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희망봉의 유령선-9
“대마법사님. 혹시 이번 전쟁에 참여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전대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러는구나.”
“.......”
“나는 국가를 뛰어넘은 몸이며, 별의 뒤를 따라 승천해야 할 운명. 수많은 목숨을 빼앗는 것은 불가하다네. 전대도 전전대에도 얘기해 주었고, 나와 같은 이들은 전쟁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모르는 게 아닐 터인데 어찌하여 자꾸 물어본단 말이더냐.”
마탑 중 가장 높은 마탑의 꼭대기층에서 이뤄지는 대화였다. 국왕의 전령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앓는 소리를 냈다.
강하다는 의미의 대마법사(Master mage 또는 Master wizard)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초월자’를 가리키는 의미의 대마법사(Philosophic master 또는 Transcendence master) 앞에서는 왕조차도 한낱 인간에 불과해 경의를 표해야 하였으니, 전령이 아무리 왕을 대신한다 해도 윽박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령은 입이 실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물쭈물하더니 끝내 물러났다. 아래와 연결된 마법진이 번쩍하고 빛을 내더니 전령의 모습이 방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현자라는 단어가 그대로 사람으로 화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흰 옷을 입고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은 응접실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대마법사의 방은 유리벽으로 되어 있었다. 분명 시간상 낮인데도 유리벽 밖으로는 별빛이 수놓아진 검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거대한 땅덩이가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에크나르프를 넘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마탑. 이 이름이 붙은 이유는 대마법사의 거처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공기도 없는, 말 그대로 ‘가장 높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마법사가 탄식 섞인 한숨을 허어 내쉬었다.
‘오늘도 별들이 시끄럽구나.’
점성술에는 손을 댄 적이 없지만, 마법의 극한을 엿보고 인간을 뛰어넘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유로파 제일의 대마법사는 별빛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지상에서 태어난 이의 한계가 있기에 알 수 없으나 꽤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평상시에는 유유자적하게 하하호호거리던 별들의 반짝임이 급박함을 담고 반짝이기 시작한 것은 1년도 되지 않았다.
단순히 급박함 수준이 아니라 적의가 엿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격노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별들이 그렇게까지 증오하는 대상이라니. 대체 어떤 악독한 짓을 저질렀길래?
하지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보르도 습격.
해적에게 보르도가 심하게 약탈당했다는 사건에서부터 뭔가 느낌이 왔다. 단순한 습격인 것뿐이라면야 언젠가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마법사들의 보고서에는 사령술이 의심된다는 말이 똑똑히 박혀 있었다.
‘사령술이라.’
이 세상에서 사령술이 사라진 이유를, 그는 안다.
‘검은 역병이 돌았을 때.’
당시의 시대를 표현하는 그림들은 하나같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낫을 든 해골이 등장하고, 해골과 사람이 뒤섞여 있거나, 해골이 잔뜩 쌓인 수레가 등장한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이를 ‘비유’라 여기지만......
‘그건 현실이었다.’
검은 역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었다.
무려 사령술이 가미된 악마의 역병!
병에 걸려 죽은 이들은 시체로 되살아나 살아 있는 이를 습격하고, 죽은 이는 똑같이 되살아나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 배회하는 악순환이 이어진 생지옥이 지상에 펼쳐졌다.
그 시체와 역병을 지휘하는 이들은 악마와 계약한 사령술사들.
악마와 계약하여 힘을 얻은 영향으로 거죽과 살점이 사라지고 앙상한 뼈만이 남은 채, 낫을 들고 산 자의 영혼을 추수하여 악마에게 바치는 해골 사령술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다.
유로파와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수십 년에 걸친 악전고투 끝에 검은 역병을 몰아낸 마법사들은 이 세상에서 ‘사령술’이라는 마법을 아예 지워버리기로 합의했다.
검은 역병 이전까지는 오지에서 죽은 이의 시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거나, 범죄 피해자를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는 등 사령술도 유용하게 이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철저히 박멸되어 모든 사령술에 관한 마법 서적은 불태워지고 사령술사들은 죄가 있건 없건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들였다. 산 자를 도운 사령술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혹시라도 서고에 사령술에 대한 서적이 남아있을까 전 세계의 서고들이 한바탕 뒤집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대서양 너머 신대륙까지 당시의 초월자 대마법사들이 나서 사령술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주술들을 실전시켰을 정도였다.
이로써 지상에 자생하던 사령술은 모조리 지워져,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사령술이 다시 나타날 때는 오직 악마와 계약한 이가 나타났을 때뿐.
그렇게나 경계한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사령술사를 그리 큰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로 금방 악마에게 혼이 집어삼켜지므로.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걸 많이 알고 있는 에크나르프의 대마법사는 뭔가 느낌이 왔다.
‘그건 평범한 사령술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별이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와 보르도를 습격한 사령술사가 나타난 시기가 겹쳤다.
