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바다의 두 사자-2
따스한 봄 날씨가 완연해진 4월.
겨울 동안의 해전을 통해 카스테냐의 상태가 말도 아니라는 걸 파악한 니아트리브 해군 수뇌부는 이번 기회에 카스테냐를 누르고 해양 패권을 장악하자고 결심했다.
다만 엘리자는 남하하는 병력에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해군력 1위 국가의 해군전력을 대마법사를 사용해서 박살내버리면 각국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갖은 핑계로 자기네들 대마법사를 전장으로 동원하던가 아니면 어떻게든 엘리자를 죽이려 들겠지. 최악의 경우엔 마법사 연맹에 돈을 퍼부어 엘리자와 니아트리브를 고립시킬지도 모른다.
마치 1급 전열함이 최고 경계대상이라 전장을 나다니기보단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항구에만 정박해 있는 경우와도 비슷했다.
니아트리브의 여왕도 이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엘리자는 어디까지나 해양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너네 우리 건드리면 클난다!’식의 비대칭전력 및 억지력으로 쓸 셈이었지 남을 찔러 죽이는 창으로 쓰려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 직후 에크나르프의 행동은 니아트리브의 계획을 약간 비틀어버렸다.
에크나르프 해군이 니아트리브 해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도버 해협을 봉쇄하는 것도 모자라 니아트리브의 코앞인 린던 앞바다까지 몰려온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 니아트리브 왕실은 순간 머리가 마비되었다. 설마하니 상대가 앞뒤 가리지 않고 해군 전체를 끌고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번 전쟁은 영토분쟁이 아니고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명분에서 시작된 문제. 상대방의 병력을 일소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그런데 에크나르프가 보인 군사적 행동은 명백히 ‘니아트리브를 없애버리겠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 수도 코앞에 해군 전체를 끌고 왔다는 것에서부터 그 의도는 너무나 뻔했다.
니아트리브의 여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엘리자를 억지력으로만 쓸 생각이었다. 대마법사를 종군시키는 것부터 정치적인 부담이 상당할 텐데, 대마법사라는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면 정말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도버 해협을 흰 백합 깃발로 가득 채워버린 에크나르프 해군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에크나르프 촌놈들. 우리를 곤란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면 이미 달성했다.’
엘리자를 동원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망하고, 엘리자를 동원해도 이 시대에 처음 있는 대마법사 동원이 되는 셈이라 그 의도가 어찌 되었건 여러 나라들의 경계를 살 것이다.
이왕이면 은밀하게 마법사 연맹에 연락하여 대마법사 종군을 허가받고 조용히 카스테냐 해군을 짓밟을 예정이었건만.
결국 니아트리브는 ‘국가가 멸망할 위기였다’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대마법사 엘리자를 동원하여 에크나르프 해군을 한 척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킬 수밖에 없었다.
니아트리브가 마법사 연맹에 제출한 해명문에 있던 ‘에크나르프 해군 전멸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라고 쓴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한 국가의 해군전력을 완전히 격멸했다는 파급력과 뒤이은 아소르스 제도에서의 전투기록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조명되지 않아서 그렇지.
다행히도 마법사 연맹은 이러한 뒷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연맹의 조사 끝에 엘리자가 에크나르프 해군을 격퇴시킨 건은 명분이 충분한 사유로 인정된 것이다.
타국이 니아트리브에게 대마법사 문제로 정치적 공세를 하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사정을 알고는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카스테냐를 꿀꺽하려는 에크나르프에게 그 핑계로 한방 먹였다는 점에서 은근슬쩍 엄지손가락을 올릴 정도였다. 적의 고통은 자신의 기쁨인 법이다.
그래서 어차피 패권도 코앞이겠다, 엘리자의 공포 효과도 누렸겠다, 정치적 문제도 피할 겸 엘리자를 전장에서 빼 버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마법사만 뺐을 뿐이지 카스테냐를 완전히 짓눌러버리겠다는 의도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기만작전으로 급수 낮은 물마법사들을 다수 포함시켰다.
그렇게 겨울 내내 카스테냐 함대를 밀어붙이던 함대는 다시 린던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정비를 마친 제 2, 4함대와, 육군 병력을 모두 수송하여 여유가 생긴 제 3함대가 한자리에 모여 카스테냐와 해양 패권을 건 일전을 벌이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
카스테냐의 남쪽 군항 카디스.
