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물마법사와 사령술사-11
부글거리는 공기방울이 몸을 스치고 검은 수면으로 올라갔다. 소년의 오른쪽 눈에서 발하는 붉은 기운은 긴 꼬리를 그리며 공기방울과는 반대로 밑으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수면에서는 이미 마력이 끊겨 소용돌이가 사라졌지만, 소용돌이가 만들어낸 흡인력의 관성은 조그만 육신을 바닷속 깊은 곳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타버리고 찢어진 넝마를 걸친 조그만 육신이 창백한 빛깔의 머리카락을 물살에 흔들며 뭐가 있을지 모를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소년의 두 눈은 그 어떤 빛도 없는 이곳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광원이었다.
한쪽 눈에선 어두운 물속보다도 더 어두운 빛깔을, 다른 눈에서는 불길한 핏빛 기운을 횃불처럼 일렁였다.
부그르르......
폐에 남아 있던 마지막 공기를 한숨으로 내뱉었다.
소년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성공이다.
하지만 씁쓸하다.
애초에 싸움의 목적 자체가 물마법사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죽은 척 하자는 수였다.
암살 시도가 실패해서 조금은 아쉽긴 했지만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기분으로 던졌던 수여서 암살이 실패했다고 원래의 목적이 실패하지는 않았다.
결국 원 목적인 ‘도주극’에 걸맞는 결과가 나왔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타격도 줄만큼 줬으니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도주의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소년은 지금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탈출 직전 맞은 번개 때문일까? 아니었다. 마지막 번개에 맞아 구워졌긴 했지만 고통도 잠시. 소년의 힘이 안개를 생성해 신체를 빠르게 회복시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번개 마법이 별 거 아니었단 의미는 아니었다. 고작 한 발이었는데도 죽음의 문턱에 발을 걸치고 돌아왔다. 침잠한 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회복이 시작되었다. 만일 브란트가 없었다면......
‘희생이라.’
희생이란 개념을 배울 수 없는 빈민가에서 자란 소년은 브란트의 마지막 모습이 망막에 새겨진 듯 떠나지 않았다.
위급상황 발생 시에 시체들을 방패로 쓸 생각은 있었지만 자신이 명령한 것도 아니고 부하가 스스로 나서서 희생을 자처한 것은, 소년에게는 살인이라곤 해본 적 없는 이가 처음 살인을 하고 받는 충격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린던 빈민가에서도 한 마법사의 희생이 있었지만 소년은 그 거대한 불기둥이 희생으로 인한 것인지는 몰랐다.
소년은 마음을 이내 가라앉혔다. 처음 보는 희생의 개념도 놀라웠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별......’
소년은 물에 잠기기 직전 보았던 별들의 모습을 상기했다.
연회. 그건 연회였다.
걱정 한 줌 없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별들의 군집. 지상의 고통도, 번뇌도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행복 그 자체.
‘......’
불쾌했다. 질투 같은 단어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막막한 감정이 소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천천히 뛰는 맥박이 더 경직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소년을 향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이 빈민가를 집어삼키기 전,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 없이 그저 모래처럼 반짝이기만 했던 밤하늘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왜 적의가 보이지 않았을까?
이번 전투 내내 구름이 하늘 가득히 껴 있어서? 그 때문에 별들은 소년을 주시하지도 못한 걸까? 그 즐거운 모습은 별들의 평소 모습인 걸까?
‘기분 나쁜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더 배알이 꼴렸다. 자기들 맘에 안 든다고 밑에 개입하는 것들이, 정작 지상이 난리통인데도 저 먼 하늘에서 놀고 자빠졌다.
‘귀족 같네.’
인간끼리의 신분이 아닌, 세상 자체에 새겨진 거대한 신분제라.
문득 시야 한구석에서 바닷속으로 천천히 침강하는 커다란 돛대가 보였다. 그 밑으로는 돛대 없이 산산조각난 선박의 시체가 꼬르르 가라앉고 있었다.
소년은 순간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배의 잔해에서부터 눈을 떼고 다시 수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 한 점 없는 숲 속을 보는 것처럼, 저 깊은 바닷속을 보는 것처럼 그저 검은색이었다. 색조차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을 뜨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눈을 감은 것 같은 광경.
‘어둠이라.’
