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아소르스의 마법사왕-4
시야를 제한한다는 것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모든 생명체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오랜 옛날부터 먹고 먹히며 맹수와 괴물들의 습격을 걱정하던 그들의 조상의 의식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때문에 사방을 제대로 살필 수 없게 된 디야브의 기함의 선원들은 태고에서부터 내려오는 본능적인 두려움과 싸우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사방을 경계하던 노력이 무상하게도, 습격은 순식간에 시작되었다.
“적이다!”
뿌연 물속 같은 안개 속에서 배 그림자가 잠깐 생기나 싶더니, 굉음과 함께 배 전체가 들썩였다. 디야브의 기함보다 작은 갤리온이 나타나 쿵하고 옆구리를 들이받은 것이다.
여러 대의 배에 많은 식구를 데리고 다니다보니, 디야브의 기함은 물자를 많이 실을 수밖에 없어 흘수선이 다소 높았다. 그에 반해 식량이나 물을 싣고 다닐 필요가 없는 소년의 배는 흘수선이 낮았다.
하지만 전열함급과 전열함급이 아닌 배 사이의 체급 차이는 어쩔 수 없어 여전히 디야브의 기함이 2야드 정도 살짝 더 높았다.
쾅하고 두 배가 부딪히는 충격에도 굳건히 선미루에 선 소년이 키 앞에서 명령했다.
“얘들아. 다 죽여라. 선장 빼고.”
조그맣고 나직했지만 소년에게 영혼이 귀속된 이들은 귓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분명히 들렸다.
“가자!”
“이얏호우!”
자신의 영혼을 소지하고 있는 절대자의 명령에 창백한 안색의 해적선장, 아니 선원들이 붉은 안광을 번득이면서 갑판을 박찼다. 선수에서 칼을 뽑아들고 있던 브란트를 선두로 죽은 자들이 산 자의 배에 발을 디뎠다.
“공격!”
검은 갑옷의 기사, 브란트는 어지간한 사람보다도 큰 높이를 가볍게 뛰어올랐다. 생전에도 3야드 정도는 가뿐히 발돋움으로 뛰어오를 수 있었던 그에겐 별것 아닌 높이였다.
‘주군께서 주신 힘 때문인가, 아니면 산 자가 아니라 그런 건가. 생전보다도 가뿐하군.’
생전과 많이 달라진 신체능력을 만끽하며 브란트는 권총을 몸으로 받아내며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권총알 따위는 주군의 힘으로 강화된 그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튕겨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선원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은 창백했지만, 유령이라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일단 투명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고, 바다의 진주 호에서 디야브의 기함으로 뛰어올라갈 때는 사람이라 볼 수 없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세간에 떠도는 유령의 특징 중 하나처럼, 갑판을 뛰어오르는 순간 무릎 아래 부분이 연기처럼 흩어진 것이다. 선원들은 불붙은 폭죽이 된 것처럼 놀라온 높이로 단번에 전열함의 갑판 위에 안착했다.
브란트와 함께 뛰어오른 선원 일부는 갑판에 발을 디디고서도 여전히 다리 밑을 흩어놓은 채 갑판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산만한 행동을 보였다.
이들은 유령이라는 이점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이들로서, 그 속도를 이용해 적들을 공포와 혼란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일종의 유격대였다.
[으히히히!]
[끼끼끼!]
유격대는 소름끼치는 귀신 웃음소리를 흘리며 사방팔방을 날아다녔다. 갑판을 박차고, 뱃전의 물통을 걷어차 상대방 선원들 사이로 굴리고, 밧줄 위에서 방방 뛰어 밧줄을 흔들거나 돛대와 갑판을 번갈아 왔다갔다하며 정신없게 만들었다.
“유령이다!”
“으아아!”
사막과 황무지를 뒤에 둔 항구에서 태어나 바다를 누비고 살았던 강건한 바다 사나이들이지만, 이런 광경을 보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유령이다!
