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물마법사와 사령술사-8
“이런.”
소년과 일선 간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용돌이라니! 바다 위에서 이보다 확실한 제거방법이 있을까.
“지금이라도 뛰어들까요?”
“늦었어.”
장교의 취미 호가 당장이라도 침몰할 것처럼 아슬아슬한 각도를 유지한 채 물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돛이 찢어져 축 늘어진 상태인데도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속도였다.
이 정도의 흡인력이라면 아무리 수영을 해도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포격을 맞고도 버티고 위치 선정 때문에 운 좋게 엘리자의 마법도 비껴내며 용케 살아남았지만 이 배도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 사략 생활 하면서 같이 해온 녀석인데. 이제 보내줄 때가 왔구만.”
이리저리 흐트러진 짐들 가운데서 홉킨스 선장이 자신을 태우고 다녔던 장교의 취미 호의 갑판을 안쓰럽게 쓰다듬었다.
“주군,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겠지요?”
“......”
소년은 침묵한 채 눈동자를 움직이며 상황을 살피고 머리를 굴렸으나, 결국은 빠져나갈 구석이 없단 것만 깨달았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어헝헝! 죽기 싫어!”
윌리엄이 짐더미를 부여잡고 청승맞게 울어댔다. 목숨 때문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제일 먼저 항복을 했던 사람다웠다. 브란트는 암살을 위해 나간 오르네리의 최후를 전해들은 다음부터는 침통해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의 움직임에, 부러져 기우뚱한 자세였던 주 돛대가 끝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우지끈 꺾여버렸다. 돛대는 뱃전에 턱하니 걸쳤다가 그대로 바닷속으로 풍덩 빠졌다.
[우해해해해옹!]
그런 돛대 밑동에서 사탄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목소리의 높이를 보아하니 기쁨의 웃음이었다.
[드디어 네놈이 죽는구냐양! 네놈이 죽으면 네 영혼은 고맙게 받아가마옹!]
“계약도 안 했는데 지랄은.”
그렇게 말한 소년은 잠시 사탄이 묶인 부러진 돛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인지 기우뚱거리는 배의 선미에서 짐더미 사이를 지나 갑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소년은 검은 피로 범벅된 고양이 존슨의 목을 움켜잡았다. 소년의 검은 눈빛을 본 사탄이 움찔했다. 사탄은 죽기 일보 직전인 놈한테 겁을 집어먹다니 하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놓으라옹!]
“무슨 권리로 내 영혼을 받아가겠단 거지?”
[계약은 이미 했다옹! 네가 내 속삭임을 듣고 인간을 죽이고 영혼을 집어먹었을 때부터 영혼을 주고받는 계약이 성사된 거나 다름없다양! 우해해옹!]
사탄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게 제 명을 단축시킨 줄은 모른 채.
“아. 그래?”
상호 동의도 없이? 하긴, 소년도 강제적인 동의로 기사 서임을 했는데 악독한 악마는 그 이상이겠지. 하지만 말이야.
“계약이라 했지?”
사탄은 소름이 돋았다. 소년이 웃고 있었다. 평소에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꼬마가 드물게도 웃고 있다. 그 미소는 악마가 사탄으로 임명받고 세상을 떠돌며 보았던 그 어떤 인간보다도 사악했다.
‘악마라.’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전설 속의 존재. 사람을 속여 찰나의 기쁨을 대가로 영혼을 가져가는 존재.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는 인간들을 속여 많은 걸 갈취하고 힘을 키워 왔겠지.
지금은 고작 영혼밖에 남지 않은 놈이지만.
‘악마의 영혼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매우 고약한 냄새에 먹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악마 중 악마인 사탄인 만큼 대단하지 않을까?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악마는 악마다. 소년에게 사냥당한 마법사 로드릭과 고위 마법사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힘없는(?) 소년에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영혼에 깃든 영성이 줄어들진 않았다.
그럼 이 악마도 마찬가지겠지.
“언제, 어떤 계약? 똑바로 말해.”
[우해옹! 내가 네게 충동질할 때마다다!]
사탄이 킬킬 웃었다. 너는 끝이야! 나와 몇 번이고 계약을 했으니까 빠져나갈 순 없어!
“오 그래? 충동질할 때마다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래!]
사탄은 소년이 로드릭을 수하로 삼은 뒤 빈민가를 집어삼켰을 때 들러붙었다. 그러면 그 뒤에 있던 몇 번씩의 충동은 다 사탄이 속삭인 것이고......
‘한두 번이 아니긴 했지.’
악마가 요구할 때마다 모두 계약 취급이라. 소년의 표정엔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 잘 걸렸다’하는 눈빛이 번득였다.
“악마야. 잘 생각해 봐.”
고양이 존슨의 육신을 잡은 소년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우드득하며 고양이의 목뼈가 으스러졌다.
“계약이란 건 주고 받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야. 난 그 대가로 뭘 받았지?”
사탄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뭘 말하려는 거야?
[시, 실리 제도에서! 사념으로 시체 일으키는 법을.......]
