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아소르스의 마법사왕-3
일 대 다수라고? 무슨 상관이야. 머리만 잘라버리면 그만이지.
말이야 쉽지 실전에서는 실현하기에 전혀 쉽지 않은 방책을 생각하며, 소년은 해적선장들을 쓱 둘러보더니 뒤로 눈을 돌려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오른눈이 등불을 밝힌 것처럼 뒤편을 환하게 밝혔다.
“그나저나 브란트. 얘네들 훈련 잘 됐어?”
검은 갑옷의 기사가 슥 몸을 일으키자 해적선장들이 다 같이 움찔했다. 그들의 수장 격인 윌리엄 역시 질린 표정이었다.
“선장까지 오른 녀석들이니만큼, 꽤 쓸 만하더군요. 다섯 정도가 합세하면 오르네리도 대충 상대할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이기진 못합니다. 견제 정도만 한다 이거지요.”
“그렇게 말하면 어느 정도까지 강한지 잘 실감이 안 나는 걸.”
나름 잘 훈련되었다며 우쭐거리면서 말했건만 소년이 공감하질 못하니 브란트는 멋쩍어 괜히 투구를 긁적였다.
“오르네리 서너 명 정도는 있어야 절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 녀석들이 죄다 달려든다고 절 제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단순히 실력만 보면 그렇단 겁니다. 실전에서는 온갖 변수가 많으니까요. 전 생전에도 저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처리 가능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어도 선장들은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이미 몇 번이고 단체로 달려들어 싹 다 목이 잘린 경험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건 니아트리브 기사 등급 제도 뿐인데. 에크나르프는 어때?”
그 말에 브란트는 등급제는 신뢰할 게 못된다고 했다.
사람마다 실력이 모두 천차만별인데 어떻게 몇 개 안 되는 등급 안에 그들 모두를 쑤셔 넣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등급제로 절대적 실력을 평가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이며, 법으로 정해진 등급이건 사회 내에서 자체적으로 붙여지는 등급이건 주관적인 평가나 비리 등이 끼어들기 때문에 신뢰성은 떨어진다고 한다.
‘로드릭이 한 말이랑 비슷하네.’
빈민가에서 마법사 로드릭도 자신은 5급 마법사지만 마력량으로만 따져서 그 정도지 마법 운용 면에선 형편없어 7급 8급 마법사도 로드릭을 이길 수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마법사 하나를 잡았다는 오만함에 흘려들었지만, 새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쫓기는 신세가 된 이유가 마법사가 별것 아니라 자만했던 것 때문 아닌가.
세상은 넓고 갈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다는 건 깨달은 지금은, 자신의 행동이 적을 만들었고 그 적이 얼마나 많은 길을 막을지 알게 되었으니 후회가 막심했다.
“굳이 따지자면 다섯 등급으로 나뉘어진 에크나르프 기사 등급 제도상 저는 2급이고 오르네리는 3급, 선장들은 5급입니다.”
“으음, 등급이 더 구분하기 힘들긴 하네. 1급은 어느 정도나 돼야 하는 건데?”
“1등급은 검호(Sword master) 칭호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칭호를 받지 못하면 만년 2등급이지요. 미니에 가문에서도 저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기사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모두 저와 같은 2등급이었습니다.”
미니에 가문이 언급되어 그런지 의미 모를 입맛을 다신 브란트가 덧붙였다.
“그래도 이 친구들이 오랜 싸움으로 단련된 사람들이라 기본기는 좋아서 잘만 굴, 훈련한다면 금방 생전의 오르네리 수준은 될 겁니다. 마력 운용은 별개고요.”
브란트의 말을 들은 해적선장들은 안 그래도 유령이 실체화된 터라 혈색이 없는데 더욱 하얘져 눈을 얼굴에 덧바른 것 같이 변했다. 유령이라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지만 계속해서 브란트의 검에 썰려나가는 더러운 기분과 계속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해야 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당연히 기사단 하나 수준은 됩니다. 너희들은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말단 수준이긴 하지만 엄연히 기사의 단계에 접어든 건 맞으니까.”
