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71화 (72/128)

71화

희망봉의 유령선-8

파리 마법대학의 기숙사 방.

“-해서, 저희는 전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흠. 사교계에서 카스테냐 쪽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말은 들었지. 그래서?”

공왕 표트르 마그나노프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루스 공국과 1천km도 넘게 떨어진 에크나르프의 정세는 그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기껏해야 무역로가 좀 어려워진단 것 정도?

“국왕 폐하께서는, 공왕께서 루스 공국에 연락하시어 라인 연맹을 긴장케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부탁이 아니라 거래겠지. 뭘 갖고 왔는가?”

왕족 치고는 다소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물론 앞에 있는 이 전령이 그보다 하급자이기에 그런 것이지, 왕 끼리의 대화라면 예의라는 이름 하에 서로 빙빙 돌려 말해 듣는 사람이 속 터져할 대화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표트르의 이러한 반응은 에크나르프 쪽에서도 알고 있었던지,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큰 양피지를 꺼내는 전령.

“......”

표트르가 양피지를 보자 살짝 미간을 좁혔다.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라고? 아무리 루스 공국이 서부 유로파에 비해 뒤떨어졌다지만...... 이 물건에 담긴 정치적 표현을 모를 표트르가 아니었다.

“흠......”

언짢은 기색을 숨기고 혼혈 엘프 공왕은 조건이 빼곡히 적힌 양피지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저렴한 이자로 차관 제공에, 기술자 및 예술가 파견, 루스 공국의 유학생 대학에 우선 수용, 무역 관세 몇 년 간 차감, 루스 공국으로 복귀 시 호위 병력 대동 등등등.

과연 카스테냐를 꿀꺽하고 싶어 하는 에크나르프의 의지가 보이는 거래 목록이었다. 그러나.

“조건이 참으로 후하군그래.”

이 표현을 직설적으로 바꾼다면 ‘헛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유로파의 귀족식 표현으로는 아주, 정말, 참으로 등의 정도가 높은 찬사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거나 찬사를 빼고 해석해야 한다.

친한 사이거나 진심으로 감탄할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처럼 건조한 대답이라면 그저 정치적 수사라 보면 된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박아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국왕의 직속 전령. 전령은 왕을 대신해 온 자다. 아무리 직설 화법이 가능하다지만 협상이 시작된 이상 어느 정도는 귀족적 대화를 해야 했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 앞에서 뻔뻔하게도 말하는 전령.

‘뭐긴 뭐야, 언제든 입 싹 닦을 수 있는 조건들이라 그렇지!’ 라고 일갈하고 싶었으나, 지금 그는 공왕 표트르였다.

“지금 이 양피지 말고, 당당하게, 종이에다가, 국왕의 친필 서한이 포함된 거래 내역을 받아서 볼 수 있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입 못 닦게 도장부터 찍으시지.

“......지금은 전쟁을 논의하느라 다소 바쁘신지라.”

씁, 들켰네.

“허어, 안타깝구려. 에크나르프의 국왕 자리는 참으로 바쁜 모양이오. 할 일이 그렇게 많다는 게. 그렇게나 바쁘시다니 그 노고를 줄여주기 위해서라면 이런 볼품없는 공국이지만 손을 보태주겠소. 그게 도리에 맞는 일이겠지.”

바쁘다는 핑계 대지 말고. 도울 의향은 있다. 다만 거래는 확실하게.

표트르의 대답에 담긴 의중을 파악한 전령이 양피지를 도로 받아 품에 넣었다.

“그렇다면 차후 다시 일정을 잡겠습니다.”

“그리고 내 요청할 게 있소이다. 나머진 다 좋은데 병력 구성은 좀 과한 의례가 아닌가 하오. 전쟁 이후에는 여유도 없을진대,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들기엔 나로서는 너무 미안하구려.”

“알겠습니다.”

전령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나 눈빛에서는 ‘칫’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잘 살펴 가게나. 다음엔 꼭 ‘종이’로 가져오고.”

우리 무시하려 들지 말고.

“예. 공왕께서도 이 나라에서 ‘많은 걸’ 얻어 가시길 바랍니다.”

많은 게 부족해서 다른 나라에서 얻어가려고 온 주제에.

