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희망봉의 유령선-6
-한낱 인간이 악마의 저주를 버틸 성 싶으냐! 네놈의 영혼은 지옥에 보관하지도 않고 저 먼 하늘로 보내주마!
[이게 다냐?]
-뭐?
붉은 물에 포위되었으나 오히려 킥킥 웃고 있는 소년.
악마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붉은 물감이 퍼지는 속도가 느려지나 싶더니 소년에게서부터 시작된 검은 물감이 도리어 붉은 기운을 차례차례 잠식해 나갔다.
[이게 저주라면, 내가 제대로 된 걸 보여주지!]
-이, 이게 대체!
소년의 기운은 굶주린 들개 떼처럼 악마의 기운을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잎사귀가 순식간에 누렇게 물드는 것을 시간을 빠르게 감아 가속시킨 것처럼, 붉은 물의 거인이 검은 물의 거인으로 변색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형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검은 기운은 다른 색의 물감 위에 검은 물감을 잔뜩 짜내 섞듯, 악마의 힘을 모조리 덮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몸 전체를 저주의 기운으로 만들어버렸다가 도리어 소년에게 모조리 먹혀 버리자, 악마에게 남은 것은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몸뚱아리뿐.
“이건, 이건, 설마......”
거인의 주먹 안에 갇힌 신세가 된 악마는 처음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가고 몇 달은 굶은 듯 비쩍 마른 몰골을 한 채 망연자실했다. 너무나 허무한 패배였다.
[무슨 저주인지도 몰랐네.]
소년이 크흐흐 하면서 조롱을 한껏 담아 비웃었다.
[자, 마지막 유언은?]
“......”
악마의 몸은 눈이 물에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힘을 대부분 잃고 나머지 역시 소년에게 잠식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예언의 그놈이구나.”
해골처럼 움푹 들어간 눈에서 마지막으로 눈빛을 빛내며 악마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언?]
악마는 경전을 외듯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이전의 세상을 멸망시킬 잘못 태어난 별의 사생아가 이 땅 전부를 자신의 힘으로 뒤덮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땅의 아이들은 모순이 해결될 때까지 지하에서 숨죽여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지나면 모두가 자......”
[그게 무슨 뜻이......]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못했다. 악마는 문구를 다 읊지도 못한 채 완전히 힘을 다해 흩어져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라지는 악마의 마지막 모습은 꼭 미소를 짓는 듯 편안한 표정이었으니까.
‘일단 흡수부터 하자.’
검게 물들어 소년의 힘과 하나가 된 악마의 힘이 소년에게 흘러들면서 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온몸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더운 날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날카롭고도 시원한 느낌이 소년을 감쌌다.
소년의 힘에 잠식된 악마의 힘이 일제히 몰려들면서 소년의 타버렸던 몸을 급속히 재생시키고 내면 역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악마의 기운이 유입되자, 강 속에서 가장 거대한 바위가 몸을 뒤척이듯 몸을 굴렸다. 수많은 자갈과 그 밑의 흙이 들썩거리며 강물을 흙탕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사탄과는 달리 이번 악마는 영혼을 그대로 씹어 삼킨 게 아니라 소년의 힘으로 잠식시키는 가공단계를 거쳐서인지 저번만큼의 거부감은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소년은 유령선을 만들고 지역 전체를 바꾸어버린 불가해한 악마의 힘을 이해하게 되었다.
***
폭풍우를 일으키는 주체인 악마가 사라져서인지 어느새 비바람은 그치고 먹장구름만이 하늘을 뒤덮고 있게 되었다. 물의 거인에서 빠져나온 소년이 플라잉 레흐텐의 선수에 내려앉았다. 소년의 뒤로 물의 거인은 거대한 폭포수가 되어 굉음을 내면서 사라져갔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악마를 죽일 줄이야......
슈트라센 선장이 검은 안개에 감싸인 소년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유령선원들 역시 음산한 환호를 질렀다. 자신들을 이승에 묶어두고 있었던 쇠사슬이 사라졌음을 느낀 것이다.
“별거 아니었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악마의 힘은 강했다. 저걸 어떻게 이겨야 하느냐란 말이 절로 나올 법한 존재였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저주의 통제권을 모조리 빼앗을 수 있는 존재가 있으리라곤 악마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정말 대단했어.’
빈민가에서 마법사를 잡기 위한 함정을 파놓을 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힘이 달려 자신이 그동안 퍼뜨려 놓은 힘의 잔여물들을 이용해야 했다. 이후에 소년의 힘이 성장하여 니아트리브와의 해전에서 끝없이 저주를 남발하기까지 했지만 아직까지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해역 전체를 덮고 있던 끝이 안 보일 정도의 막대한 힘의 고삐를 잡고 조종하는 그 느낌이란!