브란트의 칭찬에 우락부락한 외모의 선장들이 부모에게 칭찬을 들은 아이처럼 머쓱해하면서 헤헤거렸다.
실제로 저들은 일반적인 기사보다 장점이 많았다. 우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어도 대선장께서 되살려 주실 테니까. 그리고 고통도 없고 지치지도 않는다. 이는 부상당할 경우나 장기적인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아. 그러면 훈련했으니 이젠 실전을 치러 봐야지?”
소년의 말에 모두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소년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대하고 있었다.
‘악마를 상대하고 새로 얻은 힘의 응용방식을 써먹을 때다.’
***
“하음, 지루해.”
바다의 진주 호에서 오르네리가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루함과 심심함이 눈에 꽉 들어차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은 오르네리의 어깨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어깨 밑에 있었다.
“......저기 기사님. 목은 제자리에 붙여 주시면 안 됩니까?”
바다의 진주 호의 선장을 맡고 있는 해적 선장이 눈치를 보다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누군 안 붙이고 싶어서 이래!?”
그러자 오르네리가 벌컥 성을 냈다. 벌떡 일어난 오르네리는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척 들고는 목 부위에 갖다 대었다.
“안 붙는다고!”
그러나 목은 붙지 않았다. 소년의 하수인들은 어느 정도의 재생력을 갖고 있음에도.
눈치를 대충 보니까 자신의 주군은 해결해줄 수 있는 거 같긴 한데 별로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킥킥대는 다른 녀석들 사이에서 팔짱끼고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 피우는 걸 보면 분명히 재밌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오르네리의 표정은 완전히 울상이었다. 트롤 스프링밀이 그걸 보고는 크케케 하고 웃었다. 술 취한 늙은이 같은 일그러진 얼굴이 함박웃음을 지으니 여간 약이 오르는 게 아니었다.
“시끄러워! 트롤 자식아!”
“케헤헤헥!”
오르네리는 억울했다.
니아트리브와의 전투에서 목이 베이다 못해 몸이 이리저리 잘려 죽은 해적선장도 있었는데 왜 나만 몸이 안 멀쩡하냔 말이냐!
“분명 마법사 때문인 게 틀림없어!”
오르네리만이 최후를 근접에서 대마법사에게 직접 맞았다. 그래서 오르네리는 자신의 목이 안 붙는 원인을 그 악독한 니아트리브의 여마법사에게서 찾았다.
“으흐흐흑!”
그가 흐느끼자 눈물은 나오지 않지만 대신 귀곡성이 갑판 위를 채웠다.
“기사님, 무섭드아아아.”
“유령이드아아!”
그 소리에 시체 선원들이 자기들도 죽었으면서 무섭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
수면에서 춤추는 파도를 헤치고, 한 선단이 항해하고 있었다.
돛대 위에 달린 깃발에는 늑대가 크게 휘어진 칼을 물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검은색의 돛에도 같은 그림이 마찬가지로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지중해 동부에서 악명을 떨치던 술탄국의 사략선단 ‘늑대 떼’였다.
“섬이 보인다!”
수평선에 빼꼼 머리를 내미는 바다 위의 땅덩이. 테르세이라 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길을 잃기라도 했는지 어디선가 날아온 갈매기 한 마리가 돛대 위에 내려앉았다.
자신의 기함의 선수에 선 디야브가 뒷목을 주무르며 저 멀리 섬을 노려보았다. 초짜 해적시절 다친 목뼈가 시큰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대선장의 제자라는 놈을 어떻게 상대할지 전략이 짜이고 있었다.
‘사령술사의 제자라니 사령술사일 테고, 그러면 절대 붙어선 안 된다.’
마법사 연맹에 제출된 니아트리브 함대가 아소르스 제도에서 겪었던 치열한 전투 기록은 이미 많은 마법사들이 돌려보았다. 사령술사에 대한 정보가 다 사라진 지 오래된 세상이라 사령술사와의 공식적인 싸움기록이라는 것에 호기심에서라도 구해보는 이들이 많았다.
