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물마법사와 사령술사-6
멀리서 싸우는 함포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는 갑판 위. 거친 파도를 헤치며 소년의 공기 마법으로 돛을 부풀린 해적선 위에 소년이 서 있었다.
불을 켠 전열함의 진형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곧 니아트리브 함포의 사정거리입니다!”
“알았어.”
홉킨스의 말에 소년이 대답하며 한쪽 남은 눈에서 검푸른 불꽃을 피워 올렸다. 소년의 의지는 그의 영혼 속 강물에 떡하니 자리 잡은 바위를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바닥의 흙을 퍼올려 뿌옇게 물을 물들였다.
힘을 끌어올린 소년은 그것에 재차 의지를 담아 니아트리브 선박들에게 보자기를 덮듯이 뿌렸다.
‘혼란을 일으켜라!’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대포가 발사되지 않도록 저지하는 것.
‘환각, 환청,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보거라!’
그러나.
지잉 지잉 지잉
“호오. 여기 있는 건 확실하구나.”
엘리자가 들고 있던 마력검출장치가 무섭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지만 마력검출장치에는 단번에 걸리는 요상한 특징을 가진 소년의 힘 때문이었다.
마력검출장치는 마력만 감지하는 건 아니었다.
드루이드의 힘, 주술사의 힘 등 무언가 물리법칙 외에 작용하는 외적인 힘은 모조리 감지한다. 때문에 마력이 아닌 걸로 잠정 결론이 난 소년의 힘 역시 감지될 수 있다.
“저주를 쓴다 했지. 널 위해 물건도 제대로 구해왔단다.”
엘리자가 바닥에 늘어진 줄 하나를 잡고 당겼다.
뎅-!
기함의 보우스프릿 끝에 매달려 있던 조그만 종이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깊고 묵직한 소리를 사방에 퍼뜨렸다.
그러자 선단을 덮을 듯 광범위하게 몰려오던 소년의 저주는 커튼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 소리와 마주치고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저게 뭐야?”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고 의지를 강하게 품으며 계속 저주를 향한 힘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힘이 강해지니 마력검출장치 역시 무섭게 깜박였다.
지잉지잉지잉
“허. 사령술사가 아니라 저주술사라도 되는 거냐. 좋다. 그럼 종이 부서지더라도......!”
데엥- 데엥- 데엥-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협박과 함께 양해를 구하고 가져온 반 저주 마법 물품인 ‘정화의 종’의 위력은 탁월했다.
소년의 저주는 소리에 맥없이 튕겨나갔다. 그러나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었다.
“으아아아!”
“이 미친! 갑자기 왜 그래!”
“잡아! 저놈 잡아!”
“죽어! 죽으라고!”
“미쳤나 어딜 횃불을 들고 화약고에 들어가려 들어!”
“명령이 없는데 왜 쏘는 거냐!”
주변 선박에서 일부 수병들이 헛것을 보고 경기에 들리거나 공포에 질려 칼을 휘두르고 히히 웃으며 이상한 짓을 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정화의 종은 분명 저주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힘은 평범한 마력이 아니다. 당연히 저주 또한 일반적인 저주 마법과 사뭇 달랐다.
물로 이뤄진 파도가 바위에 가로막힌다고 그 자리에서 하늘로 뿅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길이 막힌 파도가 뭉개지며 다른 곳으로 밀려가듯, 목표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소년의 저주는 꽃가루처럼 휘날리다 주변 배에 내려앉았다.
“제독님! 수병들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있답니다!”
“허. 대단한 놈이로군. 정신 나간 것들은 묶어두고 멀쩡한 것들은 계속 쏴! 저주가 계속되진 않을 테니!”
엘리자의 기함과 그 주변은 저주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나, 종소리가 닿지 않거나 작게 들리는 먼 곳의 전열함들은 저주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오히려 기함 주변으로 갔어야 할 저주까지 같이 몰려들어 상황이 심각해지기도 했다.
배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나 함포 사격이 뜸해진 틈을 타 해적선들이 무서운 속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소년의 공기 마법이 해적선의 돛을 밀었기에 북북동풍에서 북동풍으로 바람이 변했어도 배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으하하! 발사! 발사!”
니아트리브 선박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접근한 포격 역할을 맡은 해적선들이 불을 뿜었다.
해적 측의 전열함에는 소년이 그동안 약탈한 니아트리브제 함포와 해상전용 탄환들을 가득 실어 놓고 베테랑 중 베테랑 해적들만을 태워 놓아 체급은 조금 모자랄지라도 포격전 전투력만큼은 니아트리브 함대와 비견될 정도였다. 개중에는 소년이 지금까지 이끌어 온 세 척의 배의 선원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해적 측의 열세는 분명했다.
해적 전열함이 상대하는 선박은 니아트리브 함대 내부의 대포수 50문 안팎의 3급 미만 전열함들이다. 그러나 함대 측에는 무려 2급 전열함들도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3급 미만 전열함들과는 해적선이 대등하게 싸웠지만, 엘리자의 기함 주변의 그 2급 전열함들은 저주를 물리치는 종의 영향으로 저주를 받지 않아 달라붙으려는 해적선들을 마구잡이로 분쇄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일부가 혼란의 저주를 뒤집어써 소란스러운 상황인데도 부지런히 대포를 쏴대는 니아트리브 전함들.