“아니지. 네가 날 충동질할 때마다 계약이 성사되었다고 그 입으로 얘기했잖아. 그때도 네가 ‘더 많은 영혼을 먹어라’하면서 요구를 했어. 그럼 그건 그걸로 끝난 거지. 네가 사념으로 시체를 일으키는 법을 알려준 대가로 나는 그때는 네 충동질인지도 몰랐던 충동으로 실리 제도를 약탈했어. 그리고 거기서 얻은 그 영혼의 일부를 네가 훔쳐 먹었지. 내 말이 틀려?”
[......]
“자 그럼 여기서 하나 물어보자. 그 이후나 그 이전. 네가 나한테 더 많은 영혼을 먹으라는 충동을 줬고 나는 그걸 행했어. 그 대가는 언제 줄래?”
[......]
“말해. 날 충동질하고 그에 따른 영혼의 일부를 훔쳐 먹은 대가는? 없지?”
사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계약서도 안 쓰고 사탄 멋대로 몰래 행한 짓이다.
“자, 계약은 성사되었는데 한쪽만 뭘 받아가고 나머지 한쪽은 이득이 없다? 그렇다면 네가 뭘 동의 없이 가져갔으니, 나도 네게 그 대가를 동의 없이 받아가도 되는 권리가 주어지겠네?”
설마? 사탄은 칼날이 등뼈를 훑을 때의 끔찍한 감각이 재현되는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그건.]
“애초에 상호 동의도 안 되었고 계약 내용도 확인하지 못했지. 정당한 계약이라기엔 부족한 게 너무 많잖아 안 그래?”
아뿔싸.
사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탄은 소년에게 들러붙었을 때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라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꼼수를 사용해 이득을 취해 왔건만, 그게 지금 와서 발목을 잡게 될 줄이야!
이 꼬마 녀석이 보르도에서 자신에게 저항하지만 않았더라면 문제없었을 텐데!
“자, 그럼 내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네 논리대로라면 나도 상호 동의 안 하고 대가를 가져가도 된단 게 성립한다. 반문해 봐.”
못하겠지. 애초에 악마가 먼저 잘못했는데.
소년은 자신만만했다.
이 세상에서 악마란 단어가 들어간 것은 모두 불길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딱 하나. 중립적인 표현이 있었으니, 바로 ‘악마가 계약을 지키듯’이란 표현이다.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관용어구는 부정적인 의미지만, 악마가 계약을 지킨다는 건 그리 부정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오히려 계약을 칼같이 지킨다는 의미다. 다만 악마라는 부정적인 단어 때문에 긍정적 의미가 아니라 중립적 의미로 쓰이는 것이지.
이런 표현법이 사람 간의 계약을 얘기할 때 자주 언급된다는 건 ‘악마와 계약을 한다’에 대한 관용어구나 전설이 널리 퍼져 있단 얘기다. 소년이 읽은 다양한 서적에서도 종종 언급될 정도다.
그리고 그 설화들 중 악마가 먼저 직접적으로 계약을 어긴 적은 없다. 계약을 교묘하게 비틀어 악마에게 유리하게 만든 거라면 모를까.
아마도 악마는 계약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소년은 생각했다.
그럼 말이야. 명분이 있다면, 악마에게 뭘 해도 괜찮은 게 아닐까?
일련의 과정. 그리고 명분으로 인한 강제성 희석. 둘 다 충족한다. 그리고 소년은 현재 사탄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힘도 있다.
“자, 논파해 보시지.”
악마들이 부득불 계약서를 들이밀고 계약 내용을 서로에게 주지시키는 장면은 악마와 계약을 한다는 수많은 설화에서 나온다. 안 그러면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져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악마는 영혼을 못 먹으니까!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사탄이 뭘 주절거리건 소년은 모두 찍어 누를 준비가 되었다.
애초에 계약 방식부터가 잘못되었다. 계약 당사자가 모른 채 계약을 진행해 놓고 이제 와서 발뺌을 무슨 수로 하려고?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옹!]
[뭐긴 뭐야. 나도 네게서 영혼을 가져가겠단 말이다!]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목소리가 소년에게서 흘러나왔다. 사탄은 지옥불에서 불타는 영혼들의 절규보다도 끔찍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죽음조차도 물러가게 만드는 절대명령이자 소년의 하수인들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소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고양이 시체 안에 든 사탄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사탄은 소년에게 기생하던 신세. 소년에게서 훔친 영혼은 흡수했으니 돌려줄 것도 없다. 즉, 자신의 영혼밖에 남지 않았다.
[아, 안 돼! 안 돼! 그만둬!]
소년이 손을 고양이의 입 안에 틀어박았다. 그리고는 강제로 삽입된 사탄의 영혼을 빼내버렸다. 우드득거리며 무언가 뜯겨나가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제발! 이럴 수는 없어! 안 돼, 안 돼!
사탄은 소년의 몸을 지배했을 때 소년이 했던 비명을 똑같이 따라했다. 소년도 똑같이 대답해주었다.
[뭐가 안 돼?]
소년이 입이 벌어졌다. 잘 먹지 못해서 덜 자란 아이치고 하얗고 단단한 건치가 반짝였다.
