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65화 (66/128)

65화

희망봉의 유령선-2

낮에는 마법으로, 밤에는 인력으로 해류를 거슬러 에프레카의 해안선이 어렴풋이 보이도록 남쪽으로 항해한 것만 한 달 반.

아소르스 제도에서 출발해 무려 43일 동안 항해한 끝에 드디어 에프레카의 끝자락에 거의 도착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것도 다른 배들에 비하면 빠른 속도였다.

그런 바다의 진주 호 앞에, 거대한 비구름 떼가 모인 하늘이 나타났다.

“어, 주인님, 하늘 날씨가 꽤 안 좋은데요?”

내려오면서 비 한 방울 만나지 않았는데, 그 비구름이 여기에 죄다 모여 있었던 걸까. 저 멀리에서 비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빗줄기가 하도 굵어 비구름 밑이 모두 뿌연 막으로 덮인 것 같은 신비한 광경. 먹구름 떼는 남쪽 수평선 전부를 검게 덮고 있었다. 마치 그 밑으로는 통과할 수 없다고 통고하는 것처럼.

저 기이한 날씨 때문이었을까, 지금까지 오면서 그 어떤 배도 만나지 못했다. 이 밑으로 항해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였다.

희망봉을 통과하겠다고 여기까지 왔던 수많은 나라의 선원들은 그 밑의 요동치는 바다를 보며 뱃머리를 돌려야 했으리라.

“전진.”

반면 소년은 차갑게 명령할 뿐이었다. 소년은 폭풍 따위 무섭지 않았다.

“전진하랍신다!”

“으아어으어!”

“가즈아아아!”

물론 휘하의 선원들 역시.

비구름으로 뒤덮인 지역으로 다가갈수록 조금씩 높아지는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의 진주 호는 기어이 비로 이루어진 흐릿한 장막을 통과했다.

***

번쩍하고 검은 먹구름 사이에서 태양빛처럼 밝은 번개가 수시로 번쩍였다.

그 다음으로는, 심장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몸을 펄쩍 뛰게 만들 정도의 굉음이 뒤따랐다.

하늘 위에서 신들끼리의 전투라도 벌어지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구름의 틈을 뚫고 검광이 번뜩이고 신이 타는 말발굽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댔다.

그 밑으로는 굵고 무거워 맨살에 맞으면 따가울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배에 구멍이 없어도 빗물만으로 가득 차 침몰할 것만 같은 수량이었다.

이런 불안정한 날씨에서, 바다라고 멀쩡한 건 아니었다.

거대한 바다 위에서는 전열함조차도 한낱 조각배일 따름이라는 걸 교육하려는 것처럼 뱃전까지 닿는 커다란 너울이 갑판을 적셨다.

천둥번개가 칠 때마다 벼락이라도 떨어질까 선원들이 반사적으로 돛대 위를 쳐다보았다. 돛대 위에선 선원들이 꽥꽥거리며 죽은 갈매기들을 벗삼아 돛을 접었다. 잘못해서 거센 파도에 몇 선원과 갈매기들이 휩쓸려가기도 했다.

하늘은 구름에 햇빛이 가려져 밤과 같이 깜깜하게 된 지 오래였다. 분명 해안선을 따라오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 묻힌 건지 육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번쩍!

아니. 번개의 빛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뭔가 알 수 없는 현상이 이 일대를 뒤덮고 있는 게 분명했다.

‘희망봉을 떠도는 저주받은 선박이라.’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소년이 장대비를 맞으며 검은색만 가득한 정면을 바라보았다. 눈에 힘을 주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무언가가 방해하고 있는 건지. 폭우 때문에 갈매기를 사용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두둑거리며 나무갑판에 비가 내리쳤다. 비쩍 마른 소년은 그 비바람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이 보였다.

그그그극

높은 파도에 배가 기울어지면서 당장이라도 침몰할 듯 비명을 토해냈다. 불을 밝히는 유등이 배와 함께 기울어졌다. 소년은 공기로 배와 파도를 짓눌러 바다의 진주 호가 전복되지 않도록 막았다.

“오호? 이것 봐라?”

