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아소르스의 마법사왕-2
바다는 늘 출렁인다.
어딘가부터 늘 불어오는 바람, 어딘가부터 늘 흘러오는 강물.
하지만 그것만이 바다를 요동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수면을 가르고 달려가는 배가 일으키는 물결, 고기잡이를 위해 던져진 묵직한 그물이 만드는 물방울, 지성 있는 이들의 고함이 일으키는 파문, 대포를 발사할 때 발해지는 진동, 수면 아래로 핏물과 함께 삼켜지는 몸뚱이......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수백의 해적단들이 얽히고설키는 아소르스 제도야말로 늘 폭풍우가 치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날치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여 수면을 끓어오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듯, 해적들이 만들어내는 파문은 모이고 모여 큼직한 거품을 만들어 냈다.
허나 해적은 어디까지나 해적. 그 파문이 닿는 범위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해적이라는 이름 말고도 사령술사라는 별도의 호칭까지 가진 해적이 일으킨 파문은 엘리자라는 배를 타고 아소르스 제도를 넘어 사방천지로 퍼져나간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 이 때.
그 저주받았으며 소름끼치는 이름의 대를 이어 물결을 만들어나갈 인물이 출현했다.
***
아소르스 제도의 파이알 섬.
다양한 모양의 해적 깃발을 내건 크고 작은 선박들이 좁은 항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군소 해적선장들이 잔뜩 모여 회동을 가지는 현장이었다.
조약돌이 일으킨 참방거림에도 조그만 물고기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리저리 난리를 피우는 법이다. 그런데 이번 돌은 한때 아소르스 제도를 떠들썩하게 한 바윗덩이에 버금가는 돌이었다.
“대선장의 제자가 나타났다고?”
“그래! 지금 테르세이라 섬에 머물고 있대.”
그들의 얼굴에서는 의심도 엿보였지만 그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비록 니아트리브의 물마법사에게 지긴 했지만 아소르스 제도를 제대로 일통하고 일시적이지만 모든 해적들의 수입을 늘려 민심도 사로잡은 대선장이다.
아소르스 제도가 해적 소굴이 된 이래로 처음 일통된 그때,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해적들의 심리를 ‘우리’라는 이름의 우리 안에 가두었다.
이 해적들이 흥분하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실패할 가능성에 긴장하며 좀생이처럼 이리 찔끔 저리 찔끔 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대선장의 이름을 업고 마음껏 약탈하며 공포에 떤 선원들을 보는 그 우월해진 기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니아트리브와의 일전 이후 대선장은 그대로 실종되었다. 사실 대선장은 시체를 되살리는 무시무시한 사령술사라는 말이 나돌았지만, 그럼에도 대선장이 권력을 잡았던 그 짧은 기간을 그리워하는 해적들이 있을 정도였다.
사령술사건 악마건 무슨 상관인가. 돈을 벌게 해줬는데, 기쁨을 누리게 해줬는데.
이득만 되면 대선장이 사람이건 엘프건 괴물이건 악마건 상관 않을 이들이 해적이다.
“그래서 그 제자는 뭐라는데 이렇게 떠드는 거야?”
“귀머거리냐? 온 제도에 파다한데 아직도 못 들었어?”
“이봐, 나 카스테냐 갔다가 어제 막 돌아왔다.”
“대선장이 되겠대. 그래서 밑으로 올 놈들은 모이라 한다 들었어.”
“간도 크네. 지금 아소르스가 어떻게 되었는데...... 조만간 싸움 나겠지?”
“그렇겠지. 대선장이 사라지고 그 사이에 다른 놈들이 꿰찼으니까.”
니아트리브 함대와의 결전 때 모인 수백 척의 해적선은 절반 이상이 배 밑바닥을 바다 밑바닥에 누인 신세가 되었다. 때문에 아소르스 해적 전체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대선장마저 사라져 버렸으니 아소르스 제도가 다시 조각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호랑이 없는 곳엔 늑대가 왕이라고, 새로 아소르스 제도로 유입된 세력 중엔 크게 두각을 나타내며 야심을 드러내는 이들이 다수 존재했다.
틀어쥐기가 콧대 높은 귀족들보다도 어렵다는 해적들을 한손에 그러쥔 대선장이라는 선례가 생겼으니, 나라고 못하랴! 하며 적극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는 이들이었다.
“대선장의 제자라니 역시 마법사겠지?”
“당연한 거 아냐? 마법사가 아니면 후계자나 뭐 그렇게 말하겠지 제자라 하겠나?”
“그럼 우리는 어느 쪽에 붙지?”
“우리 같이 열 척도 안 되는 해적들이 무슨. 괜히 편 들었다 피보지 말고 둘 중 이기는 쪽에 붙자고. 예전에도 그랬잖아?”
해적은 상인같이 이익을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줏대도 신의도 없다는 점에서 더 악질이다.