디야브 역시 해적이긴 하나 엄연히 마법사. 바다에서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가 어떻게 싸웠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전투 기록을 열람한 것이 여기서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시간차가 있긴 했지만 싸워서 죽은 시체는 족족 일으켰다 했다. 그것도 아주아주 넓은 범위로. 제자이니 그 정도까지는 못하겠지만 배 하나의 시체를 일제히 일으키는 건 가능하겠지.’
그래서 디야브는 휘하 선원들에게 단단히 주지시켰다. 누가 죽는 즉시 팔다리를 자르고 바다로 내던지라고.
늑대 떼는 천천히 섬을 향해 항해했다. 그런데 멀리에서 봤을 때 희끄무레했던 섬은 가까워져도 그대로였다. 바다 안개가 가득했던 것이다.
“이상한데? 낮인데 왜 이리 안개가 짙어?”
“그러게. 여기는 늘 따뜻한 데인데 웬 안개야?”
선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개는 일교차가 큰 시기거나 인접한 지역 간 온도차에 의해 생긴다. 그런데 이곳은 더운 날이 추운 날보다 많으며 추운 날도 그리 춥지는 않은 남쪽이고 육지와도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안개가 생길 이유가 적다.
섬 때문에 그런가 싶어도 섬과도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 말 그대로 바다 한복판에 난데없이 안개 지대가 생겨난 형태였다.
“모두 멈춰.”
해무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디야브는 선단을 멈춰 세웠다.
‘마법이다.’
마법사는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이면 마법이라는 생각부터 하고 본다. 하물며 어울리지 않는 곳에 생겨난 안개라?
그것도 보통 안개가 아니었다. 희뿌옇거나 눈이 침침해지는 정도에 불과한 걸 넘어 어디선가 산불이라도 난 것 같은 짙은 잿빛. 타고 남은 모닥불의 흰 잿가루를 통째로 허공에 바른 것만 같았다.
보면 볼수록 당장이라도 저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드는 기이한 안개에 디야브가 소리쳤다.
“모두 옆구리 돌려! 포격 준비해!”
단장의 명령에 늑대 떼의 갑판이 소란스러워졌다. 밧줄을 조정하며 돛을 조종해 배가 천천히 돌아갔다. 갑판 밑 역시 선원들이 화약과 포탄을 나르느라 분주해졌다.
소곤소곤......
“......?”
선수에서 뱃전으로 걸어가 안개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디야브의 귓가에 무언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킥킥......
꺄르륵......
삭삭삭......
고막을 간질이는 낮은 웃음소리와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관객들의 낮은 수다 같은 소곤거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너희들, 이 소리 들리냐.”
“예? 무슨 소리 말입니까?”
디야브의 말에 선원들이 귀를 기울여 봤지만 그저 떠들썩한 전투 준비 소리와 파도 소리뿐이었다.
사각사각-
스스스-
디야브가 사방으로 고개를 홱홱 돌렸다. 마치 어둠 속에서 얇은 손가락이 빠져나와 귓가를 어루만지면서 내부로 파고들어 안심이란 개념 자체를 빼앗아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그 환청은 갑자기 생겨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선원들이 왜 그러냐고 불안한 눈빛으로 디야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에 당한 상황에서 그들이 의지할 것은 마법사인 디야브밖에 없었다.
“큼, 아무것도 아니다.”
부하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디야브는 억지로라도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알 수가 없군.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어.’
그는 마법사다. 정신력이 일반인보다는 강하다. 그런 그인데, 요상한 환청 하나 들렸다고 고개를 마구 돌렸을 정도로 불안해하다니. 정상이라면 부하들의 사기를 의식해 조용히 눈동자나 굴리면서 천천히 사방을 살폈을 것을.
디야브가 자신도 모르게 뺨을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아내고 다시 앞을 보았는데.
“......어?”
분명 전진을 하지 않았건만, 안개가 아까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뒷목이 당기면서 목뼈가 쑤시듯 아파왔다. 마법사의, 아니, 산 자로써의 직감이 당장 이곳에서 피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배 돌려라.”
“예?”
