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70화 (71/128)

70화

희망봉의 유령선-7

베르세유 궁전의 대전.

곳곳에 붙은 화려한 장식물과 저 먼 엘프의 나라에서 가져온 도자기들, 반도 도시 국가들의 유수한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상 등이 곳곳에 즐비해 사치라는 단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름다운 장식들이 양각된 벽을 등진 채, 에크나르프 곳곳에서 몰려든 귀족들이 한껏 위엄과 세를 과시하며 모여 있었다.

그들의 발밑 아래층의 홀에서는 간단한 회의 이후 본격적으로 국가의 대소사를 처리할 연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나팔도, 우렁찬 외침도 없이 기사가 투구 밑에서 조그맣게 외친 것이지만 원래부터 조용했던 대전 안이라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터벅거리며 다른 귀족들보다도 훨씬 화려하고 장식이 덕지덕지 달려 과연 저게 실용성이 있는가 의심이 되는 옷을 입은 에크나르프의 국왕이 가발이 비뚤어졌나 살짝 확인하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양손은 옆구리에 살짝 대 외투의 표면에 손바닥을 대고 걸음걸음은 힘있지만 과하지 않게 사뿐사뿐 걸었다. 과연 귀족적인 예의의 중심지인 에크나르프의 국왕다운 자세였다. 고급스러운 붉은 벨벳 카펫을 걷는 국왕의 옆과 뒤에선 하인들이 향수와 꽃잎을 뿌리며 국왕의 걸음걸음을 장식했다.

다른 이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건축, 의상, 몸짓, 말투...... 다 사치고 과시였다. 그것이 국왕이라는 고귀한 핏줄의 특별함을 과시하고 위엄을 드높이는 것이라 여기는 시대기에. 그 누구도 이러한 행태를 지적하거나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그것을 유지하는 근간이 자신들에게서 거둬간 세금임을 알고 있는 백성들조차도 말이다.

가발인 게 티나지 않도록 원래 머리카락 역시 가발처럼 하얗게 물들인 국왕이 옥좌에 앉자, 하인들이 소리 없이 스르륵 빠져나가며 대전의 황금 문짝이 쿵 하고 닫혔다. 기름칠이 매끄럽게 되어 스르륵 닫히는 문인데도 마지막에 큰 소리가 나도록 하는 이유는 그 소리가 ‘지금부터 회의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는 종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시각적, 청각적으로 요란함을 과시한 국왕의 입장이 끝나자, 대전은 다시 고요함이 지배했다.

국왕이 옥좌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는 에크나르프의 유수의 귀족 집안들의 인물들을 쓱 쓸어보았다. 모두가 왕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회의에서 왕이 꺼내는 제일 첫 안건이 바로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으므로.

“......카스테냐의 왕 자리가 공석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왕의 말이 고요함을 깨자 대전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그 말은 온 유로파가 직접 몸으로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국가 간에 일이 풀리지 않으면 칼과 창을 동원한 무력으로 해결하곤 했으니까.

전쟁 한 번에 엄청난 돈이 녹아들어가는 만큼 전쟁 전에 최대한 말로 해결을 하려고는 하지만, 어디 세상이 혓바닥으로만 돌아가겠는가.

무역 문제, 영토 문제, 권리 문제 등등 온갖 안건에 대해 명분과 문서를 들이대며 온갖 꼼수와 물밑협상과 은밀한 거래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런 모든 수를 동원해도 상황이 지지부진하다면, 결국엔 쇠붙이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는 작게는 결투, 크게는 전쟁으로 귀결된다. 개중 가장 전쟁으로의 발달이 잘 되는 안건은 바로 ‘왕위 계승 문제’였다.

나라 하나를 꿀꺽 삼킬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게 홀랑 넘어가 버릴 수도 있는 가장 큰 사건. 국가 간 세력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왕위 계승이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카스테냐 왕에겐 현재 후사가 없다. 그리고 계보 상 짐의 아들이 가장 카스테냐의 왕 자리와 가깝지. 하지만 이 역시 모두들 알다시피, 곧이곧대로 계승되진 않으리란 것, 잘 알고 있겠지?”

카스테냐의 왕조는 본디 에크나르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과거 명분싸움이 촉발시킨 큰 전쟁에서 에크나르프가 패배하면서 카스테냐와 에크나르프 왕조가 완전히 분리되긴 했지만 두 왕조를 연결하는 다리는 아직 건재하다.

