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희망봉의 유령선-10
카스테냐 왕위 계승에서 촉발된 전쟁이 그 막을 올렸다.
협상을 위한 모든 길목이 막혔다. 이제 남은 것은 힘겨루기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춘 선전포고를 날리고 마법 연락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각국 정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전달되었다.
그렇지만 무대 위에는 아직 모든 배우들이 올라와 있지 않았다. 서로의 선전포고 시기가 겨울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류는 농법의 발달과 작물의 품종 개량, 저장 기술을 끊임없이 발달시켜왔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공포는 모두의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는 것이며 여러 악조건을 극복한 이 시대에도 섣불리 달려들면 안 되는 천재(天災)다.
때문에 군대 소집을 미적거리거나 전쟁 준비를 끝마친 국가조차도 소극적으로만 대응하고 있었다. 겨울에 먼저 전투를 건다는 것은 스스로의 전투력을 깎아먹고 시작하겠단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국경에서 가시만 잔뜩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가운데, 에크나르프는 해군을 움직였다.
“니아트리브의 개입만은 막아야 한다.”
에크나르프의 입장에서는 육지에서 여러 나라를 상대해야 해 부담이 컸다. 때문에 바다라는 천연의 장벽을 활용하기로 했다. 에크나르프 해군은 니아트리브 해군보다 떨어진다는 평가지만 그렇다고 대항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해군을 이용해 니아트리브의 보급선을 끊거나 최소한 지연은 시키자!’
에크나르프의 모든 해군 병력이 집결하여 레흐텐으로 상륙하려는 니아트리브 해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약간의 ‘실수’가 있긴 했지만 나름 괜찮게 니아트리브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나.......
도버 해협에서 일어난 대규모 해전에서 에크나르프 왕실은 해군 전멸이라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패전보만 들어야 했다.
“이것들이 정신이 나간 건가? 린던 앞바다까지 와서 화를 자초하다니.”
바로 1급 물마법사 엘리자 때문이었다.
이로써 니아트리브가 배에 대마법사를 태운다는 발상을 한 게 비로소 공식적으로 유로파 전역에 퍼졌다.
카스테냐가 이전에 한 번 깨진 것은 카스테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쉬쉬했고, 사령술사를 처치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는 사령술사 처치를 위해 해군과 대동한 거지 완전히 해군에 포함된다고 보기엔 어려워 그다지 관심 받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타국과의 전쟁, 그것도 일선에 대마법사가 동원된 것은 얘기가 다르다.
존재 자체만으로 전략병기 취급되는 대마법사가 전쟁에 끼어든다? 대마법사가 전쟁에 동원된 지는 아주 오래 되었다. 오랜만에 일어나는 그 일에 유로파 전역의 마법사들이 들썩였다.
초월자란 의미로써의 대마법사는 아예 인세를 반쯤 떠나 세상에 개입하는 일이 드물며, 강하다는 의미로써의 대마법사들도 일반적인 전쟁엔 참여하지 않고 오로지 국운이 걸린 전투에나 나설 수 있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나라마다 대마법사의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한 국가의 가장 맨 꼭대기의 마법사는 대체로 이 불문율이 적용되었다. 한 나라의 최고 수준 마법사가 평균적인 대마법사 반열에 한참 미달된다면 또 모를까.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너도나도 자국의 고위 마법사들로 공격을 가하면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날 것이고, 그걸 보복하는 악순환이 이어져 결국 모두가 파멸할 게 뻔하기 때문에 생겨난 불문율이다.
이 불문율은 천 년도 더 전에, 위대한 제국이 존속하고 있을 때보다도 이전에 제정된 유서 깊은 것이었다.
마법은 나날이 발전하고 소수의 마법사만으로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게 된 이후, 마법계와 정계 모두가 ‘마법사의 사용은 전장에서만!’이라는 조약도 맺은 지 오래다.
화약무기가 발달함에 따라 마법사가 발붙이는 전장이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다지만 마법의 위력이 줄어든 건 아니었기에 이 조약은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 조약도 있고 하니, 대마법사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오랫동안 지켜온 불문율도 마치 성문법처럼 지고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불문율이 깨지자 에크나르프를 필두로 마법사 집단이 들썩였다.
“니아트리브 마법계는 당장 해명하시오!”
마법사 집단들이 소속된 마법사 연맹은 니아트리브 마법사 협회에 당장 해명하라며 경고장을 보냈다.
