은 옛 방식 또한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게 다 먹을 거란 말이야?

‘옛날 귀족과 왕이 왜 이런 방식으로 먹었는지 알겠어.’

소, 돼지, 칠면조, 생선 등의 다양한 식재료가 자신과 맞는 양념에 절여지고 구워져 반짝이는 기름을 덮은 채 일제히 등장하는 것은 눈과 코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이었다. 음식의 온도를 유지하느라 몇몇 음식 밑에 화로가 끼워져 나와 조금 덥긴 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에크나르프 식은 다음에 나올 음식이 뭔지 기대하게 만드는 기쁨에 좋았다. 그렇지만 푸짐하게 나오는 옛 방식 역시 나름 괜찮았다.

소년은 우선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서부터 음식을 이리저리 골라 담아 접시에 담은 뒤......

‘태어나길 잘했어!’

기쁨을 맛보았다.

아아, 이 육즙! 이 향미! 이 치아에 가해지는 씹는 압력으로 느껴지는 쫄깃한 육질!

그동안 바다 생활을 하면서 먹었던 것들은 모조리 짐승이나 먹는 것으로 격하되어 느낄 만큼 고급 요리는 어마어마한 맛의 파도로 소년의 정신을 휩쓸었다.

바다에서 지낼 땐 재료가 늘 해산물뿐이었다.

낮에도 생선, 저녁에도 생선.

다리 여러 개 달린 것이나 일부 금기시된 것들은 바다의 악마니 뭐니 하면서 낚아도 선원들이 버리곤 했기에 소년이 먹을 수 있던 것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또 아소르스 제도가 육지와 떨어져 있다 보니 식재료를 공수해 와도 오다가 상하지 않을 반건조식품이나 먹어야 했고, 원양항해를 하는 배들 역시 신선한 식재료가 있을 리가 없으니 약탈해도 소용이 없었다. 신대륙 식재료는 요리하는 법을 아는 이가 없어 굽거나 끓이는 게 다였다.

그나마 향신료는 많아 이리저리 배합비율을 바꿔 가면서 풍미에 변화를 주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 요리솜씨였다.

해적들이 음식 만드는 손재주가 좋을 리가 없다. 좋아봤자 귀족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전문 주방장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해적이나 항복한 선원들 중에 요리사랍시고 있는 녀석들은 말이 요리사지 그냥 요리하는 역할을 맡은 선원에 불과했다.

니아트리브 함대에게 패배한 이후 한동안 시체 선원들이랑 지내야 했을 때는 더욱 상황이 악화되었다. 데리고 온 놈들 중에 요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녀석이 없었던 것이다.

스튜에 생선가시가 둥둥 뜰 때도 있었고 비늘 제거를 제대로 못해 비늘을 씹는가 하면 내장을 잘못 건드려 비린내가 진동한다거나 너무 끓여 살이 마구 부서지기도 했다.

요리법은 늘 스튜 아니면 구이.

그런 막손에 고통스러워하며 맛에 목말라 있던 소년이니, 다시 만난 섬세한 맛에 환호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빨리, 귀족이 되어야 해!’

소년은 다시금 맛보는 기쁨에 어떻게든 귀족이 되어야 하겠다며 욕망을 불태웠다.

***

“이보게나, 저 아이, 귀족인가?”

알레한드로 제독이 소년을 가리키며 브란트에게 물었다. 소년은 속에서 기어나오려는 폭식 욕망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에크나르프 식으로 정갈하고 천천히, 귀족적으로 먹고 있었다.

“......귀족은 아니지만, 제가 모시는 주군이지요.”

제독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성도 받지 못한 떠돌이 기사가 모시는 주군이라? 꼴이 저런 걸 보니 몰락 귀족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귀족 핏줄이라는 것도 몰랐던 사생아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까 배 하나가 들어오던데, 자네 배인가?”

“그렇습니다.”

“간도 크군. 전쟁이 일어날 곳에 발을 들이밀다니.”

제독의 목소리에 약간 날이 서 있었다.

“......”

“카스테냐 해군에 볼일이 있어 왔나?”

제독의 눈이 조금 더 사나워졌다. 브란트의 표정이 굳었다.

‘의심하고 있군.’

니아트리브는 에크나르프 해군을 전멸시켰다. 당연히 에크나르프 수병들을 포로로 다수 잡았을 것이다. 곧 상대할 카스테냐에 에크나르프 포로를 첩자 용도로 보내는 건 있을 법한 일이다.

‘다른 선원들도 대동하지 않고 기사와 아이만 덜렁 왔다갔다한다? 선원들이 니아트리브 인이라 그런 게 아닐까?’

이 둘의 사정이 어찌되었길래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모르나, 첩자라는 가정은 누구나 해볼만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체포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 쪽으로 오게나. 무적함대는 니아트리브를 박살낼 게야.”

제독은 그 무적함대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숨기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제독은 군에 오래 몸담았고 기사 역시 많이 봐왔다. 이 에크나르프 출신이라는 기사는 그 규칙적인 발걸음 등으로 보건대 위장이 아니라 기사가 확실하다.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인데 기사라면 회유할 가치가 있다. 더구나 첩자이기까지 한다면 이중첩자로 전황을 뒤집을 수도 있겠지. 니아트리브와 앙숙인 에크나르프 인이라 회유가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여차하면 저 소년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고.

“죄송합니다만 저흰 첩자가 아닙니다.”

알레한드로 제독의 표정이 굳었다. 거부하겠단 것인가? 하지만 브란트가 뒤이어 꺼낸 말은 제독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다만 카스테냐를 도와주러 왔지요.”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 배 한 척으로 말인가?”

“한 척이긴 하지만, 그게 수백 척의 해적선을 휘하에 둔 이의 한 척이라면 어떻습니까?”

브란트는 정체를 드러냈다. 먼저 패를 까는 만큼 협상에서 우위를 잡기는 어려우나, 카스테냐 해군의 상황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확신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본 브란트다. 이미 무적함대의 명성은 드높은데, 굳이 무적함대는 니아트리브를 깨부술 것이라 자랑한다? 브란트가 보기엔 제독의 저 말은 자신에게가 아니라 제독 스스로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사신이구나. 대선장이 보냈는가.”

“정확히는 대선장 본인입니다.”

브란트가 손을 펼쳐 소년을 가리켰다.

“저 아이가? 믿기는 힘든데, 증거를 보여줄 수 있나.”

“주군. 마법 하나만 시연해주시지요.”

표정이 푹 풀린 채 눈을 감고 소 안심 스테이크를 씹던 소년은 돌아볼 시간도,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그저 손을 휙 휘저었다.

끼기기긱

그리고 식당 한편에서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식당 벽에 장식용으로 세워져 있던 장식용 갑옷이 통째로 뭉쳐지는 소리였다.

끼, 끼긱, 끼기기.......

탱그렁 하고 갑옷이 잡고 있던 창이 바닥을 구르고, 한 벌의 전신 갑옷은 한낱 쇠뭉치나 다를 바가 없어졌다.

그 광경을 본 종업원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고기 더 뜯어 줘.”

“아, 예, 예!”

소년이 재촉하자 소년의 옆에서 수발을 들던 종업원이 얼른 칠면조 다리를 뜯어내 살을 발라냈다.

종업원들과 똑같은 표정을 지은 제독이 얼빠진 표정에 걸맞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마법사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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