현재 유로파 대륙은 큼직한 세력들이 떡하니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는 크고 비옥한 땅덩이를 중심으로 풍요로운 땅이 떠받치는 강한 군사력으로 그 유구한 역사를 지탱해온 에크나르프.

두 번째는 최근 몇 번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한풀 기세가 꺾이긴 했으나 여러 국가에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엘츠아 가문의 동부국.

세 번째는 신대륙 개척으로 한창 위세가 높아지고 있는 카스테냐.

네 번째는 넷 중 가장 저평가 당하지만 무려 동부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이긴 뒤, 주변의 여러 공국들을 꽉 붙잡고 덩치를 키우고 있는 라인 강 너머 라인 연맹의 중심인 프아이서 왕국.

여기에 더해 사사건건 대륙 일에 간섭하는 섬나라 니아트리브까지 포함되어 유로파는 불안하지만 나름 안정적인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다. 비록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며 수년 혹은 수십 년 단위로 꼭 몇 번씩 불이 붙는 도화선이 늘 튀어나와 있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자잘한 충돌은 있었지만 이러한 상호 간의 견제 하에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의 평화의 종지부를 찍을 시기가 되었다는 의미일까, 왕위 계승 문제가 튀어나오고 나왔다.

다른 안건과 달리 왕위 계승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사안이다.

잘못하면 에크나르프와 카스테냐가 하나가 될 수도 있는 상황.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은 명분이고 권리고 무시하고 주먹으로 해결을 볼 게 뻔했다.

“선왕께서 말씀하셨듯, 라인 강과 알프스, 피레네가 에크나르프의 자연 국경이어야 한다는 말은 짐 또한 동의하는 바이다. 허나, 짐은 거기서 피레네는 빼고 대신 지브롤터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스테냐의 맨 남쪽이자 지중해의 관문인 지브롤터가 언급되자, 귀족들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이는 카스테냐를 에크나르프와 병합하겠다는 주장이었으며 전쟁을 하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비록 선왕께서 9년 동안 전 유로파를 상대로 한 전쟁을 치러 곤욕을 겪으셨으나, 짐은 잘못되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카톨릭 국가가 무려 이교도 술탄국을 도와 동부국의 뒤통수를 치려다가, 전선이 확장되며 9년 동안 전 유로파를 상대하게 된 희대의 배신행위를 옹호하는 국왕 루이의 눈동자에서는 전쟁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괴물이 출몰하고 보르도에서 해적으로 인해 나라가 흉흉한 때다. 이는 왕의 권위가 떨어졌으니 에크나르프의 위엄도 덩달아 떨어져 일어난 일이로다. 하여, 짐은 카스테냐의 왕위와 이 나라의 계승을 짐의 아들에게 물려주어 이 나라의 권위를 바로세우고자 하노라.”

타국 대사에게 한 게 아니다 뿐이지 이는 전 유로파를 상대로 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계보 상 누가 봐도 이는 에크나르프와 이 왕조의 권리이니, 아무도 이견을 내지 못하도록 만들겠다.”

주먹으로라도 말이다.

대귀족들의 입맛이 썼다. 전쟁 준비를 해야겠군. 아무래도 이번 연회는 뭐가 나오더라도 맛을 잘 못 느낄 것 같았다.

국왕 루이의 전쟁 선언 이후, 다른 큰 안건들이 오갔다. 주로 전쟁 준비에 관한 의견이었다. 그 이후 세부조정과 자잘한 안건들은 홀에서 주최되는 왕실 주재의 연회에서 술과 음식이 위장으로 넘어가며 이뤄졌다. 산해진미와 아름다운 미술품 사이에서 부대끼는 귀족들의 모습은 사치와 방탕 그 자체였다.

전쟁이 코앞이지만 이러한 ‘의전’이라는 이름 하에 연회를 즐기는 궁을 뒤로 하고, 한 전령이 급히 말을 달려 파리로 향했다.

***

파리의 한 마법대학.

크고 육중한 대학 건물 한쪽에 에크나르프 학파의 특징인 마법사들이 사는 높은 탑이 그 키를 자랑하며 턱하니 붙어 있는 독특한 대학이었다.

대학 중에서도 자연현상과 연금술 등을 연구하는 대학들은 굳이 마법을 전문화한 학과가 없다 하더라도 이처럼 마탑 등 마법 연구 기관을 끼곤 했다.

