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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66화 (67/128)

66화

희망봉의 유령선-3

말간 태양빛 대신 구름 사이에서 번쩍이는 창백한 번개가 가장 밝은 광원인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

두 척의 배가 맞붙은 채 불가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평소에 으어어거리며 흐느적거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상대를 향해 내달리는 시체들의 몸놀림은 몹시 빨랐다. 시체를 향해 마주쳐가는 유령들 역시 바닥을 딛는지 허공을 딛는지 모를 발을 바삐 놀렸다.

빗물에 젖은 칼날과 도끼날이 번들거리며 내리 찍혔다. 시체 선원들에게선 검은 피가, 유령선원들에게선 안개 같은 입자가 흩날렸다.

완전히 젖어 사용하지 못하는 시체 선원들의 총은 뽑히지 못했다. 대신 유령선원들의 머스킷 권총은 신기하게도 뻥뻥 불을 뿜었다. 옛날 배라 권총 역시 구식이었다.

퍽퍽거리며 검은 피가 튀며 시체들에게 구멍이 생기고, 총알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시체들이 배 사이를 넘어 유령들과 함께 갑판을 뒹굴었다. 유령 역시 난간을 뛰어넘고 돛대에서 뛰어내리며 시체에게 달라붙었다.

죽지 않는 이들과 죽지 못하는 이들, 거기서 거기인 이들이 서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서로를 죽인다는 불가능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의미 없는 싸움을 지속했다. 검푸른 안광과 붉은 안광이 번개로 이따금씩 밝아지는 어둠 속에서 뒤엉켰다.

-으하하하! 무섭구만 무서워!

양측이 치열하게 맞붙는 갑판의 위쪽 허공에서 붉은 빛이 쫘자작 공기를 찢는 섬뜩한 소리를 토해냈다. 사방으로 비산한 번개줄기들은 유령선의 돛에 구멍을 더했고 여기저기에서 조그만 폭발을 만들어냈다. 갑판 위에 길쭉한 무언가가 쿵하고 떨어졌다.

커다란 팔뼈였다.

맞붙자마자 살짝 날린 번개 줄기에 슈트라센의 팔 한쪽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절단면에서는 붉은 번개 불꽃이 지직거리며 스친 자리를 그슬리고 있었다.

-붉은 핏빛 힘이라. 놈과 같구나, 너도 같은 녀석이냐?

“아니.”

소년은 슈트라센 선장을 마주본 채로 허공에 떠 있었다. 허공에 뜨다니! 마법사들이 보면 기함을 지를 법한 광경이었다. 공기 마법을 극한으로 이룬 마법사라 한들 공중에 자신의 몸을 띄우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건 그것대로 신기한 일이로군! 그놈들도 아니고 귀도 뾰족하지 않으니 그럼 분명 인간일 텐데, 그놈들의 힘을 쓰다니!

“한 놈 잡아먹었거든.”

-으하하하하! 가면 갈수록 재밌어지는구나! 그럼 내 하나 부탁하지!

“말하도록.”

-말투가 아주 공작님 저리가라로구나. 놈도, 잡아먹어다오.

뼈만 남은 턱이 으득하고 이 가는 소리를 냈다. 벌써 백 년 가까이 폭풍우 속을 떠돌며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놈을 집어삼키는 걸 내 앞에서 보여주시오! 소년은 유령의 탄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려고 왔다.”

-으하하하!

슈트라센은 대답 대신 광인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길쭉한 팔다리를 뻗어왔다. 날카로운 손뼈가 소년을 찢어발길 듯 휘둘러졌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은 기사라 할지라도 저 방패보다도 큰 손에 받히면 멀쩡하진 않을 듯했다.

소년은 몸을 살짝 뒤틀어 공격을 피하고는 새가 나뭇가지 밑으로 날아다니듯 길쭉해 빈틈이 많은 선장의 팔 아래로 휙 빠져나갔다. 그리고 등 뒤에 작렬하는 새빨간 지옥의 불길.

