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81화 (82/128)

81화

아소르스의 마법사왕-7

방년 38세. 아니 40이 넘었으려나?

자신의 나이도 잘 모르는 이 시대의 흔한 남자, 로보는 한 손에는 우물에서 뜬 물동이를, 한쪽 어깨에는 대걸레를 들고 휘파람을 불며 어디론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도착지는 활짝 열린 문짝 안.

“엇차.”

물동이를 내려놓은 로보가 낡은 천을 엮어 만든 대걸레를 첨벙 물동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슥슥 닦기 시작했다.

“오오~ 세뇨리따~ 그대의 지중해 같은 푸른 눈동자를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슥슥 바닥을 스치는 대걸레에 끈적한 물이 스르륵 스며들었다. 몇 번 닦지도 않았는데 금세 검붉게 변하는 대걸레.

“에이, 물 몇 번 더 부어야겠네.”

대걸레를 가지고 오기 전까지 다섯 동이의 물을 부었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진하다니.

로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닦고 있던 넓은 방 안을 슥 둘러보았다. 사방이 칼이라도 휘둘렀는지 푹 패인 자국이 나무벽에 즐비했고 몇 군데는 총알이 관통해 바깥의 빛이 광선이 되어 쏘아져 들어와 어두컴컴한 안을 밝히고 있었다.

빛기둥은 불 한 점 없는 방의 정경을 그대로 비추어 주었다.

넓은 방, 아니 널따란 창고였다. 원래는 어구나 포대 등 보관할 수 있는 건 아무거나 넣어 사용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명과 절규가 스며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음산해져 있었다.

사방이 살아있던 이들에게서 배어져 나온 액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몇 군데는 신체 일부가 굴러다니기도 했다.

‘아, 이번 시체청소 담당은 카르니인데. 이놈 이거 제대로 치우지도 않고.’

로보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창고 안에 돌아다니는 사지를 주워 바로 옆의 바다에 던져 넣었다. 피로 범벅된 고깃덩이는 돌로 만들어진 테르세이라의 항구 부두 시설에 툭 부딪히며 물 밑으로 사라졌다.

‘하, 그나저나 정말 다행이란 말이야.’

만일 대선장님께 항복하지 않았다면 언젠간 이 꼴을 당했을 것 아닌가.

로보는 한때 선장이었다. 그것도 열 척이나 되는 해적단을 이끄는 중견 해적단의 대장이면서, ‘머리 부수개(Head smasher) 로보’라 불리던 나름 악명 있던 해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님’이자 ‘대선장’이며 ‘마법사왕’의 한낱 선원에 불과했다.

‘그래도 불만은 없어.’

오히려 만족했다.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질병에 시달릴 염려도 없다.

카스테냐의 항구에서 로보(도둑)라는 이름을 받고 자란 그는, 모든 산 자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단 것만으로도 좋았다.

‘세력싸움 때 얼른 달려가서 고개를 숙인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어.’

그 무시무시한 물마법사랑 싸웠을 땐 좀 무섭긴 했지만, 이렇게 유령으로 되살려주셨지 않은가! 주인님이자 위대하신 대선장님과 함께라면 말 그대로 무서울 게 없었다.

‘아, 딱 하나만 빼고.’

바로 로보의 영혼의 주인이자 그가 영원히 섬겨야 할 존재, 대선장.

-나머진 죽여.

소년이 후드를 벗으며 대수롭지 않게 명령할 때마다, 수십에서 수백의 해적들이 죽어나갔다.

그들이 죽어나간 곳은 다름 아닌 로보가 청소하고 있는 이 창고.

청소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로보는 그 참상을 똑똑히 목격했다.

대선장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족히 수백 명은 서로 무기를 맞대야 생길 법한 비명과 쇳소리가 문틈을 타고 내달렸다. 펑펑하고 이따금씩 총알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침묵에 짓밟혀 사라졌다.

그러고 난 뒤에는 창고 문이 열리고, 피범벅이 된 동료들이 나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닷물로 몸을 씻는다. 뒤처리는 그때그때 바뀌는 시체 담당과 청소 담당이 맡았다.

그게 요 며칠 간 이 섬에서 벌어진 일상이었다.

‘에이씨 근데 언제 청소 끝내지?’

수백 명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는 큼직한 항구 창고는 그 혼자서 처리하긴 너무 버거웠다. 다른 녀석들은 언제 이 큰 데를 시간 맞춰 청소했대?

이곳에서 죽어나간 이들은 워낙 많아 아무리 창문을 열어 짠내 가득한 바닷바람을 한 바가지 붓는다 해도 피비린내조차 가시질 않았다. 켜켜이 쌓인 절망과 죽음의 향은 죽었다 살아난 로보의 신경을 긁어대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대선장님은 여기가 좋으신 모양이던데. 으으 역시 범상치 않은 분이야.

