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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68화 (69/128)

68화

희망봉의 유령선-5

갑자기 난데없이 바다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건방진 인간 놈의 술수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기다려줄 줄 아느냐!

거대한 주먹이 위로 솟아오르는 물의 덩어리를 직격하고 큼직한 구멍을 냈다. 그러나 물은 물이라 그저 구멍만 뚫릴 뿐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며 계속해서 커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윽고 악마의 눈앞에 나타난 건 물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거대한 거인이었다. 수면 아래에서부터 몸통을 타고 소년이 머리 부분으로 스윽 올라왔다. 마치 미라처럼 안개로 전신이 감싸여진 채 붉은 안광만 드러낸 소년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소년이 이 정체불명의 폭풍우 지대 안으로 들어올 때 느꼈듯, 바다에는 악마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분명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고 있었는데 폭풍우 해역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가시거리 안에 늘 있던 에프레카 대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소년은 단순히 악마의 저주로 날씨가 변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 해역 전체가 일종의 저주로 형성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주는 내 영역이기도 하다.’

소년은 저주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이 바다 전체도 일종의 저주다. 그것도 악마의 힘이 담긴 저주.

그렇다면?

‘내 힘엔 악마의 힘도 포함되어 있지. 그걸 이용해 주도권을 빼앗아와야겠다!’

그 시도를 한 증거가 바로 아까 바닷속으로 빠졌다가 바닷물이 해골 형상이 되며 소년을 바깥으로 뱉어낸 것이었다. 소년이 악마의 저주가 담긴 바다의 일부를 조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악마가 거대해졌을 때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저걸 어떻게 잡지?

하지만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소년은 거대화된 악마의 충격파를 피하느라 바닷속으로 잠수했다가 물이 돌처럼 딱딱해지며 그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건 오히려 소년에게 도움이 되었다. 물을 굳히면서, 악마는 이 해역을 이루고 있는 힘, 즉 저주의 밀도를 높인 셈이었다. 즉, 소년은 악마의 도움으로 손쉽게 더 많은 양의 저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규모를 키운 결과가......

[자, 이제 덩치도 비슷하니 다시 한 판 해보자!]

붉은색의 악마와 같은 덩치의, 웬만한 도시쯤은 한 발로 뭉개버릴 거대한 물의 거인이었다.

-죽어라!!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크로스 카운터!

물의 어마어마한 질량이 담긴 주먹이 악마의 얼굴을 강타하고 마찬가지로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는 악마의 주먹이 물의 거인의 머리 절반을 날려버렸다.

당연하게도, 피해는 악마만 입었다. 물의 거인은 금방 몸을 수복하며 다른 쪽 팔로 악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때리고, 꿰뚫고, 잡아뜯는 야만적인 몸싸움이 이어졌다. 몸이 작았을 때의 짧고 정교한 격투는 커진 덩치 때문에 불가능했다. 바닥을 구르는 것을 제외한 모든 싸움 기술이 동원되었다.

찌르고, 물고, 때리고, 뜯고, 걸고, 심지어 손날로 거인의 일부를 팍하고 베어내는 수법까지!

양측은 서 있는 자세에서 가능한 싸움의 수법은 모조리 동원했다. 그 수법만 하나하나 따져 보면 추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 둘의 거체를 생각해 보라. 사소한 동작 하나도 도시의 한구석을 초토화시킬 수도 있다. 보는 입장에선 절로 살이 떨리는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바다 위의 두 거인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떠 있는 존재인 두 선박은 두 괴수의 싸움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 바쁘게 저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얌전히 죽어라, 인간 놈아!

[얌전히 영혼을 내놔라 악마 놈아!]

천둥 같은 고함과 거체. 그리고 이따금씩 뿜어지는 악마의 붉은 광선과 휘둘러지는 거대한 물의 채찍. 마치 거대한 신적 존재끼리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지중해 지역에서 암암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의 신화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거신들과 지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신들과의 싸움이 벌어지며 생겨난 것이 지중해라고 설명하곤 한다.

그 신화 속 싸움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악마와 소년의 싸움은 거칠고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파공성을 울리는 주먹질에 하늘에 뜬 먹구름이 흔들렸고 서로를 가격하는 그 충격파에 장대비가 일렁였다.

-이노오오옴!

여기저기 얻어맞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악마가 양팔을 벌리고 거칠게 달려들었다.

파악!

붉은 피부 아래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악마의 팔과, 물이 계속해서 표면을 소용돌이치는 물의 거인의 팔이 서로를 맞잡았다. 그 충격만으로 커다란 해일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 해일에 바다의 진주 호가 뒤집어질 뻔했으나 파도에 영향 받지 않는 플라잉 레흐텐 호에 갈고리를 걸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붉은 거인과 물의 거인이 서로 양손을 잡고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악마의 붉은 근육이 불뚝거리면서 핏줄이 한껏 돋아났고, 물로 만들어진 팔은 물이 계속 집중되어 밀도가 높아져 새까맣게 변했다.