다 찢어진 외투가 완전히 불살라지며 너머의 새까맣게 타버린 갈비뼈와 척추가 그대로 드러났다.

-으하하! 아프구나, 아파! 하하하!

이 얼마 만에 느끼는 감각인가! 죽은 뒤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영혼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의 입에서는 비명보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이 저주받은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며 다시 돌진하는 뼈만 남은 손. 소년은 피하지 않고 친히 자신의 몸만한 손뼈의 마디를 콱 잡고선......

“허, 세상에나.”

갑판에서 싸움을 벌이던 소년의 시체 해적선장이 그 광경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쿠르릉!

천둥과 함께 번쩍하고 번개가 치고, 사방이 밝아지면서 순간적으로 긴 그림자를 남겼다. 동시에 시체 해적선장의 눈동자에, 허공에서 번쩍 들리고 있는 거인과 그걸 들고 있는 조그만 소년의 모습이 낱낱이 새겨졌다.

쿵하는 소리와 동시에 빠드득하고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소년이 슈트라센의 손을 잡고 허공에서 갑판으로 패대기친 것이다.

-으허허허, 장난 아니구만! 그 조그만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컥!

갑판에 큼직하게 뚫린 구멍에서 머리만 내민 채 웃어대던 슈트라센의 목이 꺾였다. 소년이 떨어지면서 머리에 강력한 발차기를 먹인 것이다. 그 충격으로 슈트라센의 경추가 완전히 아작나며 갑판 위에 커다란 머리통이 툭 떨어졌다.

그 순간부로 전투가 끝났다. 선장이 완전히 무력화되자 유령선원들이 슬쩍 물러났고 소년도 동시에 시체 선원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소년은 플라잉 레흐텐의 선수부를 바라보았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안개가 뭉클뭉클 모이더니 일순간 흩어졌다. 그곳에는 낯선 옷을 입은 붉은 피부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난장판이로구나.”

양쪽 관자놀이에서 하늘을 향해 불쑥 솟은 검은 뿔이 인상적인 존재였다.

대학 교수나 마법사처럼 굵은 테를 가진 안경을 쓰고, 몸에는 번들거리는 낯선 양식의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귀족가의 집사처럼 날이 서 있는 단정하고 절제미가 돋보이는 복장.

검은 외투는 배 부분의 단추 세 개로 꼭 잠겨 있었고 푹 파인 가슴 안쪽으로 보이는 흰 셔츠와 그 앞의 목에서부터 배로 내려오는 요상한 검은색 마름모꼴 천이 셔츠의 단추 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뭐로 만든 건지 반짝거리는 가죽신발을 신은 ‘악마’가 쏟아지는 장대비를 증발시키며 몸에 한 방울의 물도 묻지 않은 채 터벅터벅 걸어왔다.

“이름도 없는 유령아. 내가 이 폭풍우 속을 지키라 했지, 지라 했느냐?”

-으흐흐흐, 힘이 안 되는 걸 어쩌겠소. 애초에 힘을 듬뿍 주시든가.

목만 남아 갑판을 뒹구는 슈트라센 선장이 낄낄거렸다. 그 붉은 안광을 마주하던 악마가 볼 가치도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려 소년을 마주했다.

“네놈은 뭐지? 마법사인가?”

“그러는 너는 악마냐?”

“그래. 내가 너희가 부르는 악마다. 여기 온 용건이 뭐지?”

“널 만나러 왔다.”

“오, 원하는 것이 있나? 그렇다면 잘 찾아왔다. 이런 험난한 날씨를 뚫고 왔다니 오랜만에 보는 강단 있는 인간이야. 원하는 게 뭔가?”

“원하는 거?”

소년이 겁도 없이 터덜터덜 다가왔다. 평범한 사람보다 한 뼘 정도는 큰 키의 악마의 앞에 선 소년이 악마의 목에 걸친 이상한 검고 긴 천쪼가리를 확 잡아당기며 상체를 강제로 숙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네놈의 영혼.]