왜냐면 대학 입장에서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돈과 지식이 둘다 많은 마탑과 같이 연구를 하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마법사 역시 마법 말고도 호기심을 충족하는 연구할 거리가 쌓여 있어 마법사가 아닌 학자들과 교류가 필수이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대학의 유명한 가문 출신 학생들과 교류도 하며 정치적 연계도 할 겸 말이다.

이 마법대학 역시 마탑은 끼고 있지만 마법사를 양성하는 것은 마탑에서 하고, 대학은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그런 대학에, 한 특별한 학생이 있었다.

-저 자가 루스에서 왔다지?

-귀 좀 봐. 으으 징그러워.

-야만인 놈들이 여기 뭐 먹을 게 있다고 기어들어왔대?

최대한 수수하게 보이려 하지만 개성을 차마 버릴 수 없어 알록달록한 복장을 한 귀족 학생들이 대학 정원에 있는 한 학생을 흘끗흘끗 보며 지나치거나 멀리서 뒷담을 벌였다.

‘특별한 학생’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잡고 있는 칼집을 부러질 듯 꽉 쥐었다. 작은 소근거림도 그들에겐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만 들렸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고 평범한 호위병의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은 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그냥 쓴 것도 아니고 귀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앞을 살짝 들어 쓴 형태였다.

그 두 호위기사 앞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있던 ‘특별한 학생’이 타이르듯 말했다.

“일일이 신경 쓰지 말게나. 한두 번 듣나?”

그렇게 말하는 학생의 복장은 장식도 없고 눈에 튀는 색도 아니며 어딘가 약간 후줄근한 티가 났다. 통일된 교복이란 게 없는 이 대학에서는 복장의 값비쌈으로 출신을 판정하는 곳이다. 그런 면에서 이 특별한 학생은 남에게 무시나 괄시당하기 좋은 인물이었다.

이 학생이 가지고 있는 인간보다 뾰족한 귀 형태 때문이라도 더더욱. 호위기사와는 달리 귀를 가리려는 복장이 아니어서 더 그러했다.

“자네, 내가 왜 내 나라를 떠나 머나먼 타국을 전전하는지 아나?”

“......뒤떨어진 루스 공국을 발전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 그래서 니아트리브도 갔다가 레흐텐도 가서 많이 배워왔지. 특히 실용성과 과학 부문에서 말이야. 니아트리브는 참 고맙게도 모의전까지 벌여 줬고, 라인 연맹에서는 군사학을 배웠지. 그럼 여기는 왜 왔다?”

“에크나르프의 발전된 문화와 정책을 수용하기 위함입니다.”

“맞아.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나.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처음 보니까 괴물 보듯 할 수도 있는 거지. 공국에서도 인간 취급은 영 안 좋잖나. 피차일반이야.”

“......”

기사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들 역시 이 특별한 학생을 따라 먼 곳까지 고생하며 온 이른바 ‘개혁파’다.

이들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이 학생을 따라온 이들이 사회 곳곳에서 지금도 열심히 신문물을 배우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고향의 암울한 상황을 연상하게 되는 말을 들었으니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한 기색을 느꼈는지 특별한 학생이 책장을 넘기며 덧붙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돌아가게 된다면 루스 공국은 에크나르프에 버금가는, 아니 더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며 모든 게 개선되게 될 테니까. 귀족들이 바뀌면 밑에도 당연히 바뀌겠지.”

“알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너무 늦은 감이 있어. 너무 늦게 왔어. 적어도 스물쯤에는 왔어야 했는데 쉰이 넘어서야 오다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학생의 모습은 50살이 넘었다기에는 너무나 젊어 보였다. 깔끔하게 깎은 수염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북방 계열의 얼굴형은 그를 당당히 미남이라 부를 수 있게 만들었다. 사교계에 진출했더라면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만들었으리라. 물론 저 귀만 없었더라면.

멀리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꾹 참으며, 그렇게 거슬리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특별한 학생 일행에게 한 인물이 슥 다가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스 공국의 공왕이신 표트르 마그나노프 맞으십니까?”

“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그저 평범한 혼혈 ‘인간’ 학생인데.”

“......에크나르프 국왕 폐하의 명을 갖고 왔습니다.”

조용히 얘기하는 전령. 그 말에 특별한 학생, 표트르의 부드럽게 풀려 있던 눈매가 위로 슥 올라갔다. 모든 일에도 허허거리며 웃어넘길 것만 같던 순한 표정은 순식간에 위엄찬 한 명의 국왕으로 변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지. 앞장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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