-크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

둘 다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악마의 거대한 송곳니가 드러났고, 입술이 타버려 고스란히 드러난 소년의 치아 역시 꾸물거리는 안개 사이로 하얗게 엿보였다.

둘이 끝장날 때까지 이어질 것 같던 힘겨루기는 소년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끝났다. 허리까지 잠긴 악마의 배 바로 코앞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물의 주먹이 생겨난 것이다.

소년의 물의 거인은 물에 함유된 저주를 장악해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굳이 팔이 두 개만 있을 필요가 없다.

-크헉!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악마의 복근을 소년이 만들어낸 저주가 가득 담긴 물의 주먹이 강타하자 힘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붉은 산이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죽어!]

양손을 붙잡고 같이 쓰러지면서도 소년은 거인의 목 부위에 물로 이뤄진 조그만 두 팔을 새로 만들어 악마의 양 뿔을 잡고는 힘차게 악마의 안면을 향해 또 새로 만들어낸 팔의 팔꿈치로 내려찍었다.

악마가 눈과 입에서 붉은 광선을 뿜어내 내리꽂히는 팔을 증발시켰지만 구멍만 뚫리고 그마저도 금방 수복되었다.

뻑!

물이 한없이 압축되어 얼음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빙하보다도 단단해진 팔꿈치가 악마의 얼굴을 기어이 찍고 말았다. 마치 깃털을 잔뜩 넣은 베개라도 된 것처럼 악마는 얼굴이 움푹 들어간 채 바다 위에 철퍽 누웠다. 붉은 거체가 수면과 만나며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이 해역 전체가 악마의 저주로 인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이 맞는지, 분명 아까는 악마의 허리까지 잠기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악마가 누웠는데도 몸통의 중간만 살짝 잠기는 것으로 끝이었다. 파도 역시 거체가 무너졌다기엔 너무 낮게만 일었다.

-크아아아아!

화가 날 대로 난 악마가, 악마가 쓰러지면서 같이 따라오느라 허리가 길게 늘어난 물의 거인의 허리를 다리를 휘둘러 끊어냈다. 바닷물 속에 잠겨 있던 다리의 형상은 인간의 다리와는 달리 끝이 쐐기처럼 뾰족하고 납작해 마치 발 대신 칼날이 달려 있는 형상이었다.

바다와 연결되어 있던 거인은 허리가 끊기자 중력에 이끌려 훅 아래로 꺼졌고 악마는 침대에서 허리를 튕겨 일어나듯 벌떡 상체를 일으켜 키가 줄어든 거인의 머리 부분을 후려쳤다.

펑하고 대포알이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악마의 감각에는 주먹에 물 말고 다른 게 닿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이 물을 움직여 자신의 위치를 머리에서 몸통 부분으로 옮긴 것이다.

사방이 물인 곳이라 형체를 잃고 일그러졌던 물의 거인은 금방 몸을 복구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양팔을 교차한 악마가 물의 주먹을 막았으나 물의 거인의 팔은 두 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컥!

커다란 물의 팔과 함께 날아온 다른 작은 팔들이 악마의 옆구리와 배를 강타했다. 입을 쩍 벌리고 충격을 받은 악마가 쿵쿵거리며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럴 수가, 어째서, 어째서!’

악마의 머릿속은 분노와 굴욕으로 뒤엉켰다. 어째서, 본신인데도, 어째서 저따위 부스러기가 이렇게나 땅의 피조물을 몰아붙일 수 있단 말인가!

[겨우 이 정도냐? 더 힘을 써봐. 악마니까 저주 같은 것도 잘 걸 거 아냐.]

악마가 저주를 건다는 구전이 많은 것을 빗대 소년이 비웃었다.

-저주? 오냐, 소원대로 해주마!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이 없어서인 걸까, 악마는 너무나도 손쉽게 도발에 걸려 넘어갔다. 형체도 없는 물을 상대로 육체적인 싸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기도 했다.

‘말 잘했다. 네 입을 원망해라!’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악마의 그 큰 덩치는 어마어마하게 큰 붉은 구름 덩어리로 순식간에 변화했다. 폭풍우 해역에 깃든 저주마저도 끌어 쓴 온 힘을 다한 저주의 덩어리!

잡을 수 없는 형체가 된 악마가 물의 거인을 감싸고, 물에 붉은 물감을 풀어버리듯이 물을 붉게 점령해 갔다.

-한낱 인간이 악마의 저주를 버틸 성 싶으냐! 네놈의 영혼은 지옥에 보관하지도 않고 저 먼 하늘로 보내주마!

[이게 다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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