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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82화 (83/128)

82화

아소르스의 마법사왕-8

대서양 너머.

어떤 용감한 모험가가 거대한 바다 한복판을 가로질러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뭐가 있는지 몰랐던 미지의 세상.

그러나, 한 번 목도한 이상은 더 이상 미지가 아니었다.

광대한 땅, 처음 보는 식생, 무성한 나무, 맑고 투명한 바다. 그리고......

두 발로 걸어다니는 생물.

대서양을 건넌 탐험대는 기진맥진한 채, 육지에 다다랐다. 그리고 거기엔 그 땅에 살고 있던 인간과 닮은 생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의식을 치루고 있던 듯,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기묘하게 생긴 장식을 도처에 꽂아 둔 채,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다가 만 상황이었다.

“$*!!#$%^!!!”

“$%&^##!!”

그들은 배를 타고 도착한 이들을 반겼다. 보통은 외지인을 경계하기 마련이건만, 그들은 정말로 환호를 지르고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탐험대는 영문도 모른 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 대접이란 것은 유로파의 기준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이, 이런 미친! 동족을 죽여서 요리하잖아!”

그들은 식인을 했다. 그것도 많이. 아주 아주 아주 많이.

“이놈들은 역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이토록 잔인하고 야만적일 수가 없다.

외모 역시 유로파의 ‘인간’과는 많이 달랐다. 귀는 엘프보단 작았지만 뾰족했고, 유로파의 인간보다 건장하고 단단한 체구였다. 피부는 갈색이었고 치아는 상어처럼 뾰족뾰족해 동족을 잡아먹는 이들에게나 어울렸다.

인간과 같은 점이라곤 이목구비가 달렸단 점과 두 팔 두 다리가 달렸다는 것뿐.

시작부터 삐걱였던 두 대륙의 만남은 세월이 지나 오해와 반목이 반복되며 현재와 같은 상황에 도달했다.

원주민들은 총칼과 전염병에 학살당했고 노예로 잡혀 학대당하며 죽어갔다. 그들이 이룩한 문화는 불살라지고 기록조차 말소되었으며 가지고 있던 귀금속들은 모조리 빼앗겨 유로파로 보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대륙에는 학살이 만연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신대륙을 지배하려는 일반적인 유로파인들과는 다른 목적의 학살이 끝났다.

“......”

피와 그을음에 뒤덮인 갑옷 위로 흰 천이 덮였다. 마치 피와 그을음을 만들어낸 행위를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갑옷을 덮은 천은 기이하게도 피에 물들기는커녕 깨끗함을 유지하며 냄새도 싹 지워주었다.

“이제 만족합니까.”

완전히 몸을 감싼 천 밑의 그늘에서 얇고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앞에는 검은 서코트를 걸친 흰 갑옷의 기사들이 둥글게 서 있었다.

투구 밑에서 건조한 음성이 울렸다.

“아직 남았습니다. 많이.”

“......”

천을 뒤집어쓴 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기사는 알 수 있었다. 원독 가득한 눈빛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음을. 동시에 그런다 한들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음을.

기사의 시선은 여자에게서 돌려져 그 주변을 훑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집들이 타닥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잿가루로 화하고 있었다. 곳곳에 선혈을 뿌리며 쓰러진 시체들이 보였다.

갈색 피부와 뾰족한 이빨. 원주민들이었다.

집들은 그들이 살던 집주인들을 따라 죽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얼마나 더 이런 살육을 저질러야 합니까. 단장.”

여자의 말에 단장이라 불린 기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날 뿐이었다.

“들어가시죠 성녀님.”

여자, 성녀는 다른 기사의 말에 천천히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이 만든 둥근 원 안이었다. 체념한 발걸음이 원 안으로 들어가고, 옆으로 물러섰던 단장은 경비를 서듯 한 발을 움직여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철창 안에 야수를 가두듯 신중하고 동시에 경건했다. 마치 일종의 의식을 치루는 듯했다.

실제로도 무언가 변화가 있는 건지, 단장이 문을 닫듯 원 위치로 돌아간 순간 둥근 원을 이룬 열 명의 기사들의 흉갑에 새겨진 십자가가 일순간 희게 빛났다.

그들은 교황청에서 재앙을 막기 위해 출격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받은 임무는 재앙의 일소. 교황청은 이전에 받은 별들의 계시가, 신대륙의 원주민들이 독심을 품고 유로파를 해하려 한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걸 막기 위한 수단은 하나뿐.

‘재앙의 씨앗이 될 원주민을 모조리 없앤다!’

지금 이 기사와 성녀 말고도 몇 천의 교황청 병력이 원주민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으리라.

“움직인다. 재앙의 가능성을 일소하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단장의 말과 함께 기사들이 한 몸처럼 척척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원의 가운데에 위치한 성녀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매달린 것처럼 기사들이 만든 원의 움직임에 따라 휘청휘청 움직였다.