미리 사령술사에 대한 언질을 들었는데도 겁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막과 그 주변 지역에는 구울이라는 사악한 마귀에 대한 전설이 내려온다.
몸을 단단하게도, 유령처럼도 만들며 하늘을 날아다니고 사악한 마법을 써 사람을 홀리고 잡아먹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도 퍼져 있었다. 유령과 구울은 다른 존재이긴 하나, 어릴 적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이들이다. 구울 엇비슷한 무서운 이야기 속 괴물이 실제로 나타났으니 그에 벌벌 떠는 건 필연적이었다.
정작 유격대는 칼 하나 휘두르지 않고 물건을 던지거나 눈앞에서 빠르게 왔다갔다하여 시선만 잡아채기만 했는데도 말이다.
미지에 대한 공포는 의외로 강해, 평소에 무서울 것 없다고 자랑하던 이조차도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눈만 정신없이 굴리고 있도록 만들었다. 유령은 칼이 통하지 않는다는 상식 역시 한몫했다. 차라리 실체가 있는 시체라면 모를까, 칼을 휘둘러도 소용없는 유령이잖은가!
실제로 목숨을 앗아가는 이는 브란트와 유격대 다음으로 올라온 선원들이었다.
찌르고 베고 쏘고. 권총과 칼로 무장한 소년의 선원들이 디야브의 선원들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였다.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바다 위에서 잘 볼 수 없는 전신 갑옷을 껴입은 검은색 일색의 기사였다.
“으악! 기사다!”
“하무크 님! 도와주십쇼!”
그 말에 칼을 든 이가 앞으로 나섰다.
술탄국에도 기사와 비슷한 위치의 마말리크(mamalik)란 집단이 있다.
기사와는 달리 전신 판금갑옷이 아니라 갑옷으로는 중요 부분만 가리고 대신 속도를 중시한 이들이다. 그들은 유로파의 기사가 대부분 귀족 출신인 것과는 반대로 빈민, 노예, 귀족 등 출신이 다양했다. 때문에 험한 바다에 진출하는 마말리크도 흔했다.
하무크가 그런 경우였다.
유로파로 따지면 방랑기사와 같은 이로, 원래는 근해의 상선 호위로 지냈다가 디야브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부하로 들어간 경우였다.
“이놈! 네 상대는 나다!”
그는 이슬람권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크게 휘어진 칼을 휘둘러 브란트를 막아섰다.
“마말리크구나. 좋다, 한번 검을 겨뤄보자꾸나.”
유로파의 오랜 적수인 이슬람권의 전사와 맞붙을 좋은 기회였다. 투구 너머로 나지막이 대답한 브란트가 유로파의 공격적 검술로 하무크에게 먼저 파고들었다.
전신 갑옷으로 온몸을 두르는 기사를 상대로 발전한 유로파의 검술은 목과 겨드랑이 등의 좁은 급소를 빠르게 노리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슬람의 검술 역시 전장에서의 중장보병을 상대하기 위해 유로파와 비슷하게 급소를 노리는 형식이었지만, 마말리크는 마말리크를 많이 상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화약의 발전으로 갑옷의 필요성이 줄어들며 유로파만큼이나 급소를 중시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대신 무장이 가벼운 만큼 속도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하무크 역시 속도를 중시하는 마말리크답게 그에 뒤지지 않는 속검을 구사하며 브란트의 공격을 받아쳤다.
두 사람이 상대방을 노려보며 본격적으로 대결에 돌입하자, 사방에서 벌어지는 혼란은 저 멀리 멀어지고 서로를 향한 검만 서로의 시야에 들어왔다.
호선을 그리며 상대방의 목과 관절을 찔러오는 브란트의 검과, 휘어진 검날 때문에 좀 더 변칙적으로 상대방의 검로와 팔 사이를 파고드는 하무크의 검이 서로 맞부딪쳤다.
목과 손을 노리는 치명적인 예기를 서로 찌르고 받아친 지 수십 합.
