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79화 (80/128)

79화

아소르스의 마법사왕-5

선원들의 비명과 경악 어린 외침은 듣기만 해도 털이 곤두서는 귀신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집어삼켰다. 산 자를 질투하듯, 죽은 이들이 선원들을 조롱하면서 갖고 놀다가 차근차근 생명을 앗아갔다.

그 가운데에서 기사와 마말리크라는, 두 문명권을 대표하는 전력이 서로 검격을 주고받았다.

그런 난장판이 된 갑판과 다소 떨어진 선수.

그곳에서는 갑판 상황은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치열한 마법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붉은 전격과 푸른 불꽃이 상대를 가격하기 위해 공기를 갈랐다.

공기를 찢으며 소름 돋는 소리를 내뱉는 번개가 자욱한 연기를 내뿜고, 정반대로 연기라고는 한줌도 없는 기묘한 불꽃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텅 빈 공간을 점유했다.

마법끼리의 충돌이 일어나고, 몇 번의 눈부심 이후 각자의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서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디야브의 눈에는 긴장이 멍울졌다.

‘저런 꼬마가 이 정도의 마법을 사용하다니.’

앳된 외모와 전혀 다른 힘에 디야브가 몸 안의 마력을 더욱 힘껏 뽑아냈다.

전격이라? 원소 계열 마법이면 발칸반도 아니면 니아트리브일 텐데. 위치로 따지면 니아트리브 출신인가?

‘원소 마법을 쓴다면 내게 승산이 있다. 하지만 원소 마법 계열 마법사라면 이 안개는 원소 마법을 응용해 만든 거고, 어쩌면 선천 마력을 따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법사 간의 싸움은 긴장의 연속이다. 상대방의 공격이 선천 마력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학파의 마법만 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선천 마력에서 기인한 마법을 쓸 수도 있었으니까. 비장의 마법을 숨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나이에 비해 강한 힘을 지닌 소년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마법사......’

이 마법사는 얼마나 강한 것일까? 숨기고 있는 힘이 있을까? 저 마법은 선천 마력일까 학파의 마법일까? 이상한 장신구를 가지고 있을까? 혹 내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수단이 있을 수도 있을까?

여러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소년은 굳은 표정으로 적당히 약한 전격을 쏘아냈다. 마법사에게 두 번이나 패배를 당한 경험은 아직도 소년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신중을 넘어 답답할 정도였다.

소년은 상대편 마법사와 일 대 일로 싸우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린던 빈민가에서는 마법 함정과 시체만 멀리서 조종했고, 물마법사 엘리자와의 싸움에서는 마법 교환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역시 대부분 시체와 저주가 싸움을 대신한 데다, 죽은 척 하려는 소년의 목적과 대규모의 마법이 흐름을 도중에 끊어 제대로 된 마법사 간의 싸움은 아니었다.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며 싸우는 마법 대결은 소년에게 미지에 대한 긴장을 주기 충분했다. 디야브에 대해 소년이 알고 있는 것은 없었으니.

오랜 기간 동안 마법을 단련한 것을 자랑하듯, 디야브의 공수는 능수능란했다. 아무리 약하게 쐈다고는 하지만 소년의 번개를 능숙하게 막거나 빗겨내고, 소년이 떠 있는 허공을 향해 푸른 불을 쉴 새 없이 쏘아댔다.

이리저리 휘청이며 허공을 유영하면서 총알같이 작은 불꽃을 가까스로 피하는 소년의 모습에 디야브는 내색하지는 않아도 의기양양했다. 누가 봐도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도망가는 데 바빠 보이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상황은 정반대였다.

그는 알까?

강하게 느껴지는 이 마법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굴복시키기 위해서 소년이 적당히 봐주고 있는 공격이라는 걸.

그렇게 지지부진한 간보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소년의 공격이 드세졌다. 맥없이 한 줄기의 번개가 픽픽 꽂히는 방식이던 소년의 전격 마법이 갑자기 증폭되었다. 소년이 볼 건 다 봤다는 의미였다.