어떤 책에서 말하길. 어둠과 빛에 대한 고찰이라면서 왜 빛이 없는 곳은 어둠뿐이냐, 실제로는 빛이 아니라 어둠이 이 세상의 근본이 아니냐는 과감한 주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표지에는 붉은 도장으로 금서라 찍혀 있는 것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이단으로 몰린 모양.
보르도 마탑 소유의 도서관에서 약탈한 책들은 마법사들의 저서를 모아둔 것답게 별게 다 있었다. 이 세상에 관한 온갖 탐구심과 모험심의 결집체들. 마탑끼리도 교류하는 까닭에 보르도 마탑의 저서가 아닌 게 오히려 더 많았다.
이것과 저것을 섞으면 이런 반응이 나오더라, 공기는 이것과 이것으로 이루어져 있더라, 멀리 떨어진 땅에 사는 이 동물은 이렇게 생겼더라, 사람의 내부는 이렇게 생겼더라 등등, 마법사라는 귀한 신분이기에 마음껏 할 수 있는 온갖 결과물들이 가득했다.
소년은 온갖 책들에서 읽은 잡다한 지식을 떠올리며 씁쓸함과 별들에 관한 불편한 상념을 묻어버리려 애썼다.
한동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나갔다.
아무런 빛도 소리도 없는 공간은 생각에 잠기기에 참으로 좋은 환경이었다. 몸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만히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대장장이가 쇠사슬의 고리를 하나씩 이어 나가는 것처럼 길어진 소년의 생각은 어느새 영혼에 대한 고찰과 맞닿았다. 영혼을 통해 시체를 일으키는 소년이니만큼 그러한 의문에 생각이 닿는 것은 필연이었다.
영혼은 대체 무엇인가. 왜 있는가.
보르도 마탑은 정신과 영혼을 탐구하는 학파였다. 영혼을 다루는 소년이 그에 대한 관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소년은 보르도 마탑의 저서들을 통해 영혼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하려 했다. 자신보다 똑똑하고 강할지도 모르는 수많은 마법사들의 지식의 집대성이니까.
그러나 결과는 ‘알 수 없다’로 귀결되었다.
보르도 마탑의 마법사들은 영혼이 실재한다는 ‘가정’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영혼이 존재한다는 실증이 없단 얘기였다. 그런 가정을 바탕으로 한 실험들은 소년이 겪은 것들과는 너무나도 달라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신에 관련한 건 도움이 됐어도.
복잡한 머리를 달래려 아무 지식이나 마구 꺼내들며 생각하던 소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혼의 일부를 먹는다. 그리고 나머지 영혼을 시체에 집어넣고 그 영혼을 매개체로 시체를 부릴 수 있다. 그러면, 그 시체가 파괴되면 ‘남은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
그 순간.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듯, 소년은 자신과 이어진 미약한 끈을 느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을 법 하다고 인정되는 아주 얇은 끈. 영혼에 대한 이러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면, 소름끼칠 정도로 조용한 어둠 속으로 잠겨 상념에 잠기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각.
‘뭐지?’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소년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끈을 건드려 보았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그 가는 끈은 수많은 더 가느다란 끈이 수없이 많이 모여 만들어진 밧줄 같은 것이었다. 소년이 끈을 건드리는 순간. 소년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아우성이 들려왔다.
‘주인님이시다!’
‘주인님께서 부르신다아-!’
‘흐어어, 흐어어!’
‘아으아아.......’
수많은 영혼의 멍한 목소리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이건......’
소년은 직감적으로 이 끈이 자신과 자신이 하수인으로 삼은 영혼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구속력!’
소년은 이제야 사탄이 말했던 구속력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소년이 린던의 빈민가에서 조종했던 빈민의 시체들은 전투 이후 모두 잃고 끝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힘에 ‘규칙’이 생긴 이후에 받아들인 시체들은 달랐다.
구속력이 강해져 영혼들이 어디론가로 사라지지 않고 소년의 명을 기다리고 있게 된 것이다. 소년이 절반을 쪼개는 것보다 영혼이 10퍼센트, 20퍼센트 더 깎여나간 이유는 이 끈을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였다.
곧, 소년의 부름을 듣고 소년이 하수인으로 만들었던 영혼들이 수없이 다시 날아와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니, 흡수가 아니라 저장되었다.