소년이 일대의 공기를 짓누르는 순간, 파도에서 마법을 밀어내는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파도가 생각 외로 강해 마법을 밀어내는 게 아니었다. 마치 꽉 찬 상자에 물건을 더 집어넣으려 해도 안 되는 느낌.

바닷물 자체에 무언가 섞여 있었다. 이는 순수한 자연현상이 아니란 말이었다.

옅지만 붉은 기운이 파도에서 느껴졌다.

소년이 집어삼킨 사탄과 비슷한 기운이.

‘악마로구나.’

소년이 중심을 되찾은 배의 선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키가 조금 커서 여기저기 줄로 동여맨 게 덜해졌을 뿐 볼품없는 선원 복장은 그대로였다.

보우스프릿의 앞에서 난간을 잡은 소년이 외쳤다.

“이곳을 지배하는 놈이 누구냐! 당장 나와라!”

목소리에 힘을 힘껏 담아 외쳤다. 그의 외침에 자극받아 시체 선원들이 검푸른 안광을 밝히며 괴성을 질렀다. 소년의 말에 대답해주듯 하늘 역시 으르렁거리는 괴성을 토해냈다.

소년의 외침을 들은 걸까, 바람이 조금 잦아들며 비로 인해 짧아진 시야 너머로 어렴풋이 높은 그림자가 스르륵 나타났다.

“오, 전설이 사실이라니!”

소년을 따라온 해적선장이 두려움이 반쯤 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소년의 뒤에서부터 스릉거리며 칼 뽑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선원들이 낯선 존재의 등장에 경계심을 품고 무기를 뽑아들은 것이다.

배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바다의 진주 호의 불빛이 정체불명의 그림자를 가리고 있던 어둠을 걷어냈다.

너덜거리는 돛, 시커멓게 썩은 선체, 여기저기 부러진 가로돛대와 보우스프릿 밑에 달린 섬뜩한 해골 선수상. 선수상의 커다란 해골의 눈구멍에서는 시퍼런 귀화가 타오르고 입에서는 불길한 붉은 불꽃을 침처럼 질질 흘렸다.

희망봉을 가로막는다는 전설의 유령선.

‘플라잉 레흐텐’이 소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플라잉 레흐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돛대에 연결된 수많은 줄들이 어지럽게 갑판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십 개의 포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플라잉 레흐텐은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고 쭉 미끄러져 와 바다의 진주 호의 옆구리에 바짝 붙어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플라잉 레흐텐에 파도에 넘실거리는 바다의 진주 호의 옆구리가 쿵쿵 부딪혔다.

“모습을 드러내거라! 배를 마주하고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매우 예의가 없구나!”

소년이 브란트에게 배운 귀족식 억양으로 호통을 치자, 텅 빈 갑판에서 희끄무레한 형상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허연 물체는 물속에 풀어졌던 물감이 다시 한 곳으로 모이는 것처럼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키히히히!

-흐헤헤헤!

인간의 형상을 띠고 반투명한 존재들. 유령이었다. 장대비가 유령들의 몸을 통과해 갑판에 부딪혔다. 놈들은 붉은 안광을 빛내며 자신들의 몸처럼 창백한 무기들을 들고 킬킬거렸다.

그 가운데에서는 사람보다 훨씬 커다란 유령이 소년을 굽어보고 있었다.

-배짱 한 번 두둑하구나 꼬마야!

사람을 위아래로 잡아당겨 길쭉하게 만든다면 그런 모습일까? 키는 트롤보다도 컸고 팔은 과장 조금 보태서 가로돛대만큼 길었다. 허수아비처럼 빼빼 마른 팔다리에 단 끝이 너덜거리는 외투를 입은 유령선장은 붉은 안광이 어른거리는 해골 그 자체였다.

누가 유령 아니랄까봐 갑판에서 살짝 떠 있는 유령선장을 향해 소년은 한 번 더 일갈했다.

“나는 네놈 따위를 보자 한 게 아니다, 하인 녀석아. 네 영혼을 저당잡고 있는 주인더러 나오라 해라!”

-뭐야? 이런 건방진......

소년의 말에 발끈하려던 유령선장은 소년이 고개를 똑바로 들어 눈을 마주치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근본적인 공포. 이미 죽은 몸이라 잊고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 속에서 퍼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뭔가 있는 녀석이로구나. 하지만 나보고 놈을 불러내라고 해봤자 소용없다.