물경 천이 훌쩍 넘는 해적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고 소년에게 영혼을 헌납했다. 죽인 뒤 영혼이 날아가지 않도록 소년이 이 창고에 마법처리를 해 두었는데, 그 마법은 산 자가 죽으면서 남긴 사념마저 모아 유령들조차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 음산함은 소년에겐 곧 향기. 소년은 이곳에서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며 그 향을 만끽하곤 했다.

아무리 죽음의 공포가 없어졌다 한들 유령들은 본디 살아있던 인간. 유령선원들은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간 곳에서 숨을 들이키며 그 향을 음미하는 게 분명한 대선장의 모습을 보면서 한층 더 두려움에 떨곤 했다.

‘으으 무서워. 얼른 청소나 하자.’

유령이면서도 한기를 느껴가며, 로브는 부지런히 물동이를 나르고 바닥과 벽을 닦았다.

***

‘좀 살만 하겠네.’

좀 전에 창고에서 향기를 잔뜩 맡고 온 소년은 마을 한쪽에 쌓인 짐더미 틈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앉아 있었다.

식재료가 다채롭지 않아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없는 섬 생활에서는 그런 향이라도 맡아야 좀 버틸만했다. 해산물과 생선 종류는 많지만 그걸로 경험할 수 있는 맛은 한계가 있었다. 가뜩이나 유로파에 전쟁이 터져 향신료 수급도 어려워진 판에.

보르도에 방문한 이후 높아진 소년의 혀다. 바다 생활에서는 도저히 혀를 기쁘게 할 음식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맛이 있건 없건 ‘독특하거나 새로운 맛’(맛이 최악일지라도)은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소년은 맛있는 것을 원했다.

보르도에서 맛보았던 식재료와 소스의 환상의 조합! 미각과 뇌를 자극하는 그 쾌감! 소년의 혀는 다시 그 맛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시위가 벌어진 지도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고, 소년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만일 빠른 시간 내에 귀족이 되지 못해 맛있는 음식을 먹을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면 눈이 한 바퀴 돌아갈 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들이 죽고 되살아난 향기로 식욕을 간신히 억누르기 직전, 충성맹세를 한 해적들의 목을 손수 벤 것을 떠올리며 소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몇 명째더라......’

소년에겐 그 기사 서임이라는 ‘의식’은 생명의 고귀함이나 도덕성을 논할 가치가 없는, 그저 숫자놀음일 뿐이었다.

쓸만한 놈만 추리고 나머진 죽인다.

‘귀족적이지’ 않은 행동이긴 하지만 어차피 아무도 보는 이도 없으니 소년은 거리낄 게 없었다. 디야브처럼 자신의 가슴을 울리는 고귀한 의지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생명의 위협과 대선장을 따라 얻을 이익에 눈이 먼 놈들에게 줄 것은 영원한 속박 뿐.

“오늘 올 애들 또 있어?”

“오늘은 이제 없습니다.”

브란트의 대답에 소년이 구멍 속에 숨은 쥐처럼 볼품없어 보이는 자세를 풀고 짐 상자 틈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조금 높아지자 얕은 둔덕 너머로 테르세이라의 번화한 해적 마을이 보였다.

그런데 소년이 이 섬에 도착하기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그 대신 탁 트인 넓디넓은 공터가 생겨난 것이다.

그 공터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질러!”

“창!”

“쏴라!”

“돌격!”

명령과 대답, 함성과 쇳소리. 영락없는 군사훈련의 현장이었다.

서로가 치열하게 싸우고, 총질하고, 구르며 실전기술을 익힌다. 죽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안 죽으니까. 죽어가면서도 성장하는 시체들이 연병장에서 치열하게 뒹굴고 있었다.

그들을 훈련시키는 교관들은 두 기사에게서 구르면서 강해진 전직 해적선장이자 현 소년의 기함 직속 선원들이었다.

저 중에는 수병 출신도 여럿 있었다.

수병과 민간 선원 및 해적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다. 전투 뒤 선원 수가 많이 줄었다 싶으면 승자 측이 잡은 포로를 그대로 아군으로 써먹는 것이다. 때문에 해적 중에 해군으로 복무했거나 그 반대인 이들을 보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소년은 해군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이들을 모아 훈련 교육 과정을 만들도록 시켰다. 장교 출신이 없어서 뭔가 조금 빠지긴 했지만 그런 면은 귀족 출신인 두 기사가 보완하여 문제는 없었다.

소년은 열심히 훈련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표정은 변화가 없었으나 속으로는 매우 흡족해했다.