소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소년이 자신들을 부를 때를 기다리며 하나하나 차곡차곡 조약돌처럼 강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물에 잠긴 거대한 바위 주변에 자갈로 이루어진 두터운 지층이 생겨났다.
오른눈에서 뿜어지는 붉은 광망에서 볼 수 있듯, 소년은 아직 악마의 힘을 다 갈무리하지 못해 물이 뿌옇게 변했었다. 그런데 그 지층이 바위 주변에 쌓이자 악마의 힘에 자극되어 요동치는 바위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들썩이는 강물 속 진흙도 덮어 강물은 다시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의 핏빛의 밝기가 조금 줄어들었다.
‘......내가 규칙을 만든 이후에 얻은 30퍼센트짜리 영혼들이다.’
그럼, 40퍼센트 짜리는? 간부들은?
소년은 자신에게로 모여드는 영혼을 계속 빨아들이면서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내, ‘기사 서임’을 받은 수십의 영혼들을 골라낼 수 있었다.
조약돌 가운데 다른 조약돌보다 큼직하고 좀 더 각이 진 녀석들. 브란트와 오르네리 두 기사를 비롯해, 윌리엄을 필두로 한 기사 서임을 받은 해적선장들이었다.
소년의 힘에 규칙을 부여하기 전에 얻은 소년의 하수인들 중 기사 서임을 받은 이는 오직 두 기사뿐. 50퍼센트짜리 크기였던 두 기사의 영혼은 끈에 딸려오면서 조금 닳아 있었다. 기사 서임 때는 변함이 없었지만 지금 끌려오는 과정에서 조금 깎여나갔다.
절반에서 조금 더 영혼이 깎이는 이유가 끈에 연결되기 위해서임이 이로써 증명되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었다. 소년이 죽은 자를 되살리는 방식은 시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가능했다. 영혼만이 남은, 이 조약돌이 되어버린 영혼들을 다시 꺼낼 줄은 모른다. 하지만 해결방법을 알 만한 곳은 짐작하고 있었다.
영혼 그 자체가 실체화된 것, 즉 유령.
마법사들은 유령을 단순히 저주로 인한 현상 또는 환각 등으로 규정한다. 유령의 존재를 영혼의 존재와 직결시키지는 않았다. 증거가 부족하다나? 적어도 소년이 읽은 책에서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유령선이라......’
소년은 다음 행선지를 유령선이 출몰한다는 희망봉 근방으로 잡았다. 악마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유령선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소년은 영혼을 유령으로 불러올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혼들을 확인하던 소년은 간부 중 하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홉킨스는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기에 회수할 수 없었다.
‘홉킨스는, 신의 심판대로 올라간 걸까.’
천국과 지옥을 가른다는 심판대. 그곳에서 홉킨스는 과연 어떤 판결을 받는 걸까.
자신이 하고 싶지 않았지만 명령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어도 죄를 물을까? 아니면 반쪽이라 자격조차 없는 걸까. 신이라는 존재가 얼만큼 자비로울지에 따라 결정되려나? 재판이나 심판에 관한 건 잘 모르는 소년은 신의 심판대라는 것이 궁금했다.
‘성경엔 나와 있으려나.’
아닐 것 같았다.
별을 보는 노인이 말한 온갖 성직자에 대한 욕이 떠올랐다. 브란트가 말해준 에크나르프의 교회의 부패도 떠올랐다. 그런 부패한 이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성서를 고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인간의 탐욕은 한계가 없어 이득을 위해선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에.
‘그럼 그들은 신성한 교리를 마음대로 바꾸었다고 나중에 심판대에서 지옥에 가려나?’
소년은 계속해서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바다 위의 것들이 어서 떠나가길 바라면서.
***
밝게 빛나는 태양과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흰 돛이 햇빛을 이리저리 반사해 밝게 빛났다.
돛에 특수한 도료를 발라 물에 더 안 젖고 불에 더 안타고 더 질기게 만드는 비싸디 비싼 돛이었다.
그 밑으로 하얗게 칠한 주 돛대와 마찬가지로 겉을 하얗거나 금색으로 색칠한 거대한 배의 모습이 햇빛 아래 위용을 드러냈다.
항구에 정박한 이들이라면 너도나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 아름다운 자태를 오랫동안 볼 것이고, 화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누가누가 더 잘 그리나 즉석 대회를 펼칠만한 아름다운 미술품 그 자체인 선박이었다.