한 나라의 해군을 전멸시킨 초유의 사태의 뒷면에는, 니아트리브의 입장에서는 사실 조금 억울한 면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이 없었어도 어차피 언젠가는 직면해야 할 일이었다.
니아트리브의 해명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나왔다. 대마법사를 종군시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은 예상했으므로 미리 준비해둔 것이었다.
의례적인 문구를 제외하고 정치적 표현을 해석하여 해명문을 간략하게 압축하면 이러했다.
엘리자베스 스펠위버는 개인의 복수를 위해 니아트리브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거래를 했다. 자유롭게 원수를 수색하는 대신 해군에 복무할 것을 제시받았으며 복수를 끝내고 거래 내용을 이행 중일뿐이다. 또한 이번 에크나르프 해군 전멸 역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거대한 마법사 단체인 마법사 연맹은 초국가적인 집단이며 그들의 기준에는 왕도 ‘개인’에 불과하다. 왕조차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취급하는 초월적인 대마법사들이 존재하니까. 그래서 아무리 왕과의 거래라 한들 그저 개인 간 거래. 이는 정당한 사유로는 다소 부족했다.
또 한 나라의 해군을 싹 쓸어버린 파급력은 정당한 사유가 있었더라도 모두의 심기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마법사 연맹을 달래기 위해 니아트리브는 몇 가지를 덧붙였다.
1. 엘리자베스 스펠위버는 육지의 전장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
2. 해상은 그 속도가 느리고 제한적인 전장에만 참여하게 되므로 자체적인 족쇄나 다름없으니 문제가 없다.
3. 엘리자베스 스펠위버의 복무기간은 10년으로 할 것.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첫 번째 사항은 엘리자는 어차피 물마법사이기에 육지 전장에는 적합하지 않다.
두 번째 사항은 해상 이동 수단인 배의 속도가 느리니 배에 타는 엘리자 역시 그리 큰 활약을 하기엔 문제가 많다는 일종의 호소이자 변명인데, 중요한 건 전장에서의 영향력이기 때문에 붙었다 하면 상대를 몰살시킬 수 있는 엘리자에겐 하등 문제가 없다.
복무기간이 10년? 그 정도면 니아트리브가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도 남을 긴 기간이다. 카스테냐가 해군력을 증강하여 바다를 장악하기까지 걸린 기간도 고작 7년에 불과했다.
정계의 인물들이 봤다면 바로 구겨 던져버릴 해명문이었지만, 마법사 연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연맹 자체는 마법사의 이익집단이긴 하나, 정계에 영향을 최소한으로 끼칠 것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누가 패권을 잡건 마법사 연맹 자체의 권리만 보장되면 그만이다.
연맹이 현 상황에서 원하는 건 일단 대마법사의 종군이 표면상으로 드러난 이상, 마법사에게 제한 조건이란 족쇄를 걸어 그 파급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참전 이유가 정당하다 한들 사방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면 곤란하니까.
해명문 발표 이후 마법사 연맹은 엘리자의 참전을 허용했다. 엘리자가 일선에서 힘을 쓴 이유도 정당했고(다만 그건 해군 전멸 건에 묻혀버렸다) 엘리자 본인 역시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지 않겠다고 족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한 나라의 제일가는 마법사가 전장에 동원되는, 불문율이 보편화된 이후에 처음 있는 선례가 생겨버렸다.
“선례가 생기면 이를 악용하는 나라도 분명 생길 거요!”
“이 일은 두고두고 극악한 선례가 될 거다!”
내부 반발이 거세며 여러 나라들의 마법사 집단들이 보이콧(boycott)을 선언하며 무너지기 시작한 불문율이라는 이름의 댐을 고쳐보려 했지만 한 문서가 마법사 연맹 내에 대대적으로 풀리며 여론은 반전되었다.
바로 엘리자가 복수를 한 사령술사와의 싸움기록이었다.
제한 조건인 복무 10년의 기간에 대해 아소르스 제도 출정도 복무 10년에 포함하느냐 마느냐를 심사하기 위하여, 마법사 연맹은 아소르스에서의 전투기록을 제출하길 요구했다.