거대한 거인의 머리에서 강대한 힘을 품은 채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는 드넓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충만감과 성취감은 한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점점 힘을 더 키워 간다면 그 전율을 또 느낄 수 있겠지. 소년은 새삼 이렇게까지 성장한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며 시체 해적선장이 건네는 옷을 입었다.
하지만 마냥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전의 세상을 멸망시킬 잘못 태어난 별의 사생아가 이 땅 전부를 자신의 힘으로 뒤덮을 것이다.
소년은 악마가 남긴 마지막 말 중의 일부를 떠올렸다.
‘세상을 멸망시킨다라......’
씁쓸했다. 악마마저 알고 있는 자신의 운명이라.
그걸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거늘, 벌써부터 멸망 운운하는 말이나 듣고 있다니.
-정말 고마워.
머리와 팔을 다시 붙인 슈트라센 선장의 체구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유령들의 눈에서 번쩍이던 붉은 안광은 다 사라져 있었다.
-자. 받아. 이 해역을 지키면서 본의 아니게 챙긴 물건들이야. 악마는 그 어떤 배도 희망봉을 못 넘어가게 했거든. 대부분 폭풍우로 가라앉았지만 그걸 뚫고 가려는 큰 배는 우리로 제거하게 했지. 여기에 해도도 있고 하니 끊긴 바닷길도 다시 복구할 수 있을 거다.
슈트라센 선장이 유령 선원들을 시켜 육중한 상자를 내밀었다. 시체 선원들이 소년의 손짓에 대신 받아 바다의 진주 호의 갑판으로 상자를 옮겼다.
-악마의 저주가 좀 있긴 하지만, 악마를 처치한 너라면 잘 쓰겠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줄어들며 평범하게 생긴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슈트라센 선장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면서 햇살이 한 줄기씩 틈으로 새어나와 바다를 비추기 시작했다.
-이제 갈 시간이 되었어. 제발 신께서는 이 죄 많은 몸을 용서해주시면 좋겠네.
눈을 스륵 감은 선장의 몸이 한층 더 흐릿해지면서 빛의 입자가 되어 구름을 뚫고 들어온 햇빛의 기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른 선원들 역시 선장과 같은 변화를 보이며 사라져갔다.
소년은 그들을 잡지 않았다.
악마에게서 유령을 소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도 하고, 백 년 동안 고생한 이들에 대한 ‘배려’였다. 빈민가 밖의 개념을 익히고, 브란트의 희생을 몸소 겪으며 소년의 내면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쟁여둔 영혼은 어차피 많으니까. 이 정도는 놔줘도 괜찮겠지.’
그렇게 속으로 변명하며 소년은 바다 여기저기서 빛의 기둥이 내려오는 장엄한 광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우드득
갑판 위의 유령선원들이 사라지자 유령선 플라잉 레흐텐은 시간을 빨리 돌리듯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소년과 시체 선원들이 서둘러 바다의 진주 호로 옮겨 탔다.
빠득거리며 배의 바깥쪽부터 나뭇조각으로 잘게 부서지며 유령선에 물이 차오르면서 서서히 기울어지자 선수가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보우스프릿 밑의 여러 해골들이 뭉친 기분 나쁜 선수상이 햇빛을 받아 화르륵 불타올랐다.
소년은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유령선에게 희생된 선원들의 영혼이 그 선수상 안에 갇혀 있었음을. 그 많은 영혼들이 하늘로 승천하며 홀가분한 웃음과 고마움을 소년에게 전달했다.
그 감정이 전달될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풍기는 향과는 색다른 느낌이 소년의 마음을 간질였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영혼들의 행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햇살 속에서 백 년의 시간을 고통 받은 영혼들이 사라져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
유령선을 만든 악마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과연 저 감사인사를 받을 자격이 되는 걸까. 죄책감은 아니었지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뭉친 어깨 같은 불편함이 소년의 내심을 쿡 찔러왔다.
선수상을 태우는 불은 유령선의 선수가 완전히 물에 잠기기 직전까지도 타오르며 선수상을 깔끔하게 전소시켰다. 모든 영혼이 떠난 뒤 검은 바닷속으로 부서지면서 천천히 녹아드는 배를, 소년은 끝까지 바라보았다.
***
에크나르프의 수도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살짝 떨어진 에크나르프의 대도시 베르세유.