카스테냐 북쪽 해안을 약탈하며 돌아다니는 니아트리브 대함대에 대한 얘기는 해군 내에 무성했다. 전열함 떼가 작정하고 몰려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에 카스테냐 해군에는 탈영병이 매일 수십씩 생겨났다.
알레한드로 제독을 위시한 장교들은 처형하고 채찍질해도 줄어들지 않는 탈영에 한숨만 지었다.
왕실에서는 출정하여 니아트리브 해군을 몰아내라고 명령이 내려왔지만......
“사기가 이런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무적함대의 주인이자 카스테냐 해군의 총사령관인 알레한드로 제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왕실에게 혹시 카스테냐의 대마법사는 종군이 가능하냐고 물었지만, 이미 대마법사 종군에 관한 빡빡한 규제가 마법사 연맹에서 발표된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시기를 적절하게 잘 잡은 니아트리브의 승리였다. 또 카스테냐의 대마법사는 물 위에서 힘을 잘 못 쓰는 마법이 주력이었다.
왕실에서는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는 우리와의 해전에 동원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니까.’이라고 말해주며 안심하라 했다.
하지만 말이야 쉽지!
제독 역시 그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해군 전체를 납득시키기엔 힘들었다.
제독은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니아트리브가 정치적 악수를 둘 리가 없다.
하지만 장담은 금물.
과감하게 대마법사를 전장으로 끌고 나온 기행의 나라가 한 번 더 불문율을 깰지 누가 알겠는가. 한 번은 어렵지만 그 다음부터는 쉬운 법이다. 패권이 눈앞에 있는데 눈 딱 감고 질러댈 지도 모르잖은가!
물마법사가 안 와도 이미 사기는 바닥이라 정상적인 해전조차 무리였다. 겨울 동안 벌어진 꼴만 봐도 그렇다.
‘차라리 이슬람 해적이라도 고용해야 하나?’
하지만 근방의 이슬람 해적은 이미 아소르스 제도의 유로파 해적들에게 된통 맞고 세력이 쪼그라든 상태였다.
“제독님, 그, 탐탁지는 않지만 아소르스 해적들의 손을 빌리는 게 어떨지요? 물마법사를 상대로 어느 정도 피해는 입혔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해적이 아니라 정확히는 전대 대선장인 사령술사의 솜씨지. 해적 수가 많으니 총알받이라도 해주겠다만, 이미 그쪽은 새로운 대선장이 나타나서 통합이 되었다고 한다. 자기 살 깎아먹는 방패 역할을 뭣하러 해주겠나?”
한 장교의 말을 핀잔으로 받아친 제독이 긴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손을 얹었다.
고지대에 위치한 사령부인지라 카디스 항의 전경이 환히 내려다보였다. 큼직한 군함들이 잔뜩 몰려 일대 장관을 이루었지만, 싸움은 외관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사기라도 괜찮았다면 이대로 나가서 한바탕 하겠다만.
제독은 또다시 한숨만 내뱉었다.
그의 눈에 전쟁으로 배의 출입이 뜸해진 항구로 한 척의 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상선인가. 배짱도 좋지.
“회의는 이쯤 한다.”
회중시계를 보니 마침 점심 때였다.
회의실을 나가는 장교들이 삼삼오오 모여 뭐 먹을까 하며 얘기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지만 일단 먹어야 머리를 굴리건 싸우건 하지 않겠는가.
제독은 전쟁 걱정에 식욕도 떨어졌지만 그래도 먹어야 힘이 난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식당으로 향했다.
***
“카스테냐의 정경은 또 다르네.”
볼품없는 소년이 카디스 항의 흰색 칠이 된 건물들을 슥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한때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라 그런지 둥근 이슬람권의 건축양식과 빳빳한 유로파식 건축양식이 뒤섞여 독특한 향취를 풍겼다.
소년의 옆에서 검은 갑옷의 기사가 말했다.
“제가 에크나르프 중부 출신이라 잘은 알진 못하지만 에크나르프 남부와 크게 다르진 않다고 들었습니다. 밝고, 쾌활하고, 개방적인 게 보편적이라고 판단됩니다.”
그 옆에서는 진녹색 외투를 차려입은 윌리엄이 주위를 매섭게 둘러보았다.