성녀는 품에서 조그만 조각을 꺼냈다. 카톨릭의 위대한 선지자를 조각한 성상이었다. 성녀는 그 성상을 으스러지듯 꽉 쥐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불타는 원주민 마을을 뒤로 한 채, 산 너머로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

어두침침한 회의실. 은은한 녹빛을 띠는 음침한 석재 원탁에는 온몸을 검은 로브로 가린 이들이 앉아 있었다.

둘러앉은 이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소식 다 들었습니까?”

한 명이 운을 뗐다.

“무슨 소문?”

무슨 말을 하는지 앎에도 누군가가 반문했다.

“뭣 때문에 모인 건지 다 알면서 그런 말을. 니아트리브의 물마법사를 바다에서 패퇴시킨 사령술사 때문이 아니오?”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 종군으로 인해 한때 전 유로파가 떠들썩하면서 이들에게도 그 전투기록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니아트리브의 물마법사 엘리자는 해적과의 해전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아소르스 제도의 점령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함대의 피해도 꽤나 커 사실상 사령술사를 죽였다는 것 이외에는 패전이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중진을 뽑을 때가 되었지요?”

그 말에 모두가 술렁였다.

“몇 달 전에 사령술사 하나 빌려오지 않았나? 그런데 또? 사람이 남아나질 않을 텐데.”

“마법사 연맹에 제출된 기록을 보면 그렇게까지 세력을 크게 얻은 것도 그렇고, 전술적인 것도 그렇고 머리 꽤나 좋은 녀석인 것 같더군요.”

“악마에게 영혼을 또 빌려달라니..... 누구랑 계약했을 줄 알고.”

“하지만 그 사령술사가 우리의 전력에 정말 보탬이 되리란 확신이 있소? 기껏 큰 대가를 지불하고 영혼을 빌려 왔더니만 힘도 제대로 못 쓰는 쭉정이면 어쩌려고?”

“그래서, 그 쭉정이었던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악마와 계약하기 전 별 볼일 없는 작자들이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나 세를 확장한 이유가 무엇이외까? 능력 있는 악마 계약자를 다시 되살려 지원을 해주기 위함이 아니오? 그리고 그 세를 확장하여 얻은 게 무엇이외까? 우리 뒤를 든든히 후원해 주는 각지의 악마 숭배자와의 연결! 많은 이들의 구원! 그리고 적그리스도 후보들!”

그가 손을 높게 쳐들며 목소리에 열을 올렸다. 이 단체에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열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손을 치켜든 탓에 로브의 소맷자락이 슥 내려갔다.

“큼.”

그는 로브 자락이 흘러내린 것에 화들짝 놀라 급히 손을 가렸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의 열기는 다소 내려갔다.

“전투 기록으로 보건대, 우리와 합류하면 꽤나 큰 힘이 될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자꾸 마법사 연맹의 눈길이 거세지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뭘 하려고만 하면 연맹이 달려드는 판에 자꾸 꼬리가 잘린단 말이야. 이번 전쟁에 엘가리 왕 건에서 공작을 좀 해서 그런가.”

“그러면서 내부는 또 조용하다지 않소이까. 정말 숨기는 것 하나는 유능한 놈들이오.”

“진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방해하기는!”

“점성술사들이 시끄럽다던데. 별의 분노도 그렇고, 이런 혼란한 상황일 때 파고들어야 한다 생각하오.”

“그러려면 연맹이 파악하지 못한 새 얼굴이 필요하지.”

“암. 그렇고말고.”

“그러면 어서 의식들 준비합시다. 각 지부에서 구할 사람 뽑으시고.”

“그런데 몇 달 전에 한 번 대여하느라 구할 사람이 많이 떨어졌어. 당장 내 담당 구역만 하더라도 마법사 놈들이 눈치 채고 이주 금지 명령을 내렸다고. 지금 마땅한 곳이 있으려나?”

“정 부족하면 시베리아나 한번 가봐야지 뭐. 엘프 영혼도 구하기는 해야지.”

“망할, 또 생고생하겠네. 아무리 소수 부족이라 해도 엘프 잡기가 얼마나 귀찮은데......”

시끌시끌 떠드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이번 회의를 소집한, 물마법사를 패퇴시킨 사령술사를 되살리자는 의견을 낸 이가 돌 탁자를 탁탁 쳤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규칙 상 한 회의에서는 의제를 제안해 회의를 주최한 이를 존중해야 했다. 모두가 직급상 동등한 높이이기에 자칫 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말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 회의는 이만 끝내지요. 각자 악마 분들과 연락해서 최근에 들어온 영혼 조사하시고, 구할 영혼 조정은 지역 담당끼리 만나서 하십시다. 마법사 연맹에게 꼬리 안 밟히게 조심하시고.”

“예에-”

“모두의 구원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의 음침한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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