“그럼 우린 사태만 지켜보자고. 대선장의 제자가 대선장이랑 똑같이 돈 퍼준다고는 장담 못하니까.”
많은 군소 해적단들이 이들과 같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행동을 취했다. 대선장의 제자에게 얼른 달려가 충성맹세를 하는 것은 해적들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기사가 아니다. 당장 이익이 되지 않을 일은 당연히 하지 않는다.
한편, 대선장이 없는 사이 세력을 형성했던 이들은 순순히 수그릴 생각은 한 치도 없었다.
“전쟁 때문에 카스테냐 해군도 빌빌대는 마당에 보물선을 잔뜩 약탈할 기회야. 그 기회를 딴 놈에게 넘겨준다고?”
“어디 처박혔다가 튀어나왔는지는 몰라도 이미 다 갈라먹은 판에 포크를 들이밀어?”
“대선장이고 나발이고 내가 그 자리에 못 올라가리라는 법은 없지!”
한동안 잠잠했던 아소르스 제도에 또 한 차례 화약 냄새가 풍길 징조가 보였다.
***
“제자라......”
가무잡잡한 피부에 검은 수염이 턱과 코 밑을 수북하게 덮고 있는 중년 사내가 문서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머리엔 흰 터번이 둘러져 있어 어느 지역 출신인지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야브. 술탄국의 언어로 ‘늑대들’이란 의미였다. 그 말대로, 디야브는 무려 22척에 달하는 늑대 무리 같은 해적단을 이끄는 이였다.
그의 기함은 니아트리브 기준으로 따지면 3급 전열함에 드는 배였다. 기함 말고도 다른 선박들 역시 대포 4, 50문 정도는 탑재하고 있어 상당히 강력한 해적단이었다.
그의 안면은 노골적인 불쾌감을 띠고 있었다. 그 표정에 해적단의 간부들이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그들의 시선은, 디야브의 감정을 대변하듯 주변에서 시퍼런 빛을 내며 부유하는 도깨비불에 쏠려 있었다. 도깨비불은 글을 읽어 내려가는 디야브의 미간이 좁혀질 때마다 마치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일렁였다.
“요즘 마법계에 파다한 얘기가, 사령술사를 잡은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에 관한 얘기야.”
마법계는 종교적, 정치적 경계를 넘어선 집단이라 일단 마법사이기만 하면 종교와 문화와 민족을 막론하고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사막 태생이면서 이슬람 교도인 디야브도 유로파 마법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정보를 받아볼 수 있었다.
“최근에 여기 아소르스 제도에서 니아트리브가 날뛰었다는 건 다들 알겠지.”
그 때문에 아소르스 제도의 해적 세력이 약화되었고 지중해 밖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던 디야브 역시 이곳에 나타난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렇긴 뭐가 그래!”
쾅 하고 탁자를 내려치는 디야브. 간부들의 머리에 두른 터번들이 일순간 들썩였다. 도깨비불들 역시 경기를 일으키듯 바짝 일렁였다.
“대체 정보 수집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냐! 다 알고 있는 얘기만 주워오면 어떡하자는 거지? 어? 네가 읽어봐!”
디야브가 가장 가까이 있는 간부에게 문서를 던졌다.
“.......”
간부는 문서를 슥 읽어 보았다.
한 배가 테르세이라 섬에 정박했고, 그 배의 선원이 대선장의 제자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대선장의 제자는 지금 대선장이 되겠다며 세력을 모으는 중이라 한다.
문서는 그 정보를 시작으로 두서없이 장황하고 온갖 소문을 그저 말린 생선 엮듯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흩어진 섬에서 이 정도로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은 나름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이기적이고 서로를 의심하는 해적들은 정말 중요한 정보는 내뱉지 않는 편이라 오래 전에 첩자를 심어놓거나 인맥을 따라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디야브의 해적단은 갓 아소르스 제도로 들어온 상황이라 이들의 정보원들은 기껏해야 돈으로 매수한 해적 졸개. 따라서 정보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이따위로 모으니까 보물선 하나 못 털어먹고 빌빌대는 거 아니냐.”
이들은 본디 지중해의 북에프레카 해안과 발칸 반도 주변을 헤집고 다니던 술탄국의 사략함대 ‘늑대 떼’였다.
아소르스 제도에서 분쟁이 일어나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겼다는 말에 지중해 밖으로 진출할 목적으로 카스테냐의 보물선도 털어먹을 겸 득달같이 달려왔건만.
난데없이 유로파에서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대서양을 건너는 원거리 무역이 침체되어 보물선은 고사하고 멀리까지 나오는 일반 상선의 물동량마저 떨어져 해적들은 배를 곯고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근해로 가서 물자 수송에 바쁜 상선들을 약탈하기에는 니아트리브나 카스테냐나 둘 다 무서웠다. 마법사까지 가지고 있는 사략함대라고는 하지만 감히 대마법사가 있는 니아트리브 해군이나 무적함대라 불리는 카스테냐 해군에 비빌 수는 없다.
