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아소르스의 마법사왕-6
“으으......”
늙은 몸뚱이가 신음을 흘렸다. 흐릿한 정신이 점차 맑아지며 바윗돌을 매달아 놓은 듯한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눈앞에 보인 것은 그저 처참한 광경이었다.
사방에 쓰러진 시신들은 모두 디야브의 부하들이었다. 소금기를 먹어 검게 변한 갑판은 피를 머금어 검붉은빛을 띠었다. 공기 중의 피비린내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시금 깨우치는 종 역할을 했다.
몸에 힘은 한줌도 없지만 그는 똑바로 서 있었다. 팔과 배에 느껴지는 거친 밧줄의 느낌과 등으로부터 단단하고 휘어진 목재 느낌이 전해져 왔다.
“정신이 드나.”
철컹거리며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디야브의 시야를 침범했다.
“......”
“말할 줄 아나? 니아트리브? 에크나르프? 카스테냐?”
“카, 카스테냐 어는...... 할 줄 알지.”
깊숙이 숨을 들어마시고 내뱉은 쩍쩍 갈라진 목소리에는 아직까지도 남은 자존심이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러자 또 다른 인물이 디야브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디야브를 패배시킨 장본인, 소년이었다.
이제 보니 정말로 작고 볼품없는 아이였다.
열다섯살 쯤 먹었을까? 잘 먹고 크지 못했다는 걸 자랑하듯 체구는 너무나도 작았다. 복장 역시 아무렇게나 입은 선원 복장이었고 단이 너무 커 대충 잘라낸 흔적도 엿보였다.
대선장이니 뭐니 하는 놈의 제자라. 대선장은 필시 대마법사였으리라. 한낱 제자가 이 정도의 강함이라니. 하긴, 그러니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를 상대로 싸웠겠지.
“흐흐흐, 원하는 게 뭐냐 꼬마야.”
이런 꼬마에게 졌다는 자조를 담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충성맹세를 하고 내 부하가 돼라.”
그 말에 디야브의 처량하고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사막의 늑대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그 끝은 거절이었다.
잔뜩 충혈된 눈이 하얗게 색이 바래버린 머리칼 사이로 소년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은 짐승의 눈이었다.
검고 차가운 심연과도 같은 소년의 눈에 짐승의 눈을 가진 이가 움찔했지만, 그래도 시선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저 눈을 마주하지 말라고 몸이 저절로 경고하여 자꾸 시선이 어긋났지만, 그럼에도 억지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해적이 뭔가. 악과 깡으로, 주먹과 칼로 사는 이들이다.
마법사는 그 본연의 기질이 어떻든 자신의 마법에 대한 자부심이 더해져 어느 정도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사막의 문화는 드세고 자존심이 강한 이들을 길러낸다.
해적이자 마법사이고 사막 출신이기까지 한 디야브는 그 자존심을 절대 꺾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가 설령 죽음이라 해도.
그 강단에 소년의 눈이 살짝 변했다. 예전에 한 번 보았던 누군가의 눈빛이 디야브에게서 보인 것이다.
소년은 브란트의 허리춤의 검을 뽑아 디야브의 목에 갖다 대었다. 유령의 일부라 무기에서 발하는 서늘한 한기가 디야브의 목을 따갑게 만들었다.
“이래도?”
“죽일 테면, 죽여라. 꼬마야.”
오히려 디야브는 킬킬 웃으며 고개를 살짝 들어 경동맥을 내보였다.
“내 스승인 대선장이 누구인지는 알 텐데.”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에게 깨진 사령술사 말이냐. 그래, 너도 사령술을 배웠다는 거겠지? 흐흐흐흐, 저 유령들처럼 날 되살리겠단 말이더냐?”
“잘 아네.”
디야브가 또다시 웃었다. 말라버린 강바닥을 쇠붙이로 긁는 듯한 그 웃음엔 승자의 의기양양함이 어려 있었다.
“되살릴 테면 되살려라. 하지만 하나는 기억하도록. 나는 네놈에게 굴복하지 않았단 걸.”
“......!”
“되살아나 네놈을 섬긴다 한들, 그건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니다. 크흐흐흐.”
아. 그래.
소년은 저 눈빛을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해냈다.
-마법사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단다.
린던의 빈민가에서 자폭한 고위 마법사.
소년의 지배를 이겨내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여 자신의 의지를 마지막까지 관철한 인물. 소년의 가치관 형성에도 기여한 그 이름 모를 마법사와, 디야브의 눈빛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죽여라. 죽여서 살리건 말건 네 마음대로 해라. 나를 되살린다 해도 그 시체와 나는 엄연히 다른 존재. 나는 사령술사의 개로 사는 대신 사람으로 죽을 것이다. 그 사실만큼은 영원히 남을 것이야.”
디야브의 눈빛은 굳건한 성과 같았다. 자포자기하여 나오는 단순한 발악이 아니었다. 상대방을 모욕하기 위한 질 낮은 발언도 아니었다.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소년은 이 고집 센 중년 사내에게서 한 발 자국 떨어졌다.