팍!

“건방진 놈.”

소년의 손길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선 악마의 붉은 눈이 지옥의 불길을 머금은 것처럼 붉어졌다.

악마의 새빨간 피부를 타고 한 줄기의 땀이 흘러내렸다.

‘뭐였지?’

방금 그 소름끼치는 목소린 뭐야? 아니 그보다, 내가 저 꼬맹이의 손에 숙여졌다고? 넥타이가 잡아당겨지는 순간 느껴진 힘. 그 힘은 악마인 자신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평범한 놈이 아니구나. 원하는 게 뭐냐.”

“말했잖아. 네놈의, 악마의 영혼이라고.”

파지직

소년의 왼손 안에서 모든 걸 지져버릴 듯한 섬뜩한 번개의 구체가 나타났다. 피처럼 붉은 빛깔의 번개. 단순한 빨간색이 아니라 불길함이 느껴지는 저 빛깔! 저건 분명 악마의 힘이었다.

“너...... 으하하하하하!”

악마가 이마를 부여잡고 웃었다.

“설마, 설마 사탄입니까? 부스러기에게 대차게 깨지고 어딜 가서 숨었나 했더니, 으하하하하!”

지상에 나간 악마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지상에 나가 있는 악마 중에 소재가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악마는 현재는 사탄뿐. 설마하니 이런 인간 마법사의 꼴로 숨어 살고 있었을 줄이야! 몸이라도 뺏은 건가?

새로이 사탄의 직위를 부여받은 놈이 별의 사도를 죽이겠답시고 지상으로 나간 것부터 불안하다 싶었는데 이건 상상 이상으로 처참한 꼴이 되었지 않은가!

“으하하! 성녀를 죽이는 데 실패한 분께서 어쩌다가 인간의 몸에 빌붙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처량하십니다! 원래부터도 당신네 가문은 덜떨어진......”

하지만 악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소년이 강력한 붉은 번개를 쏘아냈기 때문이었다. 번개는 선수부의 위쪽을 깨끗하게 밀어버리고 사라졌다.

“해보자는 겁니까?”

악마는 어느새 작은 돛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말했잖나 악마야. 난 네놈의 영혼을 원한다고!]

도중에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바꾸며 외친 소년이 악마에게 뛰어들었다. 갑판을 박찬 조그만 육신은 어느새 번개가 소용돌이치는 붉은 불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미친놈이! 우리끼리의 싸움은 금지란 걸 모르는 거냐!”

소년의 돌진에 쾅하고 악마가 있던 돛대가 완전히 으스러져 파편으로 흩어졌다. 돛이 한낱 천쪼가리가 되어 갑판 위에 나동그라졌다. 다시 선수로 내려앉은 악마가 이를 으득 갈았다.

“정 죽기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는 수밖에!”

악마의 눈에서 불길이 타오르며 귓구멍으로 산불처럼 검은 연기가 삐익 피어올랐다. 팔뚝만한 뿔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선 입을 쩍 벌리자 붉은 광선이 유령선 돛대 위의 소년에게 뿜어졌다.

소년은 너무 빨라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법한 광선을 용케 피했으나 광선은 악마의 고개에 따라 소년을 뒤쫓아왔다. 조그만 돛대 뒤의 주 돛대의 위쪽이 광선에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고, 비바람에 흩날렸다.

한 마리 새처럼, 소년이 불과 번개를 두른 채 허공을 휙 유영하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구름에서 번개가 칠 때, 그 번개를 끌어와 낙뢰로 만들어 선수에 내리꽂았다.

번개 마법에 속하기는 하나 시도하려고 하는 이는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는, 제어가 어려운 자연적으로 생겨난 번개를 조종하는 수법이었다. 번개는 소년의 손에 닿자마자 붉게 변모하며 플라잉 레흐텐의 선수를 뚫고 수면에 닿았다. 파편이 이리저리 튀고 낙뢰가 떨어진 바닷물이 하얗게 빛을 내뿜었다.