아무리 사령술사가 수명이 짧다고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영악한 사령술사도 있기 때문에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난다 싶으면 마법사 연맹에서 추적에 들어가 사살하곤 한다. 혼란 방지를 위해 극비리에 해서 많이들 모를 뿐이다.
만일 그 사령술사가 별의 분노를 산 것이라면 절대 평범한 이는 아니리라. 마법사 연맹의 추적을 피해가면서 별의 분노를 살 정도로 활동을 하고 있단 얘기니까.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확언을 할 순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심증.
세상이 넓은 만큼 인물과 사건은 많고도 많다. 그의 눈이 닿지 않은 곳의 인물이 별들의 관심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보르도 습격이라는 사건이 들어왔기에 그렇게 생각이 든 거고, 시기가 겹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연맹에 알리지도 못했다. 추측성 발언이라 해도 대마법사의 말이니만큼 마법사들은 진중히 받아들일 것이다. 혹여나 그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안 그래도 바쁜 마법사들의 역량이 엉뚱한 곳으로 쏠려 다른 곳의 위험을 촉발시킬 수도 있다.
‘점성술사들에게 미안하군.’
별이 보인 이변에 점성술사 사회에서도 문의가 들어왔건만, 대마법사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는 별다른 답변을 해줄 수 없었다.
아무리 별에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는 별이 아니었으므로.
‘그런데, 지금은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별들이 떠들고는 있는데 묘하게 당황한 느낌이었다. 마치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느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상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경계와 분노를 띤 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이전에 겪어본 적 없는 일이 속속 일어나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부터 변화가 생긴 결과가 이제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탓일까? 별을 더 잘 볼 줄 아는 점성술사 출신의 자신의 친우라면 더 잘 알 텐데.
신대륙의 발견과 신대륙의 원주민을 상대로 한 가혹한 약탈.
같은 엘프들에게도 무자비했던 유목민 엘프들이 유로파에 했던 악행을, 유로파가 똑같이 다른 대륙에 행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잔혹했다. 적어도 엘프는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면 살려는 줬으니까.
어쩌면 사령술사도 잔혹해진 시대에 휩쓸려 악마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궁금한 것도 많고 여러모로 안타깝기도 했지만, 대마법사는 이제 세상에 초연해져야 할 때였다. 인세를 떠난 초월자 신세라 그저 제자들에게 조언과 가르침으로 인간의 악독함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
어느 어두컴컴한 공간.
딱딱한 돌바닥 위로 커다란 원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탁 역시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끼가 낀 듯 은은한 녹색을 띠고 있어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원탁 주변으로는 열 개의 의자들이 뺑 둘러 있었다. 의자에는 하나같이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쓰고 얼굴이고 손이고 감춘 이들이 앉아 있었다.
“엘가리 상황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한 인물이 보고를 받았다. 이번 회의와 관련된 ‘일’의 지휘권을 맡은 이였다. 각 지역을 담당한 로브 쓴 이들이 차례차례 보고를 시작했다.
“제대로 처리되었다네. 측근은 모두 죽거나 도망갔고 교체도 완료되었어.”
“좋습니다. 카스테냐 쪽은? 적그리스도 후보는 어떻다 하던가?”
“사교계에서 명망을 떨치고 있지요. 아무렴 우리가 지원해주는데 그것조차 달성하지 못한다면 후보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좋아. 엘츠아 쪽은 어떻지요?”
“그것이 좀 어렵다네. 아닌 게 아니라, 후보가 무려 왕실에 있지 않나. 지금 누가 후보인지 알아보려고 접근하는 것도 난항이야.”
“접근조차도 어렵단 겁니까?”
“전쟁이 터져서 감시가 더 삼엄해졌다네.”
전쟁 중에 적국에 침투하여 인질을 잡는 경우도 간혹 있었기에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의 중요인물에 대한 호위는 더욱 강화된다.
“시녀나 시종으로 위장시켜서라도 접근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들켰다 싶으면 자결시키거나 암살자로 위장해 죽게 하고. 전쟁이 코앞이니 오히려 의심을 피하긴 쉬울 겁니다. 적국이 보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어떻게든 우리의 존재를 후보에게 알려서 욕망을 심어야 합니다. 왕실에 있다고 하니 권력욕은 있을 터. 안 그래도 여제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공작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로파에서 떵떵거리는 강대국인 동부국은 현재 강하고 현명한 여제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왕실에 숨어 있을 적그리스도 후보의 권력욕을 부추기기 위해 동부국의 왕권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었다.
후보가 왕위계승권이 높은 이라면 초조하여 안달이 날 것이고, 왕위계승권에서 먼 이라면 왕위를 위한 욕심을 불태우며 이들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별들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포착한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하지요. 정보조직을 가동해서 조그만 사건이라도 포착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면 언제든지 개입하거나 끌어들여야 합니다. 모두들 알겠습니까.”
다양한 말투의 낮고 음침한 대답의 합창이 회의실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