백병전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서쪽 전역에서만 벌써 열다섯 척의 배가 침몰하고 스무 척이 반파되거나 돛이 부러져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니아트리브 함대가 맞상대하는 해적선들은 수백 척이 넘었다. 대포알의 세례를 뚫고 지근거리까지 다가오는 해적선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쪽과 남쪽에서는 이미 함대 내부로 파고들어 대포를 쏴대는 해적선들로 난리통이었고 충각에 이어 백병전도 치열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돌격!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대포의 발사소리가 사방으로 울려대는 난리통에도 서쪽의 두 함대 간의 거리는 차츰 가까워졌다. 갑판 위 사람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이는 거리. 더 접근해 들이박으면 그 순간부터는 죽은 자들이 득세하는 상황이 되리라.
“종은 네가 흔들어라.”
엘리자가 잡고 있던 줄을 휙하고 옆에 있던 마법사에게 던졌다.
전투의 열기와 급박함에 모두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놈들은 절대 다가오지 못할 것이야.”
물마법사는 아직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도 않았단 걸.
***
살벌한 기세로 코뿔소처럼 돌진하던 해적선들이 돌연 멈추었다. 덜컹 하면서 해적들이 관성으로 인해 바닥에 우당탕 굴렀다.
“어 뭐야?”
“암초인가?”
“다른 배도 다 멈췄어!”
분명 돛은 부풀어 있는데 배는 닻을 내린 것처럼 가만히 붙박여 움직이지 못했다. 서쪽에서 전진하던 모든 해적선들이 일제히 멈춰 버렸다.
“이런, 물마법인가.”
브란트가 상황을 눈치 챘다. 파도가 치는 주변과 달리 해적선과 닿아 있는 수면은 얼음이 언 것처럼 잔잔하게 굳어 있었다. 소년이 즉각 명령했다.
[하선해서 접근해!]
시체 선원들이 일제히 명령에 따라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듯 모두 바닷물 속으로 풍덩풍덩 다이빙했다. 불빛에서 멀어지면서 그들의 눈에서는 검푸른 안광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내 안광들은 검은 바닷속 깊이 사라졌다.
콰직!
우드득!
검은 쇳덩이들이 해적선들에 숭숭 구멍을 뚫었다. 제자리에 멈춰버린 해적선들은 좋은 표적지로 전락했다.
죽은 자들은 바다에 들어가면 그만이었지만 산 자들은 별 수 없이 대포알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저주로 상대가 혼란에 빠졌을 때 바로 붙어야 하건만, 물마법으로 인해 계속 시간이 허비되고 있었다. 해적들이 배 위와 안에서 혼란에 빠지며 죽어갔다.
“으악!”
“살려줘!”
주변의 선박 몇 척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화약을 가득 실어 자폭할 생각이었던 화공선이 유폭되는 소리였다. 다가가기만 하면 끝나는데, 물은 졸지에 땅처럼 변해 해적들의 발을 묶었다.
갈매기들로 상황을 고스란히 살펴본 소년이 이를 갈았다. 오합지졸을 모아 놓은 해적을 분쇄하는 니아트리브 함대. 국가가 가진 힘을 직면하자 소년은 열불이 날 것 같았다.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상대방의 물마법사는 소년을 노리고 있다. 그 상황에서 아무리 마력의 흔들림을 못 느낀다지만 무언가를 투사하는 마법을 쓴다면 곧장 발밑의 물이 흉기로 변해 배를 꿰뚫을 게 뻔했다.
이제 와서 도망칠 수도 없다.
다른 선박 다 놔두고 혼자 뒤로 빠지면 보나마나 물마법사가 찾았다 하면서 물채찍을 휘두를 것이다. 다 같이 빠져도 분노하며 모든 배를 가라앉힐 때까지 추격하려 들겠지.
시체 선원들이 모두 바다로 뛰어들어 텅 빈 장교의 취미 호에도 하나둘씩 포탄이 직격하여 나뭇조각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래서 소년은 선미로 이동해 짐 더미 뒤쪽에 간부들과 함께 숨은 상태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마법사는, 그것도 고위 물마법사는 바다에서 무적이다.
‘하지만 한 명이 모든 걸 막을 수는 없는 법이지. 이기진 못할지라도 최대한 상처는 내주마.’
북쪽과 남쪽 전열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며 죽은 이들이 마구 생겨나고 있었다. 소년은 시체들에게 부지런히 명령을 내리며 회심의 일격을 날릴 기회를 엿보았다.
***
쿵쿵거리는 대포 소리에 귀가 멍멍해진 한 수병은 귀를 막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해적이 보딩할 경우를 대비한 병력이라 대포 장전만 가끔 거들고 할 일 없이 반대편 뱃전만 서성이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폭음이 귀는 물론이고 심장까지 전달되어 가슴이 답답했다.
“이봐! 이봐!”
“응?”
문득 대포 소리를 뚫고 저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수병이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거기엔 푸른 외투를 입은 수병이 어푸거리고 있었다.
“아까 난리통에 빠졌어! 좀 도와줘!”
수병은 황급히 구명줄을 던져 물에 쫄딱 젖은 수병을 건져 올렸다. 찬 바닷물에 오래 있었는지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어휴, 죽는 줄 알았네. 고맙네!”
귀족의 가발 형식으로 자른 머리카락이 물에 쫄딱 젖어 피부에 붙어 있었다. 귀족의 가발 형식으로 자른 머리는 대위 이상의 장교의 특징이다. 얼굴은 낯설지만 어차피 수병은 자기가 탄 배에 있는 사람 얼굴 외우기도 벅차다. 어디 다른 배에서 떨어져 흘러온 거겠지.
“헛, 장교님! 얼른 들어가십시오. 의무실로 가면 모포를 덮어 줄 겁니다.”
“아 고맙네. 그럼 수고하게나!”
제임스 대위가 물을 뚝뚝 흘리면서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