-으아아! 제발, 제발 살려줘! 그래! 계약! 계약할게! 부하가 될게! 목숨만은, 제바알!
[이미 늦었어.]
-안 돼!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데, 이럴 수는 없어!
콰득
분명 형체도 없는 영혼이건만, 소년의 송곳니가 핏빛의 덩어리에 박히는 모습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소년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역했다. 고약했다.
빈민가의 추악한 범죄자라도 영혼의 맛이 쓰다거나 하진 않았는데. 악마의 영혼이라 그런 걸까? 빈민가의 오물 묻은 생선 찌꺼기보다도 끔찍한 맛이었다. 지금껏 느낀 맛 중 단연코 최악이라 부를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뱉어 버리고 싶은 걸 참으며 소년은 턱에 힘을 주어 입을 닫았다.
끄아아아아아-
영혼의 빛깔을 똑 닮은 핏빛이 등불의 불빛처럼 퍼지면서 끔찍한 비명이 거친 파도소리를 뚫고 사위를 훑고 지나갔다.
소년의 치아는 단두대가 되어 악마의 영혼을 찢어발겼다. 비명은 더욱 커져 갔다.
소년에게 고통스런 영혼의 비명은 은은하니 듣기 좋은 산새의 울음소리와 같았으나, 악마의 영혼은 철판을 긁듯 불협화음일 뿐이었다.
듣기 싫은 소리를 참아가며 신경질적으로 어금니로 뜯어낸 영혼의 조각을 우둑 씹었다. 영혼이 산산조각나며 소년이 삼키기도 전에 목구멍으로 녹아 흘러들어갔다.
캬아아아아-
또 한 입.
토할 것 같은 역함에 숨을 참았지만 영혼은 음식과는 다르게 숨을 참아도 맛은 그대로였다. 소년은 이 역겨움을 넘기기 위해 더 빨리 씹고 뜯었다.
크아아아-
또 한 입.
으아아-
꿀꺽.
큼직한 악마의 영혼을 기어이 모두 찢어 삼킨 소년은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끼며 갑판 위에 푹 엎어졌다.
“주군!”
“주인님!”
“으어어! 대선장님!”
간부들이 황급히 달려왔으나 그들은 도중에 멈추어야 했다. 어느새 거대한 물의 채찍이 배 옆에서 바다뱀처럼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악마의 영혼이 파열되며 생겨난 붉은 빛을 본 물마법사의 공격이었다.
“너희는 가만있어!”
브란트가 둘을 만류하며 기사다운 빠른 몸놀림으로 갑판을 질주하여 소년을 낚아챘다.
콰직!
배의 중앙갑판이 물의 힘에 짓눌려 으스러졌다. 대포 구멍이 숭숭 나 있던 장교의 취미 호의 선체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밑창까지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선내에 남아 있던 대포알이 구슬처럼 이리 저리 튕기고 배가 구부러지면서 비명을 토해냈다.
“주군, 정신 차리십시오! 주군!”
기울어진 갑판 위에서 한 손으로는 난간을 잡고 한 손으로 소년을 잡은 브란트가 다급히 외쳤다.
“흐으으......”
소년은 외눈을 반쯤 감은 채 신음으로 대답했다.
[난 괜찮아.]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소년의 음성.
[몸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좀만 버텨 봐.]
“알겠습니다.”
브란트가 투구의 좁은 눈구멍 너머로 보이는 초췌한 소년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부분이 별도의 생물체처럼 꿈틀거렸고, 녹아내린 피부에 덮인 오른쪽 눈이 있는 부분에선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갑옷 너머로 심장처럼 불룩거리며 박동하는 소년의 근육이 느껴졌다.
쾅!
물의 채찍이 재차 그 큰 몸체를 휘둘렀다. 첫 일격으로 배가 무너져 지금도 물이 들어와 천천히 잠기고 있는데도 배를 완전히 수장시키겠다는 듯 마구 쾅쾅 쳐댔다.
“으앗!”
“아이고! 난 죽기 싫은데!”
그 충격에 두 선장이 서서히 빨라지고 있는 소용돌이에 빠졌다.
쾅!
배를 완전히 부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또다시 내려치는 물 덩어리. 배가 완전히 으스러지면서 그 반동으로 인해 브란트와 소년이 있던 갑판 조각이 떨어져 나가 거친 파도 위로 떨어졌다.
“큭!”
브란트는 소년을 갑판 조각 위에 올리고 근력과 체내 마력을 모조리 동원하여 갑판이라고도 할 수 없게 된 잔해를 잡고 버텼다. 거친 파도로 둘 다 소금물에 흠뻑 절어졌다.
‘나는 죽어서 상관없지만 주군께서는 산 자다. 물에 잠기게 하면 안 돼.’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물살은 점점 빨라졌다. 까딱 잘못하다간 순식간에 휩쓸려갈 정도였다.
물살은 빨라지다 못해 점점 날카로워져 물에 잠긴 브란트의 하체의 살점을 조금씩 깎아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난다면 완전히 갈려나가 한줌 핏물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