디야브의 짜증은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괜히 정보의 질에 심통을 부리는 것이었다.
“정보의 상태가 이따윈데 대선장의 제자니 뭐니 하는 게 단순히 소문인지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먹는단 거야!”
그 뒤로도 한동안 애꿏은 간부들은 함장의 욕을 들어먹었다. 언제 함장의 주위를 돌아다니는 도깨비불이 누군가를 홧김에 불사를지 몰라 그들은 식은땀으로 온몸을 목욕해야 했다.
“후우......”
한참 동안 분노를 토해내고 난 뒤. 디야브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비로소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 동작은 화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단 의미. 간부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놈을 박살내러 간다.”
그리고 디야브에게서 나온 한 마디.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아소르스 제도를 일통했다던 대선장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제 겨우 여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괜히 유로파 놈들끼리 대선장이니 하는 이름값에 뭉쳐서 우리를 견제하면 귀찮아져. 그러니까 그것도 방비할 겸, 우리 이름값도 높일 겸 대선장의 제자인지 뭔지를 공격한다. 이름 있는 놈을 쳐부수면 우리 밑으로 올 놈들이 생기겠지.”
***
“대충 이렇대.”
깊은 바다 밑의 아무도 닿지 못할 동굴 속. 소년은 아소르스 제도에서 떠도는 갈매기들이 주워 모은 정보를 간부들에게 말했다.
여러 해적단들이 대선장의 제자를 견제 혹은 정탐하러 테르세이라 섬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 밖에도 소년은 제도에 돌아다니는 유명한 해적단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늘어놓았다.
소년의 주변엔 윌리엄을 비롯해 ‘기사 서임’을 해 유령으로 되살아난 해적선장들 수십이 우르르 모인 채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해적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아는 이들은 결국 해적밖에 없었으니까.
소년이 늘어놓은 해적단의 이름을 차례차례 곱씹던 선장들은 개중 늑대 떼라는 별칭이 붙은 해적단에 관심을 보였다.
“디야브의 늑대 떼라면 들어본 적이 있긴 합니다.”
해적으로 오랜 기간을 지닌 윌리엄이 대답했다.
“지중해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다 들었습니다.”
“보통은 발칸이랑 에프레카에서 돌아다닌다던데, 저번에 니아트리브 함대가 여길 헤집어서 그런지 그 틈을 타 들어온 모양입니다.”
“듣자하니 선장이 마법사라던데요?”
선장들이 한 마디씩 내뱉으며 동굴 안이 도떼기 시장처럼 시끄러워진 와중 소년은 마법사란 말에 초점을 두었다.
“마법사라고? 자세히 얘기해 봐.”
“그냥 소문입니다. 저 멀리 술탄국이랑 여기는 너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소문도 정확한 건 못됩니다.”
“바다 소문이 다 그렇지 뭐. 마법사라고 하는 놈들은 여럿 있지만, 어쩌다가 운 좋게 구한 마법 물품으로 사기 치는 놈도 많습니다 대선장님.”
“그거 대해선 제가 들은 바가 좀 있슴다! 아 그러니까 제가 네폴리 왕국 쪽에 정박했다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말입니다, 아 네폴리가 어디냐면 그 카스테냐 오른쪽에 이탈리 반도란 데가 있는데 거기 남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술탄국과도 교류가 있는 나라죠. 하여튼 항구에서 술탄국의 사략 함대 중에 해적 출신이면서 마법사인 선장이 있다고 똑똑히 들었습죠!”
한 선장이 강하게 주장했지만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말이 나온 대로 마법 물품으로 마법사라고 사기를 치는 해적도 있었을 뿐더러, 자국 해군이나 함대의 전력을 부풀려 보이기 위해 헛소문을 퍼뜨리는 경우도 왕왕 있어 아무리 국가의 말이라고 해도 전부를 믿을 수는 없었다.
무릇 소문이라 함은 날이 갈수록, 거리가 멀수록 살이 피둥피둥 오르는 놈이다. 하지만 그 소문이 날 때부터 크기가 컸다면 오히려 갈수록 살이 빠지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럼 일단 마법사라고 상정하고 붙어야겠어.”
“대선장님, 늑대 떼와 붙으실 생각이십니까? 녀석들은 스무 척이 넘는다 합니다.”
“놈들이 저희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 백병전보다는 원거리 포격전을 할 게 분명합니다.”
“지금 들어오겠단 놈들도 없고, 벌써부터 그런 큰 해적단과 맞붙고 싶어 하는 놈들도 없을 겁니다.”
돈으로 의리와 충성을 따지는 해적들이라 돈만 준다면 얼른 붙는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맞붙으면 어떻게 될지 결과가 보이는 악명 높은 해적단과 싸우고 싶은 해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체로 보물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상관없어. 다 생각이 있으니까.”
소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 대 다수라고? 무슨 상관이야. 머리만 잘라버리면 그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