그래. 알았다. 네 의지를 존중하겠다.
“소원이라면.”
서걱
소년은 시간 끌지 않고 단번에 디야브의 요구를 이루어주었다. 그것이 이 해적에 대한 존중이기에.
둥근 머리통이 갑판 위를 굴렀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며 부하들의 피로 범벅된 갑판을 새로 덧칠했다.
소년은 디야브의 머리를 조용히 응시했다.
부릅뜬 채 의지를 품은 눈이 감기지 않은 채 여전히 소년을 직시하고 있었다.
잘린 디야브의 머리에서부터 희끄무레한 영혼이 튀어나와 하늘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다른 영혼들처럼, 디야브의 영혼에서도 조그만 비명이 새어나왔다. 뭐가 그리 고통스러운 걸까. 죽은 게 억울하기라도 한 걸까?
소년은 그 영혼을 잡지 않았다. 세상의 순리대로, 신의 심판대로 가라고 자유롭게 놔주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소년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자에 대한 오묘한 동질감 때문일까?
“......”
소년은 한동안 푸른 하늘을 가르고 스르륵 이동하는 영혼을 쳐다보았다.
세상 밖의 지식을 배우지 않았다면 자신은 과연 저 영혼을 어떻게 했을까? 분명 코웃음치며 입에 쑤셔넣었겠지.
‘명예라.’
이게 명예를 지킨다는 걸까? 기사도와 명예에 대해 들어도 잘 이해는 가지 않았는데. 이번 일로 조금은 명예라는 단어를 알 것 같기도 하고.
“......가자.”
소년은 그대로 디야브의 기함을 버려두고 떠났다. 배에 있는 보물도, 디야브의 수하들도 일절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애초에 소년이 디야브의 공격을 순순히 맞이한 것은 물질적인 걸 노리려는 생각이 아니었다.
바다의 진주 호는 다시금 뱃머리를 돌려 끼익거리며 안개 속으로 스르르 사라져갔다. 소년의 배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야브의 기함 주변을 감싸고 있던 안개는 햇살에 조금씩 흩어졌다.
***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며 그 안에 있던 배의 모습이 드러났다. 계속 안개 안으로 들어가도 반대편으로 쏙 빠져나오는 기현상에 그저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늑대 떼의 해적들이 반색했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안개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해적들이 디야브의 기함에 올랐으나,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전투 후의 처참한 결과뿐이었다.
게다가 우두머리는 돛대에 몸이 묶인 채 목이 달아난 모습.
“다, 단장님을 수습해라.”
늑대 떼의 부단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명령했다. 늑대 떼는 우두머리를 잃고 패잔병이 되어 황급히 저 불길한 안개가 도사린 해역에서 도망쳐야 했다.
“본국으로 돌아간다. 단장님의 사망소식을 알려야 한다.”
그들은 술탄국의 사략선단이다. 단장이 먼 타지에서 죽었으니 본국에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지중해로 돌아가기로 했다. 패배한 늑대 무리가 다른 짐승들에게 공격받기 전에.
그 근방을 감시하고 있던 해적들이 사방팔방으로 소식을 나르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아소르스 제도는 떠들썩해졌다.
‘마법사 선장이 있는 악명 높은 늑대 떼를, 대선장의 제자가 패퇴시켰다!’
어느 나라의 배를 얼마나 약탈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유명세가 있는 누군가를 쓰러뜨렸다는 것 역시 명성이다.
술탄국의 늑대 떼에 대한 악명은 아소르스 제도에도 유명했기에 해적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유로파 해적과 경쟁 관계에 있던 이슬람 해적이었기에 파급은 더 컸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마법사가 있는 해적을 이겼으니 마법사는 확실하겠군.’
‘지금이라도 붙어야 하나?’
하지만 아소르스에는 아직도 많은 야심가들이 존재하는 상황. 해적들의 합류는 미적지근했다.
해적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소년의 행보는 늑대 떼 하나로 멈추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배는 역시 자신보다 많은 배를 가진 해적단을 상대로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다.
모두 소년의 지배를 거부하는 이들이었다.
선제공격하는 이들도 있었고, 소년이 직접 쳐들어간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의 최후는 모두 동일했다.
소년은 그들 모두를 사령술 없이, 안개 없이, 단 한 척만을 대동하여 순수한 마법실력과 포격전만으로 일일이 분쇄하는 신화 같은 업적을 거두었다.
보란 듯이 마법을 뻥뻥 쏴댄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사령술사란 것이 알려지기 전까지 해전으로만 적을 부수고 다녔던 전대 대선장과는 달리, 대선장의 제자는 대놓고 ‘나 엄청 센 마법사요’하고 광고를 하고 다녔다.
가벼운 손짓에 강력한 마법을 선보이며 배를 쓸어버리는 대선장의 제자의 모습은 해적들에겐 경의를, 정적에겐 공포로 군림하여, 소년에 대한 소문은 어느덧 ‘니아트리브의 물마법사보다도 무섭더라!’하는 수준으로 뻥튀기되었다.
부풀어 오른 소문은 하여금 소년을 부르는 명칭에 다변화를 불러왔다.