“배 돌리라고! 당장 저 안개에서 멀어져야 한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육중한 배가 부랴부랴 뱃머리를 돌리는 속도보다 안개가 디야브의 기함에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안개는 물 먹은 회색 드레스가 몸에 척척 달라붙어 늘어지는 것처럼 배를 감싸기 시작했다.
“망할! 전투 준비! 전투 준......!”
반쯤 공포가 섞인 디야브의 외침은 그대로 끊겼다.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다가온 안개는 기어이 기함을 껴안듯 완전히 덮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스무 척이 넘는 선단 한복판에 침범한 짙은 연기에 가려진 기함에 다른 선박들이 화들짝 놀라며 우왕좌왕했다.
“들어가! 단장님을 구해야 한다!”
한 선박이 용감하게 해무 속으로 몸을 던졌으나.
“뭐, 뭐야?”
금방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마치 안개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다, 단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디서 놈이 나올지 모르니까 대포 장전이나 해놔.”
안개가 갑자기 다가와 배를 삼켜버린다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을 겪자마자 선원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뱃사람들은 미신, 불길한 말, 마법 등에 매우 민감하다. 그게 우두머리를 마법사로 두고 있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겁먹지 마라! 단순한 눈속임일 뿐이야! 내가 누구냐, 마법사 아니냐! 무서워할 필요 없다!”
그렇게 고함치며 사기를 북돋는 디야브. 하지만 정작 그 역시 무슨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선천 마력인가?’
자신에게 생소한 마법이면 일단 선천 마력이라고 생각하라는 마법계의 불문율이 있다. 다만 그 기준이 어지간한 마법 종류는 다 아는 마법사 기준이라 일반적인 마법사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마법지식을 가지고 있는 디야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말이었다.
어쨌거나 디야브는 선천 마력인가 하고 먼저 생각했다.
‘이게 선천 마력이라면 고작 안개를 다루는 것뿐이다. 안개에 물리력을 실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 무서워하진 않아도 돼. 싸울 때 시체가 되살아나는 것만 주의하면 된다.’
하지만 왜일까. 목뼈가 계속 쑤시며 신경을 긁었다. 배 밑창에서 무언가 바깥에서 배를 긁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미지에 대한 불안감이 디야브의 머릿속을 콕콕 쑤셨다.
선원들이 공포를 한 입 머금고 입을 다문 지 몇 분이 지났다. 적의 공격은 없었다. 주변에서 다가오는 배 그림자도, 포성도 없었다.
“안개를 빠져나간다. 다른 배들도 휘말렸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부딪치지 않게 천천히.”
그러나 펼쳐진 돛은 그저 축 늘어질 뿐이었다. 무풍지대에 갇힌 것처럼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늘 바람이 잘만 부는 지중해 안쪽에서만 활동하던 선원들은 무풍 상황을 처음 겪어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버버거렸다.
디야브가 푸른 도깨비불을 여럿 일으키며 배를 둘러싼 안개 이곳저곳으로 보냈다. 저 조그마한 불꽃들은 디야브의 눈과 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안개 속으로 가 봐도 이어지는 건 안개뿐이었다. 더 무서운 건 바다 위에 있는 게 분명한데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있는 것처럼 수면이 매끄럽단 것이었다.
‘이건 대체 무슨 마법이야.....!’
***
“성공이다.”
소년이 미소를 지었다. 비록 다른 곳은 움직이지 않고 입만 씩 벌어진 꼴이라 다른 이들의 눈엔 굉장히 이질적으로 보였다.
“잘 되었습니까?”
브란트의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움직여.”
“옛!”
해적선장들, 아니 이제는 소년의 기함 직속 선원이 되어버린 64명의 유령들이 갑판을 이리저리 누볐다. 오랜 기간 동안 뱃일을 하며 선장 자리까지 올랐던 이들이니만큼 베테랑 선원 그 이상의 기량을 뽐내며 순식간에 돛을 조정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안개 속임에도 배는 돛을 부풀린 채 잘만 나아갔다. 배 밑부분에선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한 수면이 살아있는 것처럼 손길을 내밀어 배를 밀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