돛의 표면은 물론이고 돛대 맨 위의 큼직한 깃발에도 흰 바탕에 금색 십자가를 중심으로 주변에 잎사귀와 천사 형상 등이 수놓아져 있었다.
교황청의 문장이었다.
이 배는 교황청 직속 근위대 소속 배였다.
그걸 증명하듯, 타고 있는 모든 선원들이 품에 성경을 품고 있고, 흰 사제복과 흰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갑판 곳곳에서 바닷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병사들을 가득 태운 배들이 삼엄하게 거대하고 하얀 배를 호위하고 있었다. 흰 칠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돛대 위에 웅장하게 휘날리는 흰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깃발을 걸고 있는 배들이었다.
하얗게 색칠된 니아트리브의 1급 전열함보다 큰 거대한 중앙의 전열함. 그 이름은 ‘신의 심판’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 이름답게 100문이 넘는 함포의 주둥이가 양 옆구리를 빼곡하게 덮고 있었다.
그런 신의 심판의 선미루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금색 십자가를 하얀 흉갑에 새기고 검은 서코트를 걸친 기사들이 누군가를 호위하듯 둥글게 둘러서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이 세상의 빛깔이 아닌 듯한 새하얀 사제복을 걸친 이가 있었다.
머리를 덮은 후드의 그림자마저도 하얗게 보일 법한 하얀색 일색의 사제는 때 묻은 성경을 곱게 안고 선미루 한쪽에 세워진 성상을 향해 앉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찹니다. 들어가 계시지요.”
파올로 추기경이 근처로 다가와 말했다. 추기경조차 검은 서코트의 기사들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하얀 사제가 조그맣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시간째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다리가 저릴 만도 하건만, 일어나는 움직임에는 군더더기 없이 말끔했다. 마치 고도의 훈련을 받은 기사같이.
놀라운 것은 대답하는 목소리가 얇고 여렸다는 것이다.
“성녀님, 이만 들어가시지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추기경. 성녀는 고개를 마주 끄덕여주다 갑자기 어느 한곳을 슥 돌아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혀 아무것도 아닌 분위기가 아니었다. 검은 서코트의 기사들이 성녀가 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파올로 추기경도 영문을 모른 채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으나 오로지 수평선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드 밑의 반짝이는 성녀의 눈동자는 수평선 저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무언가를 재듯이 좌우로 살짝살짝씩 움직였다.
“지금이 어디쯤 왔지요?”
“어제 지브롤터를 넘었습니다.”
즉, 이 거대한 선단은 막 지중해를 벗어났단 얘기였다.
“그 다음은 어디로 가게 되지요?”
“서남서로 닷새 거리에 마데이라 섬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간단히 더 보급을 하고 그대로 뱃길을 따라 대서양을 건너게 될 겁니다.”
“곧장 서쪽은 어디지요?”
“서쪽이요?”
추기경이 뒤를 돌아보자 키를 잡고 있던 조타수가 품을 뒤적거리면서 해도를 넘겨주었다. 어지간한 배에서 선장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이지만 그도 여기선 그저 조타수일 뿐이었다.
“음...... 아소르스 제도라는 곳입니다.”
“거긴 해적소굴입니다. 해적들이 드글드글한 곳이죠.”
추기경의 말에 조타수가 덧붙여 설명했다.
“직선거리로는 아소르스 제도를 지나치면 거리는 단축되겠지만, 해적들의 안방이라서 위험성도 있고 하니 보급도 할 겸 마데이라 섬을 거쳐 가는 겁니다.”
누가 교황청 소속이자 자기들보다 체급도 훨씬 큰 어마어마한 배를 노리겠냐만.
“그렇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서쪽 수평선을 바라보는 걸 보면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듯했다.
“성녀님,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성녀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품 넓은 사제복 밑에서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뭘 본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분위기가 무거워 파올로 추기경은 말을 아꼈다.
함내로 들어서기 직전, 성녀는 두 곳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하나는 지금까지 기도하던 성상, 나머지 하나는 아소르스 제도가 있다는 저 먼 서쪽 수평선.
그 둘을 바라보는 눈빛은 확연히 달랐다.
성상을 볼 때는 불처럼 이글거렸고, 수평선을 볼 때는 반짝이고 있었다.
신앙심과 호기심일까? 그 감정은 오로지 성녀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