전령이 물러나고, 표트르가 묵고 있는 기숙사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창 밖에서 들리는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표트르의 심기를 자극했는지 그가 주먹을 쥐었다.

“그래. 뒤떨어진 나라의 숙명이겠지. 얼마나 나를 업신여겼으면 양피지 쪼가리나 주고 병력을 붙여 주겠다는 노골적인 제안을 하겠어.”

현재 표트르는 자신의 형에게 국정을 맡겨 두고 탈출하듯이 유학을 온 상황이었다. 루스 공국의 토후들은 변화와 발전을 반기지 않았기에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걸 사사건건 방해했다. 유학생들을 습격해 산적이 그랬다고 했을 정도니.

때문에 유학생 파견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간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는 그의 형이 표트르인 체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표트르가 타국의 병력을 이끌고 온다?

‘저놈, 타국과 결탁해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다!’라는 손가락질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토후들은 분명 이를 꼬투리 삼아 표트르를 물어뜯으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의 권위는 실추되고, 자연스럽게 에크나르프에 더 의존하게 되어 정말로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엘프가 유로파를 휩쓴 지도 오백 년이 넘었고, 이 거지같은 귀도 이제는 먼 옛날의 흔적에 불과하거늘, 어찌 이리도 세상은 가혹하단 말인가......”

표트르의 말은 단지 혼잣말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시립한 두 기사들과 아픔을 공유하는 대화였다. 두 기사가 침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와중에도 표트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공국을 대리통치하고 있는 자신의 형과 연락할 수 있는 마법 물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한동안 잠잠하던 유로파에서 전화가 타오를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 시대의 유로파에서 전화라는 의미는, 두 국가가 서로 맞붙는 정도가 아니다. 그건 그저 ‘조그만 싸움’일 뿐이다. 천 단위의 군대든 만 단위 군대든.

그러면 ‘전화’라고 칭해지는 경우는 과연 어떨 경우일까?

과거와는 달리, 권력층이 결혼동맹을 통해 혈연관계가 복잡하게 얽혔고 강국들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서로를 견제하는 시대다. 고대의 위대한 제국이 유로파 곳곳에 도로를 건설해 놓은 것처럼, 유로파 전역에 도화선이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 시대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향해 선전포고를 날린다면 동맹 관계 혹은 세력 구도에 따라 연결된 도화선에 줄줄이 불이 붙게 된다.

따라서 ‘전화’의 기준은 네 국가 이상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합하여 선전포고를 시작할 때다.

사교계와 각종 간자들의 첩보망을 통해 에크나르프가 카스테냐와 한 몸이 되겠다는 소식을 들은 유로파는 기겁했다.

오랜 경쟁자인 동부국은 기함하며 결사 반대를 외쳤다.

라인 연맹 역시 노골적으로는 아니지만 세력 확장에 우려를 표하며 그건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카스테냐 내에 반 에크나르프 파 역시 으르렁거리며 반대를 주장했다.

니아트리브는 유로파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저지할 의무가 있다며 기가 찬 명분을 내세워 얄밉게 끼어들었다.

에크나르프를 지지하는 국가 역시 있었다.

대표적으로 카스테냐 내의 친 에크나르프 파가 양팔을 벌리며 환영했다.

그 다음으론 동부국에 복속되어 있는 국가, 엘가리의 엘프 왕이 동부국의 횡포를 참지 못하겠다며 지지 서한을 보냈다.

마찬가지로 에크나르프 및 카스테냐의 영향력이 강한 반도 도시 국가들 역시 에크나르프를 지지했다.

또한 라인 연맹에 속해 있지만 같은 연맹국인 프아이서와 사이가 좋지 않은 바이에른 공국이 에크나르프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밖에도 조그만 국가들도 중립국 스위체를 제외하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에크나르프를 적으로 돌리거나 지지했다.

교황청의 경우는 지금이 교황이 왕보다 높은 시대도 아니니 딱히 특정 진영을 옹호하진 않았다. ‘계보가 옳다면 응당 그러할 권리가 있다’며 중립을 표명했다.

분위기는 흉흉했으나, 전쟁이 곧바로 일어나진 않았다.