저 수백 명 모두가 소년의 ‘기사 서임’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막 받은 게 아니었다. 저들은 해적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뛰어난 이들이었다.

뽑는 방식은 간단했다.

소년은 대선장의 밑으로 들어가면 실력에 따라 직급이 재배치될 거라고 알리고 테르세이라에 충성 맹세를 하러 온 해적단을 상대로 투표 및 대결을 종용하여 해적단 내에서 인재를 뽑아냈다.

그 덕에 구성원들에게 인정될 정도로 뛰어난 이는 물론이요,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를 거머쥔 숨겨진 실력자도 족족 뽑을 수 있었다.

비단 싸움 실력만으로만 고른 것도 아니었다.

사격 실력, 해도 읽기, 지식의 풍부함, 전략전술 역시 선발 대상이었다. 해군 복무 경험 역시 그에 포함되었다.

실력이 인정되면 ‘모두가 바라는 것’을 듬뿍 준다는 말에 너도나도 혹하여 인재선발에 자원했다. 해적들에겐 그 ‘모두가 바라는 것’을 돈이나 그런 걸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들에게 주어진 상금은 영생이었다.

자유가 사라진 영생 말이다.

돈과 권력을 찾아 모아든 해적들에게 주어진 것은 지인도, 가족도 더 이상 만나볼 수 없고 영원히 영혼의 실이 매인 주인을 따라야 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이미 영혼이 쪼개진 그들에게는 불만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생명체라면 필수인 요소들을 잃고, 대신 영혼을 가진 소년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죽기 전 탐욕으로 유명했던 해적선장이 가지고 있던 모든 보물을 뺏겼음에도 ‘아유 괜찮어!’할 정도였다.

그렇게 뽑은 인재들을 제외하고 소년은 모조리 죽였다. 잔챙이들은 영혼을 취하여 자신의 허기를 달래고 질 낮은 유령으로 재탄생시킬 자갈로 만들었다.

소년이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게 된 까닭은, 바로 니아트리브와의 해전에서 겪은 경험 때문이었다.

‘많아봤자 소용없다.’

오합지졸들을 엮어 만든 수백 척의 해적 대선단은 니아트리브의 함대에게 대차게 깨졌다.

아무리 물마법사가 있었고 아무리 체급 차가 있어도 모두가 동시에 달려들었다면 니아트리브 함대에게 더 깊은 상처는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조종한 시체 선박과 시체 선장이 있는 해적단 말고는 제대로 돌격하는 이가 몇 없었고, 군중심리에 의해 멀리서 지레 겁먹고 버벅이기 바빴다.

마법사도 대비해야 했다. 그들은 일반적인 시체나 유령만 왕창 늘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니까.

그래서 소년은 우선적으로 병력의 질을 높이기로 했다.

정예 병력이라면 아무리 강대한 적이 상대라 한들 생채기라도 입힐 수 있을 것이고, 그 생채기가 수백 수천 개가 된다면 그 어떤 것도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또한 이는 소년의 생존욕구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사령술사란 것을 숨기고는 있지만 언제 저번처럼 발각될지 모른다. 때문에 그때를 대비하여 최대한 강한 정예 수하를 만들려는 것. 소년의 세가 강하면 강할수록 소년의 정체가 들켰어도 칼 대신 손을 내미려 하리라.

“소문이 돌면서 점점 찾아오는 해적들이 줄고 있습니다.”

브란트가 보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테르세이라 섬의 대선장에게 향한 이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상관없어. 어느 정도는 충당했다고 봐. 어떻게 생각해?”

소년이 저 멀리 훈련을 하는 ‘군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까지 모은 병력도 꽤나 건실하긴 하지요. 하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아직 몸 안 썩은 애들한테 나가서 소문 좀 퍼뜨리라고 해. 테르세이라가 엄청나게 살기 좋아서 밖으로 나오기 싫어서 그렇다고 말이야. 대선장은 보물이 하도 많아서 대선장 밑으로 들어가면 해적질을 안 해도 섬에서 편히 살 수 있다고 바람도 넣고.”

누가 봐도 과장된 소문이다.

하지만 허영심 또는 자신감에 찬 해적들은 얼마든지 유혹할 수 있는 문구다.

그런 녀석들 중에 인재가 얼마나 있을진 알 수 없지만, 모래 속에 숨은 진주가 아예 없진 않으리라. 호기심으로 온 놈들도 당연히 있겠고.

“아무도 살아서 나갈 순 없겠지만 말이야.”

소년은 고개를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섬 전체가 불길한 회색빛 안개로 감싸져 있었다. 그 안개의 한쪽이 스르륵 열리고, 그의 부하가 될지 식사가 될지 알 수 없을 배 한 척이 덜덜 떨며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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