이전까지는 기껏해야 ‘악마와 손잡은 잔챙이는 많으니까......’ 혹은 ‘어차피 수명 짧을 사령술사 잡은 게 뭐 대수라고.’ 정도였지만, 아소르스 제도에서 벌어진 해전의 처참한 전황을 담은 기록물이 연맹에 제출된 이후부터는 상황이 뒤집어져 버렸다.
<극악한 방식과 거대한 규모로 니아트리브 함대에 제대로 피해를 입힌 사령술사다. 사령술사가 수명은 짧다지만 그 정도로 강한 사령술사라면 오래 살아왔을 것이며, 또한 앞으로도 금방 죽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마법사 엘리자베스가 그 사령술사를 사살하지 않았다면 차후 어디서 어떻게 힘을 키워 유로파를 재앙의 구렁텅이로 밀어버렸을지 모른다.>
라는 사설까지 연맹 내에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엘리자를 옹호하는 세력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마법계에서 사령술사의 대한 평가는 대략 이러했다.
‘사령술? 그게 뭐야?’
‘사령술? 악마와 계약해서 영혼이 삼켜지는 게 예약된 악인들 말하는 건가?’
사령술 지식에 대한 완전실전으로 사령술에 대해 아예 그 존재조차 모르거나, 현대의 사령술사의 특징상 짧은 수명으로 인해 평가절하된다.
그러나 오래 살며 악명을 떨치는 사령술사도 있긴 있다. 그렇게까지 크기 전에 연맹 차원에서 대부분 은밀하게 제거를 하거나 정보은폐를 하여 잘 모를 뿐이다.
그런 위험하고 강력한 마법사를 상대로 고전하여 결국엔 싹을 잘라버렸다는 평가가 붙게 되자, 엘리자의 이름값은 훌쩍 뛰었다.
왜 사령술이 세상에서 지워졌는지 아는 대마법사급의 인물들과, 마법사 연맹의 은밀한 조직과 연이 닿아 사령술사의 위험성을 잘 아는 고위 마법사들이 엘리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마법계에 ‘이 정도 공이면 한 번은 허용해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여론이 기존 여론을 제치고 말았다.
심지어 에크나르프 국적의 마법사들조차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더욱이 에크나르프는 보르도 지방이 사령술사(로 의심되는)에게 큰 피해를 입은 마당이니.
유로파 전역의 마법사 단체들이 끓는 냄비처럼 시끌벅적한 가운데, 마법사 연맹은 이렇게 발표했다.
<위험인물을 사살한 엘리자베스 스펠위버의 공적은 많은 마법사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는 에크나르프의 마탑과 학파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한 공적을 비롯해 다양한 상황을 감안하여, 니아트리브 국왕과 니아트리브 왕실 마법사단장과의 거래를 특별히 허용하는 바이다.>
이 발표로 인해 엘리자는 명실상부하게 많은 마법사들이 인정하는 공적을 세운 인물이 되었다. 다소 추켜세워진 감도 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마법사 연맹의 속셈은 어차피 이미 전쟁 참여 사례가 생긴 상황이니, 이러한 발표로 못이라도 박아 두어 엘리자와 같이 크나큰 공적을 세우는 경우가 아니라면 개인 간 거래를 악용하여 전쟁 참여를 하려는 사례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공적을 세운 이가 칼을 마구 휘두르는 걸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니아트리브 측이 자체적으로 제시한 제한 같은 방안을 앞으로 세우겠다며 마법사들의 민심을 다독였다.
유수의 마법사들이 참여한 마법사 연맹의 최고 결정 기구가 그렇게 선언하자, 마법사 사회를 잠시 동안 뜨겁게 달구었던 대마법사의 전쟁 참여 건에 대한 열기는 투덜거리는 일부를 제외하면 맥없이 다시 가라앉았다.
이렇게 되니 곤란하게 된 건 에크나르프였다.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 종군을 취소시키기 위해 급히 마법사 연맹에 고발했던 에크나르프에게는 도리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설마하니 사령술사 퇴치 소문이 이렇게나 크고 중요한 정보였을 줄은......!
이제 니아트리브의 군대가 속속 레흐텐에 상륙하는 것을 보면서도 해군이 모두 쓸려나간 에크나르프는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에크나르프 해군이 전멸하여 공해나 다름없어진 에크나르프 근방의 바다를 니아트리브의 사략선단들이 휘젓고 다니는 가운데, 니아트리브의 제해권을 장악하겠다는 손길은 남쪽으로 슬그머니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