‘파리가 사회적 수도라면, 베르세유는 정치적 수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에크나르프 정치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베르세유에는 원래는 사냥 별장이었다가 왕이 거주하는 정식 궁전으로 인정받게 된 베르세유 궁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전대의 국왕인 ‘태양왕’ 시절 돈을 아낌없이 부어 만든 베르세유 궁전은, 돈을 쏟아 부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태양왕은 수도 파리보다 베르세유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현 국왕 역시 베르세유에서 태어나 자란지라, 실 수도인 파리보다 더 친숙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베르세유는 천도 아닌 천도를 한 모양이 되어 수도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런 짧고도 굵은 역사를 지닌 베르세유 궁전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수많은 사치스런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맨 앞에서부터 귀족들이 호위를 받으며 내리고, 그들은 궁전의 정문에서 에크나르프 왕실 기사단의 검증을 받고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조금씩 떨어지듯이 하나둘씩 궁 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문을 넘어, 베르세유 궁으로 향하는 넓은 정원 가운데에는 초대형 분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분수의 맨 가운데에는 사람 다섯 명은 족히 가져다 놔야 겨우 머리에 닿을까 말까 한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그 석상을 찬양하듯 주변부의 석상들에게서 초대형 석상을 향해 물이 뿜어지며 무지개를 수놓았다.
놀라운 것은 그 초대형 석상이 왕의 석상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에크나르프의 왕궁 한복판에 왕 대신 자리 잡은 석상은, 과거 에크나르프와 니아트리브와의 지긋지긋한 백년 전쟁에서 신의 명을 받고 에크나르프를 구한 고귀한 성자, 아르크의 잔느를 기리는 석상이었다.
갑옷을 차려입고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이 칼에 손을 대고 있는 석상의 모습은 누구라도 경외심을 보일 정도로 웅장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베르세유 궁전의 정원을 지나며 분수대를 지나치던 한 귀족이 푸념했다.
“뭐가 그리도 언짢나?”
같이 가던 귀족이 물었다.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대 에크나르프의 궁전에 임금의 석상이 아니라 전설인지 아닌지도 신빙성이 부정확한 여자를 떡하니 세워 놓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불만을 토로하는 걸 보니 그 두 귀족은 상당히 친한 모양이었다. 무언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는 건 사교계에서 어떤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는 일이기에, 같은 계파거나 친분이 있지 않은 한은 그런 불만을 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전대 폐하께서 좋아하시던 인물 아닌가. 여기도 따지고 보면 궁전이 아니라 원래 별장이라 취향을 담아 만든 거였고. 태양왕께서 한낱 별장이 궁전 취급 받을 줄 아셨겠나.”
“당장이라도 갈아치우자고 얘기하고 싶지만, 그렇다기엔 현왕께서 아끼시는 곳이라 말을 꺼낼 수도 없으니 참 답답하다네......”
“그래도 따로 설명하지 않으면 그저 늠름한 기사의 상이니 생각을 바꿔보는 게 어떤가? 투구도 쓰고 있겠다, 전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그저 에크나르프를 상징하는 기사의 상이라 생각하는 거네.”
“말이야 쉽지......”
투덜대는 귀족과 그 귀족을 하하거리며 달래는 귀족을 스치고 지나가는 또 다른 귀족이 있었다. 그 귀족이 걸으면서 내는 요란한 쇳소리에 다른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귀족은 왕실의 정사를 논하는 연회에 참석하는데도 연회복이 아닌, 무려 전신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허리에도 장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와야 하는 왕궁에서 어찌 저런 복장이 가능하단 말인가!
한 귀족은 한번 이와 같은 이유로 불만을 토로했으나.
“귀가 어둡나 보구려. 보르도가 해적에게 습격을 받았단 얘기도 못 들으셨소?”
보르도에서 몇 달 전에 일어난 대참사. 수천에 달하는 이가 죽고 시체가 산같이 쌓여 있었다는 그 끔찍하고 믿기 힘든 소문은, 모두가 쉬쉬하고는 있었지만 귀족 사교계에선 그게 단순한 해적의 습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르도 공작이오. 그 이후로 반드시 원흉을 찾아내겠다고 언제든지 출정 준비를 하겠다며 갑옷을 입고 다닌다 하던데, 그 소문이 사실이긴 했구려.”
그리고 최근 들어, 니아트리브에서 사령술사를 퇴치했다는 소문이 사교계를 돌면서 에크나르프의 자존심은 바닥을 찍었다.
에크나르프를 공격한 적을 직접 잡아 죽이지 못하고 앙숙인 니아트리브가 잡았단 얘기 아닌가!
“그 얘기에 보르도 공작이 한 번 실신했다 하던데.”
기사도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고 귀족 예법의 기준을 만드는 에크나르프다. 에크나르프 귀족에게 ‘명예’란 것은 목숨보다도 귀한 것.
원수를 직접 죽이지 못했다는 것은 명예가 실추되고 체면이 크게 상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원수가 앙숙인 국가에게 죽었다는 것이니 충격은 더할 것이다.
“허어, 제보당에서 괴물이 출몰해 수백이 잡아먹혔다고 하던데 해적까지...... 이 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원.”
이밖에도 에크나르프 곳곳에서 몰려드는 소문과 안건을 한껏 안아든 채, 귀족들이 베르세유 궁으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