전쟁은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내부의 지휘권 문제도 있고 군대 소집 및 군비 계산도 해야 하고, 상대국의 요구조건에 명분상 하자가 없나 꼼꼼히 조사하고, 전쟁을 막을 방도나 거래조건이 있는가 조사하고, 은밀히 협상을 제시하고, 이도저도 안 되면 압박 수단을 동원하거나 협박도 첨가하는 등, 최대한 상황을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일이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거나 이미 내부정리가 끝난 상황에서 분쟁이 시작되거나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경우가 있어서, 겉으로만 본다면 별 거 아닌 걸로 툭하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오해를 하곤 하지만 말이다.

엄연히 모든 단계를 거치고 합의점을 최대한 검색해본 뒤에 모든 길목이 막혔을 때나 일어나는 게 국가 간 전쟁이다.

그렇게 어렵게 일어나는 만큼 끝내는 것도 어렵다.

여러 국가가 개입하는 만큼 협상의 주체는 많아지고, 협상 주체의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며, 그동안 피해와 군비로 인한 지출은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번번이 깨부수며 더 이상 항거할 수 없을 수준으로 차이가 벌어지지 않는 한은 금방 끝날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쉽게 발을 빼기 힘든 전쟁이라는 구렁텅이에 발을 넣고 싶은 나라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에크나르프의 왕궁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이 몰려가 정당성과 명분을 꼼꼼히 조사하며 꼬투리를 잡기 위해 애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에크나르프의 명분에 흠이 있다면 모두가 에크나르프를 비난하는 것은 물론이요, 에크나르프의 편을 들었던 국가들조차 명예롭지 못하다며 슬쩍 발을 뺄 것이다.

그렇게 몇 주 동안의 조사가 끝나고.

“젠장, 꼬투리 잡을 게 없어!”

“완벽히 왕위 계승이 가능한데?”

“에크나르프가 당당히 나올 이유가 있었어......”

이런 절망적인 소식만이 본국으로 갔을 뿐이었다. 왕실 계보는 명백히 에크나르프가 카스테냐 왕위 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뭐다?

“전쟁이다!”

힘으로 상대방의 의지를 꺾을 수밖에.

명분이 확실하다면 힘으로 그 명분을 부러뜨려 포기하게 강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나 명분과 권리를 중요시하면서도 정 안되면 힘으로 명분을 박살낸다니.

이해가 안 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시대인데.

유로파 곳곳에서 전쟁의 징후가 나타났다. 군대가 움직이고 급히 징발이 여기저기에서 이뤄졌다.

에크나르프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있었다. 에크나르프는 예전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은밀히 군대를 모아왔다. 여러 나라를 상대한다 한들 전투가 벌어질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바로 국경지대다.

따라서 에크나르프는 진작 군대를 둔전병의 형태로 국경지대에 집중해 놓았다. 원래부터 평원이 넓고 국경지대를 포함한 온갖 곳에 농경지가 가득한 에크나르프라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카스테냐는 찬성파와 반대파가 서로 싸우고 있었으나 찬성파에 카스테냐 왕실이 있었기에 귀족끼리의 산발적인 전투만이 이뤄질 것이며, 무엇보다 강력한 카스테냐의 해군력이 니아트리브를 견제할 것이다.

라인 연맹은 뒤쪽에서 갑작스런 루스 공국과 폴란트 공국 간의 군사적 대치가 일어남에 따라 연맹국의 여러 제후국들이 후방의 안전을 위한다는 핑계를 대며 빠져, 프아이서 왕국만이 바이에른 공국과 에크나르프를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동부국 역시 사정은 좋지 않았다. 자신들의 속주나 다름없었던 엘가리의 반역으로 인해 신경이 쓰임은 물론이고, 여기에 더하여 에크나르프와 술탄국 사이의 물밑 교섭이라도 있었는지, 난데없이 이교도 술탄국이 동부국과의 국경에 병력을 집중함에 따라 동부국은 에크나르프에게 모든 군사력을 투사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준비하고 있었구나!’

동부국은 이를 부득 갈았다. 전대 에크나르프 국왕인 태양왕이 섣불리 패권을 차지하려다 9년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 버둥거리는 것에서 교훈을 제대로 얻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변수가 하나 있었다.

“엘리자. 제 1함대를 이끌고 출전하라. 다만 적극적인 공세가 아니라 병력 수송을 맡은 3함대의 호위임무에 집중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바다에선 무적에 가까운 1급 물마법사가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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