둘의 실력은 일단 비등해 보였다. 무기의 형태와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발전한 두 검법이건만, 마치 대련을 하듯 서로의 검이 정직하게 충돌하며 불똥을 튀겼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기사와 마말리크 같은 마력을 이용하는 싸움꾼이 각광받는 이유는, 마력으로 체력을 보조하며 일반인보다 훨씬 오랫동안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예 체력의 한계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죽은 자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헉, 헉, 헉......”
거친 숨을 내뱉으며 브란트의 지치지 않는 공격에서 겨우 벗어난 하무크. 대체 어떻게 된 놈이길래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떨어진 김에 사방을 눈동자를 굴려 살폈고, 절망적인 상황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맙소사.....!’
갑판 위의 선원들은 이미 전멸 직전이었다. 목을 베어도, 심장을 찔러도 상대방의 선원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저 물안개처럼 창백한 입자가 살짝 휘날리기만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상태로 돌아갔다.
“구경은 다 했나?”
“네, 네놈도 유령이냐?”
광택 나는 검은 갑옷 때문에 브란트는 전혀 유령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런 억울한 말투는 내 몸에 한 번이라도 칼을 찔러보고 얘기하지 그러나? 내가 자네의 목숨을 앗아갈 기회가 많았다는 건 자네도 알 텐데?”
그 말대로 하무크는 브란트에게 그 어떤 공격도 허용시키지 못했다. 그는 브란트의 말을 듣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봐줬구나!’
어쩐지 서로의 검술이 판이하게 다름에도 매 검격을 나눌 때마다 마치 대련하듯 피하지 않고 검으로 일일이 막아준다 싶었는데. 하무크는 이 검은 갑옷의 기사가 자신을 적당히 봐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술 실력은 차치하고서도, 유령과 검을 나눴다는 말은 유령이 적당히 받아줬단 말이었다. 찔러도 죽지 않으니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으로 달려들면 유령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 말이다. 실제로도 유령선원들이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는 방식으로 달려들었기에 뭘 어떻게 하든 디야브의 선원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크으으! 알라는 위대하시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술탄국을 비롯해 지중해 건너편 이슬람권의 이들이 자주 쓰는 말을 기합으로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무크의 돌진은 브란트에게 닿기도 전에 허무하게 사라졌다.
옆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면서 하무크를 저 멀리 튕겨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
안개 속에서 나타난 배가 쿵하고 기함의 옆구리를 들이받자마자, 디야브는 공격을 명령했다.
“침착해라! 놈들은 우리보다 작은 배야!”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령 유격대 선원들이 무섭게 갑판 위로 뛰어올랐다. 스물 정도에 불과한 유령들이 사방팔방 배 위를 날아다니며 시선을 빼앗고 선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어딜!”
디야브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몸 주변에서 피어오른 푸른 귀화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유격대 선원 하나에 명중했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조그만 불꽃은 폭음 하나 없이, 순식간에 큼직한 불꽃으로 덩치를 불려 모래주머니가 공중에서 터져 모래를 흩날리는 형상으로 유령 선원을 집어삼켰다.
그 푸른 불이 사그라들었을 때는 유령 선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다섯 정도의 유령 선원을 불꽃으로 요격했을 때, 디야브에게 붉은 번개 줄기가 날아왔다.
“헛!”
그가 옆으로 몸을 날려 나무바닥 위를 뒹굴었다. 번개줄기는 디야브를 조롱하듯, 그가 있던 곳 바로 옆을 때리고 시커멓게 그을린 자국만을 남겼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디야브의 앞에 소년이 허공을 날아 슥 다가왔다.
“네가 디야브냐?”
“그래. 내가 디야브다.”
에크나르프 어와 이슬람 어. 비록 언어는 달랐지만 디야브라는 단어에서 서로의 말뜻을 유추하기엔 충분했다.
그 둘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마력을 한껏 피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