소년의 외팔에서 핏빛의 번개 구체가 생겨나나 싶더니, 그대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디야브와 그 주변을 직격했다.

갑판이 번개 줄기에 부서지며 파편을 튀기고, 번개의 열기는 나무 표면에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그을음을 만들어냈다. 여러 방향에서 날아오는 빛줄기에 디야브는 몸을 감싸는 푸른 불의 장막을 만들어 고스란히 공격을 받아내야 했다.

“커윽!”

전격이 불의 장막에 적중하는 순간 디야브가 급히 만들어낸 장막의 대부분이 흩어지며 그의 내면을 흔들었다. 그는 몸이 마비되는 느낌과 함께 안에서 무언가 욱하고 올라오려는 토기를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말도 안 돼!’

그의 눈동자가 진자처럼 흔들렸다.

고작 한 번의 공격 만에?

디야브의 장기는 바로 이 푸른 도깨비불이었다. 이것은 그의 선천 마력으로, 불의 형상을 띠고는 있지만 원소 계열 마법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불이되 불이 아닌 모순되는 성질이라 원소 계열 마법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가졌다. 소년이 원소 마법을 쓰는 걸 보고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니아트리브 말고도 유로파 각지에서는 원소 계열 마법이 유행하는 편이었다. 왜냐면 익히기 쉽고, 속성이라는 직관적인 구분법으로 이해도 쉬웠으며, 같은 속성의 마력은 남에게 전수할 수도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특히 사원소설의 발상지인 발칸 반도에서도 니아트리브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원소 계열 마법이 발달해 있었다.

그 상성을 이용해 지금까지 발칸 반도의 원소 마법사들을 물리치고 약탈을 해왔던 디야브다.

그런데 그 믿고 있었던 도깨비불의 힘이 이번에 부정당해 버렸다.

‘이, 이건......’

이런 경우는 두 가지다.

이 전격이 디야브의 경우처럼 전격의 형상만 가져온 다른 마법이거나, 아니면 저 꼬맹이의 힘이 너무나 강해 상성이고 뭐고 다 뚫어버릴 정도란 것이다.

하지만 온몸이 저릿저릿한 이 느낌은 도저히 저게 전격 마법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인정할 수 없다.’

디야브는 무려 이십 년간을 바다 위에서 살며 마법을 수련해 왔다. 비록 정식 학파의 마법은 혀끝만 맛본 정도고 스스로 깨우친 거라 정식 마법사에 비해 다소 실력은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법을 수련하고 살아온 세월이 있다.

저런 꼬마 따위의 힘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디야브가 마법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면, 소년이 공중에 계속 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디야브는 마법사 목록에 형식상으로 이름만 올려뒀지 연맹에서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해적이니까.

속이 진탕되어 잠시 무방비 상태인 디야브를 죽일 수 있는 기회인데도, 소년은 마법을 날리는 대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유령선원들에게 디야브의 선원들이 도륙당하고 있는 상황과는 정반대로, 그것은 참으로 평화롭게도 팔랑팔랑 날아와 디야브의 앞에 떨어졌다.

흰 천조각이었다.

디야브는 갑판 위에 떨어진 천조각을 보고는 소년을 보았다. 소년이 예의 그 이질적인 미소를 지었다. 웃음의 의미는 명백했다.

‘항복해라.’

흰 천조각이 담고 있는 의미는 항복. 소년은 항복권유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곧 마법사를 수하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란 생각에 별 생각 없이 웃은 거지만, 소년의 웃음은 눈은 변함없이 입만 움직이는 기괴한 미소다. 이는 디야브에게는 영락없이 조롱이 곁들여진 권유로만 보였다.

“감히!”

마법사이자 해적단 하나를 이끄는 수장의 자존심에 쩍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는 침착함을 바탕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하지만, 해적인 디야브와는 다소 먼 얘기였다.