“확실히 전쟁 중이긴 하나 봅니다. 도시 전체에 생기는커녕 사람도 없네요.”
윌리엄의 말대로 이 큰 항구에 나다니는 사람은 적었다. 아니면 단순히 사람이 없는 시간대던가.
“우선 숙소부터 잡고 좀 씻은 다음에 옷가게로 가죠.”
항구에서 입항 수속을 밟은 브란트의 뒤를 따라 소년 일행은 거리를 걸었다. 몇 없는 사람들에게 겨우겨우 물어 가면서 도착한 한 여관에 자리를 잡은 소년은 옷을 주문하러 갈 준비를 마쳤다.
여관 주인에게 물어 도착한 의류점.
“자, 들어가시죠.”
귀족이 쓰는 곳이라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가게는 도시 전체의 분위기처럼 한산했다.
“오, 기사님이시군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희 가게는......”
손님을 맞은 점주는 이 가게는 언제부터 지어졌고 어느 유명 가문에 옷을 납품했는지를 쭉 읊었다. 귀족일 것이 분명한 이 기사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역사를 나열하는 것이다.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이 또한 귀족들의 예의. 장장 10분에 걸친 설명을 다 받아주고 난 뒤 브란트는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옷은 이분이 입을 것이다. 최신 유행에 맞춰서, 최고급으로, 이 특징에 따라 만들도록.”
브란트의 손에는 주머니 말고도 종이조각이 있었다. 종이에는 옷의 상세한 색깔과 특징 등이 적혀 있었다.
“흐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련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치수를 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옷은 이틀 뒤에 받아 가시면 됩니다. 도련님께서 많이 말라서 치수를 좀 크게 했습니다. 살이 붙으시면 딱 맞을 겁니다.”
“이틀이라, 시간이 짧은데. 요즘 주문이 없나?”
“뭐, 니아트리브 함대가 몰려온단 소문에 언제 여기가 전쟁터가 될지 몰라서 말입니다. 많이들 빠져나가서 요즘은 통 주문이 없습지요.”
의류점 주인이 하하 웃었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사람이니만큼 사사로운 감정은 없이 정중한 말투였다.
의류점을 나온 소년은 브란트를 돌아보았다.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브란트는 그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저도 여기는 처음인지라 음식점은 잘......”
“물어보고 와.”
소년이 방금 나온 의류점을 가리켰다.
지금껏 바다에서 지내느라 거친 음식만 먹어온 소년의 눈은 육지 음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지역의 새로운 음식!
자신을 기쁘게 해줄 음식이 얼마나 있을지 눈을 번쩍이는 소년은 마치 사막에서 연못을 찾은 이처럼 보였다.
***
한편, 해군 본부의 식당으로 내려간 알레한드로 제독은 황당한 말을 들어야 했다.
“식재료가 떨어져?”
“죄송합니다.......”
“허 참.”
아무리 그래도 해군 본부의 식재료가 떨어지다니? 식재 수량 하나 파악 못한단 말인가? 어쩐지 부대 밖으로 나가는 장교들이 많더니만.
“그, 식재료 주문을 맡은 녀석이 탈영해 처형되는 바람에...... 행정에 구멍이 난 모양입니다. 이틀 뒤에는 정상적으로 들어오겠지만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식당 관리를 맡은 장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하는 모습에 제독은 그저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쯧, 오늘은 시내로 내려가야겠네. 원래는 채찍형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특별히 봐줌세. 지금이라도 빨리 식재료 공수해오게. 안 그래도 탈영이 자꾸만 생기는데 못 먹어서 탈영병이 더 늘어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야. 서두르게. 자네가 직접 움직여.”
“감사합니다!”
허둥지둥 뛰어가는 장교의 뒷모습을 보며 제독은 땅이 꺼질 듯 또 한숨을 내뱉어야 했다.
‘이게 어떻게 해군력 1위의 카스테냐 해군이란 말이냐......’
마법사 한 명이 이렇게까지 파급효과가 클 줄은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법사란 작자들은 자기들끼리만 고고하게 놀면서 돈이나 축내며 가끔씩 전투에서나 밥값하는 이들인 줄만 알았는데.
시내로 향하는 제독의 걸음걸이는 참으로 무거웠다. 해군의 전체의 운명이, 카스테냐의 국운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어서 그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