유령선장은 악마라는 글자를 내뱉기도 두려운 지 놈이라고 에둘러 지칭했다.

-우리의 영혼을 가진 놈은 이곳에 폭풍을 불러오고 우리더러 여기를 지키라 하곤 가버렸다. 여기엔 없어.

“그럼 너희들이 이 꼴이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해라!”

-왜 그래야 하지?

“너희들도 천년만년 폭풍우 속을 떠돌아다니고 싶진 않을 거 아니냐?”

-......!

그 말에 유령선장은 물론이고 모든 유령들이 술렁이며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붉은 눈빛들이 자잘하니 떨리며 소년에게 집중되는 것이 분명 기대를 품고 있었다.

-우리를, 해방하겠다?

“가능하다면.”

-......그래. 설명해주지.

유령선장의 설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레흐텐을 출발해 힌디 너머 식민지를 향해 항해하던 선장과 배는 희망봉 근방에서 폭풍우에 휩쓸렸고, 장장 오 일 동안 폭풍우 속에서 시달린 끝에 ‘악마건 뭐건 좋으니 여기를 벗어나게 해 줘!’라고 홧김에 외쳤다가 진짜로 ‘놈’이 나타났다고 한다.

-녀석은 정말로 거대했다. 한 손으로 이 배를 움켜잡을 정도였어. 비바람은 그치고 시커먼 안개가 주위를 뒤덮었지. 난 너무나 무서워 그저 놈이 내미는 종이 쪼가리에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고.

“......”

소년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플라잉 레흐텐이 이 꼴이 된 원인을 들었지만 악마를 여기로 불러올 방법에 대한 영감은 생기지 않았다.

“그럼 놈을 불러올 방법은 있나?”

-나도 모른다. 아주 가끔 와서 우리가 잘 있나 쓱 훑어볼 뿐이지. 최근에 한 번 왔다 갔으니 당분간은 오지 않을 거다. 다만......

유령선장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은 길고 가는 팔뼈로 난간을 잡고 소년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뼈만 남은 공허한 눈구멍에 등불을 넣어 놓은 것 같은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아마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너희를 한번 두들겨 줘야 한단 말이더냐?”

-그렇지. 보아하니, 너도 딱히 산 자를 끌고 다니진 않는 모양이야.

유령선장이 시체 선원들을 보며 큭큭 웃었다.

-시체와 유령이라. 꽤나 재밌겠어!

“그건 구미가 당기는걸.”

소년 역시 씩 웃었다. 살가죽 없이 해골인 유령선장과는 달리 표정이 드러나는 웃음. 유령선장은 그 웃음에 뼈만 남은 몸에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악마보다도 기분 나쁜 표정이군.’

소년이 비에 푹 젖은 볼품없는 선원복을 대충 여미더니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네 운명을 걸고 결투를 한 번 해보자꾸나.”

-운명이라...... 그래. 나와 내 선원의 안식은 네게 달렸다.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겠나?

“그러지. 이름을 말하거라.”

-흐흐, 놈이 내민 계약서에는 대표인 내 이름이 들어갔다. 그 순간부로 내 이름은 없는 거나 다름없어졌어. 나조차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대신 가문은 아직 기억하고 있지. 판 슈트라센이다.

“좋다 판 슈트라센. ......흠. 생각해 보니 나도 이름은 아직 없어서 이름은 못 대겠구나.”

-이름이 없다니. 신기한 꼬맹이야. 말투도 귀족인데 참 흥미로워. 어쨌건 그럼 이름 없는 놈들끼리 한바탕 해볼까?

“좋다. 슈트라센. 방식은?”

-방식은 무슨! 양쪽 다 죽진 않을 거 아닌가!

“좋아. 울며불며 봐달라곤 하지 말도록.”

완전한 귀족 억양과 말투를 습득한 소년이 오만하게 선언했다.

-크하하! 좋다! 무시무시한 눈을 가진 녀석이니 평범하진 않겠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양측의 선원들이 모골이 송연해질 괴성을 각자 지르며 상대편의 갑판을 향해 돌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