이렇게까지 굴욕을 겪은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선천 마력으로 해적을 그러모아 우두머리가 되고 술탄국의 사략함대로 편입되며 상승가도만 달려오던 그에게 작전상 후퇴는 있었어도 이러한 굴욕은 처음이었다.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으니, 마음의 평정심은 쉽사리 무너질 수밖에.

일순간의 분노는 마력을 만들어냈다. 외부의 자연적인 마력을 끌어 모으는 것보다 손쉽고 빠르게 마력이 차올랐다. 그 대가는 마법사 본인의 생명력으로, 한 번 사용하면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방식이었다.

‘저런 방식도 있나?’

소년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깎아가면서 마력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을 느끼고 흥미로워했다. 저건 무슨 마법일까?

“죽어라!”

폭주의 영향에 디야브의 펑퍼짐한 이슬람권의 흰 옷이 펄럭였다.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나 한층 더 늙어 보이게 된 디야브가 지금껏 썼던 것보다 강력한 마법을 날렸다. 소년의 조그만 몸은 물론이고 배의 절반을 한 입에 삼켜버릴 만한 커다란 늑대 형상의 푸른 불꽃이 입을 쩍하니 벌렸다.

하지만 소년은 당황하지 않았다.

빈민가에서 폭력배들이 문신을 새기고 흉터를 만들고 근육을 부풀리곤 하는 걸 많이 보아 왔다. 그 자신의 성격이나 경력은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을 한층 더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하는 것이다.

디야브의 이 마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엔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소년은 이게 별것 아니라는 걸 안다. 저 마법에 실린 힘은 소년의 기준에서는 별것 아니었다.

불에는 불로.

소년은 지금껏 사용한 전격 대신 머리만한 크기의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악마의 힘이 반영되어 검붉은 핏빛의 불덩이였다.

던지는 동작 하나 없이 불덩이는 스르륵 허공을 유영하여 쩍 벌린 불꽃늑대를 향해 날아갔다. 소년을 한 입에 삼킬 수준의 거대한 푸른 불꽃에 비하면 고작 머리통 크기의 붉은 불덩이는 순식간에 푸른 불꽃의 아가리의 안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 직후. 굉음과 함께 커다란 충격파가 사방으로 불어 닥쳤다.

디야브의 불꽃 늑대 머리가 순식간에 흩어지며 대신 붉은 화염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모습은 마치 푸른 늑대 머리를 찢고 붉은 성게가 뾰족하게 가시를 세운 것만 같았다.

디야브의 불꽃은 일반적인 불처럼 불태우는 게 아니라 소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마력의 충돌은 순전히 소년의 조그만 불덩이가 폭발하며 일으킨 변화라는 말이었다.

소년의 불덩이는 디야브가 힘을 짜내가며 만든, 커다란 배의 절반 정도를 그대로 날려버릴 무시무시한 마법을 간단히 흩어버렸다.

“커억!”

폭발에 공기가 밀려나며 거센 바람이 주위를 휩쓸었다. 소년은 마법으로 바람을 막아 제자리를 유지했으나 모든 힘을 쥐어짜낸 디야브의 늙고 지친 몸뚱이는 볼품없이 바닥을 굴러야 했다.

다소 디야브의 기함 쪽으로 폭발이 치우쳐진 상황이라 작은 돛대 몇 개가 우둑 꺾이며 그 큰 전열함이 흔들렸다.

그것으로 전투는 끝이 났다.

디야브의 선원들은 진작 소년의 선원들에게 모두 결딴나 있었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마말리크 하무크 역시 충격파에 의해 나동그라지고 브란트의 검에 운명을 달리했다.

사람들은 운이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살다가 어쩌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사고가 자주 겹치는 경우다.

다만 디야브에게는 다소 억울했다.

그는 싸우기 전에 상대를 과소평가하지도 않았고 정보수집에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조잡한 정보라도 최대한 그러모아 현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끌어내 싸움에 임했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디야브의 예상을, 아니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위험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새싹 밑에 거목이나 가질 법한 굵은 뿌리가 있다고 상상할 수 없듯, 디야브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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