“크아아아! 네놈이 정말로!

선수를 박살낸 번개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소년의 옆으로 악마가 솟아올랐다. 단정한 복장은 주름이 가득 지고 비에 푹 젖어 있었다. 얼굴 역시 계약을 이행하는 냉정한 모습은 다 갖다 버리고 말 그대로 악마와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서로를 코앞에 마주본 채 공중에서 인간과 악마의 격투가 벌어졌다. 퍽퍽거리며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둘 사이를 울리며 주먹과 무릎과 발등이 교환되었다.

눈에 잡히지도 않는 빠른 속도의 손과 발. 서로가 서로의 공격을 팔다리와 손으로 막으면서 마치 서로 짠 것처럼 보이는 공수교환이 이루어졌다. 팔이 하나밖에 없는 소년은 허공에 뜬 이점을 살려 팔 대신 다리를 자유로이 쓰며 악마를 공격했다.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바닥을 만든 것처럼 움직이는 소년의 능수능란한 공격에 악마의 공격은 번번이 막혔다. 그렇다고 소년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둘의 실력은 엇비슷해 서로에게 제대로 된 유효타를 먹이지 못하고 수십 합에 달하는 권격이 서로를 스쳐갔다.

‘사탄이 이렇게 싸움을 잘했나?’

옛적부터 사탄이란 직위는 늘 나사 하나 빠진 멍청한 놈이 맡았다. 하지만 머리는 좀 이상하더라도 마법의 종주라 할 수 있을 만큼 마법만큼은 자신 있어 하는 놈이, 아무리 약해졌다 한들 자신의 장기를 버리고 맨손격투라니?

‘뭔가 숨기는 게 있다. 그걸 꺼내기 전에 승기를 잡아야 해!’

다소 급한 마음에 악마는 힘을 모아 자세가 큰 공격을 감행했고, 소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악마의 회심의 일격은 맥없이 소년의 뺨을 스치는 성과만을 이루었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광대 부위의 피부가 쫙 벗겨지며 싸한 통증이 올라왔다. 소년은 통증을 참으며 뻗어진 악마의 팔을 붙잡고 꺾으려 했다. 악마도 그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른 쪽 팔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부수려 하는 악마의 공격을, 소년은 다리에 강맹한 힘을 실어 복부로 내뻗어 악마의 한쪽 팔을 방어로 돌리도록 강제했다.

서둘러 소년의 발차기를 흘려보낸 악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 막으면서 느꼈지만 힘이 장난이 아니다!

“마법이나 쓰면서 빌빌대던 놈이 제법이구나!”

그러자 화답하듯 덥석 하고 팔을 깨무는 소년. 악마는 기가 막혔다.

“체면조차 버린 거냐!”

소년도 이런 방식은 맘에 들지 않았다. 귀족적이지 못했지만 어쩌겠는가. 이기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데. 어차피 이 귀족적이지 못한 걸 보고 비웃을 이는 여기에 없으니 상관없다. 소년의 입가에 주름이 가득 졌다. 으득거리며 악마의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옷 위로 들려왔다.

“크아악!”

소년을 떼 내기 위해 입에서 광선을 내뿜으려는 악마.

소년은 붙잡고 있던 왼팔과 입을 재빨리 빼고 악마의 면전에서 붉은 번개 구체를 터뜨렸다. 악마와 소년의 사이에서 각자가 만들어낸 붉은 기운의 방어막이 번쩍이며 광선과 구체의 폭발력을 상쇄시켰다.

파직거리는 번개 불꽃이 공기 중으로 다 사라지기도 전에, 소년은 눈을 부릅뜨고 겁도 없이 악마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저 눈은 뭐야!’

어둠 속에서도 너무나도 똑똑히 보이는 흰색과 까만색이 대비되는 무기질적인 눈. 동공 안에서는 붉은 빛과 검푸른 빛이 뒤섞이며 내려치는 칼날처럼 번쩍였다.

대체 저게 뭐란 말인가. 저 기괴한 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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