대선장, 번개의 마법사, 불과 번개의 지배자, 마법사 선장 등......
소문을 퍼뜨리라고 일부러 살려둔 생존자들을 통해 소년에 대한 명성은 점점 퍼져갔고, 별명도 점점 거창해져갔다.
결국엔 ‘마법사왕’이라는 거창한 칭호로까지 발전했다. 아예 대선장이라는 명칭의 비중이 줄어들 정도였다. 대선장(Grand captain)이란 것도 한 해적이 그렇게 불렀다가 어감이 좋아 우연히 퍼진 것이라 대선장보다도 더 거창해 보이는 마법사왕(Wizard king)이란 명칭은 그 자리를 쉽게 대체했다.
니아트리브 해군이 물마법사 엘리자에게 바다의 여제라는 낯뜨거운 별명을 붙인 것처럼, 바닷사람들은 두려운 존재에게 높은 별명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 대서양 중앙 해역을 ‘배를 집어삼키는 망령의 무덤’이라 온갖 수식어를 붙인다던가, 희망봉 주변을 가로막고 있는 폭풍우 해역을 ‘악마의 농간이 불러온 파도의 목넘김’ 등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좋은 사례였다.
대상을 두려워하면서도 칭송함과 동시에, 그 대상 앞에서는 도망가도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심리적인 자기합리화를 위해서였다.
승리의 추가 하나씩 대선장의 제자라는 저울접시 위에 올려지고, 아소르스 제도는 새로운 대선장이자 마법사왕이라는 그림자에 덮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죽느냐, 수그리냐. 돈과 목숨이 가장 중요한 해적들에겐 수그린다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자존심을 선택한 해적들은 다 소년에게 죽어나갔으니까.
“너도냐?”
“어. 충성맹세 하러 간다. 시체 일으키는 건 없었다니까 적어도 죽여서 되살리지는 않겠지.”
소년이 사령술을 쓰지 않은 것 역시 도움이 되었다.
사령술사란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자제한 것뿐인데, 그것이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 공포에 꺼림칙함을 느끼던 일부 해적들을 도리어 안심시킨 것이다.
여러 해적들이 대세를 따라 너도나도 몰려들어 충성맹세를 하러 테르세이라 섬으로 몰려들었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대선장의 제자, 아니 아소르스 제도의 두 번째 대선장이며 해적들이 마법사왕이라 칭송하며 두려워하는 이는 그들 모두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대선장이 있는 테르세이라 섬에 입항한 해적들이 도무지 섬 밖으로 도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단 것이었다.
***
“네가 내게 귀의하도록 만드는 원인은 네 본인의 의사가 분명하렷다?”
“그, 그렇습니다 마법사왕이시여!”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대답하는 해적선장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주변에 유수한 해적단의 선장들이 시립해 압박하는 분위기에, 이 공간 안의 싸늘한 한기가 뼛속까지 침투하고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도 모자라, 로브를 뒤집어쓴 대선장의 후드 그림자 밑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쇠를 긁는 소리와 그르렁대는 짐승의 소리를 반반 섞은 듯한 그 목소리는 거친 뱃사람이라 할지라도 단번에 찍어 누르는 힘이 있었다.
의자에 푹 몸을 묻어 체구를 가늠할 수 없는 대선장이 재차 말했다.
“대선장이라 불러라. 너희들은? 마찬가지인가?”
바로 앞의 해적선장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날아든 질문.
현재 대선장 앞에는 한 해적단의 일부 선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선장뿐 아니라 한 해적단 내에서 실력이 가장 좋은 싸움꾼, 머스킷 사수, 포수, 조타수 등이었다.
“그렇습니다!”
“예!”
그들이 대답하자, 대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대선장이 행한 행동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서걱
뼈와 살이 잘리는 소리는 너무나 짧고 간결했다.
턱 하고 해적선장의 머리가 한낱 양동이처럼 바닥을 나뒹굴며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갑작스런 상황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해적들이 충격에 몸이 굳었을 때, 대선장은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칼을 휘둘렀다.
칼을 뽑아들 시간도 없이 몇 명의 목이 잘려나갔고,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한 나머지 해적들이 일어나 무기를 뽑았으나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대선장의 놀라운 검 솜씨에 심장이 찔리고 목이 잘려나갔다.
원래는 평범한 회의실이었던 공간에 피비린내가 한층 짙어졌다.
[일어나라. 내게 영원한 충성을 서약한 이들이여. 일어나 네 쓰임새에 따라 소임을 다하거라.]
창문이 모두 닫힌 이곳에서 별안간 음산한 바람이 한 바퀴 시체들을 휘돌고 사라졌다.
“......”
그러자 시체들이 스르륵 일어나더니 눈을 떴다.
“대선장님을 뵙습니다.”
그러고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예를 차렸다.
“자, 이쪽으로 와.”
윌리엄이 씩 웃으면서 신입들을 옆방으로 데려갔다. 소년이 후드를 벗고 회색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동시에 대선장 행세를 끝내며 명령했다.
“나머진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