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물마법사와 사령술사-5
100마리의 사자와 수백 마리의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10마리의 호랑이와 수십 마리의 소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한 명의 기사와 백 명의 병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이와 같이 강한 쪽 소수와 약한 쪽 다수가 싸우는 구도는 모두가 궁금해 하는 얘깃거리이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많은 변수가 있어 그 어떤 것도 특정할 수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다 더 상세한 조건을 붙이곤 한다.
서로 도망치지 않는다.
서로 미칠 듯이 싸운다.
서로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다.
등등.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나 조건이 붙지,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지 못한다.
지금 해적들이 처한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100척이 넘는 니아트리브 해군 함대. 도저히 항거하기 힘든 상대다. 상대보다 우월한 건 화력도 체급도 아닌 오로지 숫자뿐.
“화력은 당연히 밀린다. 우리는 최대한 접근해 백병전으로 들어간다.”
모든 해적단들이 그렇게 의결했다. 정확히는 소년에게 ‘기사 서임’을 받은 해적선장들이 소년이 내린 결정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는 해적이 몇 배다. 대포 수도 따지고 보면 해적이 더 많긴 하겠지. 하지만 상대방의 체급을 생각해야 하며 대포의 질도 생각해야 하고 배 한 척당 가지고 있는 대포 숫자도 따져야 한다.
전열함은 체급이 크고 단단해 어디 한 곳 잘못 건드리지 않는 한은 몇십 발을 맞아도 끄떡없다. 그러나 체급이 작은 배들은 전열함의 일제사격 한 번 잘못 받으면 순식간에 배 하나가 걸레짝이 되며 전력에서 이탈된다.
더구나 해적 측은 건조 시기와 국가에 따라, 개조 여부에 따라 선박의 체급과 구조가 천차만별이었다. 반면 니아트리브 측은 열강들을 상대해야 하고 섬나라인 까닭에 해군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어 해군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한다. 다소 질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4함대라 한들 전열함이 포함되어 있단 것에서 니아트리브 측의 우세다.
이런 성능이 제멋대로인 해적선을 가지고 이길지도 불확실한 쌍방 화력전을 하느니 차라리 피격면적이 적은 선수를 앞으로 하고 최대한 빨리 붙어 일대 다수의 상황을 만드는 게 더 유리했다.
“이 겁쟁이들아! 우린 안 죽어! 대선장께서 모두 살려주실 거니까 뒈질 걱정 하지 마라!”
공포에 떠는 해적이 하도 많아서 그런지 소년은 마법사니 불사의 몸이니 하는 걸 대놓고 말하는 걸 허용했다. 어차피 소년도 잘못하면 죽을 수 있으니 이판사판이긴 했다. 믿음이 떨어지는 해적선에서는 선장이 손수 자신의 목을 잘라 살아있는 시체라는 걸 증명하기도 했다. 이는 나름 효과는 있어서 해적들의 공포를 떨어뜨리고 무모함을 높이는 데 도움되었다.
해는 어느덧 수평선 밑으로 완전히 가라앉아 사방이 깜깜해져 있었다.
구름이 가득 껴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팽팽하게 당긴 실 위에 칼날을 얹어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돌았다.
해적들은 니아트리브 함대의 대포 사거리 밖에서 얼쩡거리면서 계속 수를 불렸다. 어두컴컴한 바다 너머 해적선에서 점처럼 보이는 등불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
머스킷을 쥔 손에 땀이 흥건해진 해군들.
“......”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손바닥의 땀을 옷에 비비는 해적들.
“다 도착했답니까?”
브란트가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일 수 있는 해적이란 해적은 모조리 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먹인 뇌물도 소용없이 충성 맹세를 어기고 도망간 해적단도 많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전력 외인 조각배 수준이 대부분이라 전력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
브란트의 신호에 선원이 배의 경적을 울렸다.
부우우우우우-
긴 뱃고동 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
“사령술사 놈. 바다에서 물마법사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거라.”
엘리자가 이를 갈았다. 격파한 해적선의 선원들을 통해 아소르스 제도에 도는 소문들을 듣고 사령술사가 단순히 있기만 한 게 아니라 여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마당이라 엘리자는 ‘때가 왔다!’하며 사령술사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었다.
갑판에서 드르륵 거리는 포가 옮기는 소리에 포가를 정렬하고 대포알을 꺼내 오고 화약통을 뜯고 난리였다. 소란스러워진 갑판 위 상황에도 엘리자와 마법사들은 선수의 자리를 지켰다.
거대한 1급 전열함이 천천히 뱃머리를 돌렸다. 한쪽 옆구리에서 포문이 열리고 총 96문이라는 숫자의 대포가 머리를 불쑥 내밀며 불을 뿜을 준비를 마쳤다.
1급 전열함이 포함된 단종진이 모두 옆구리를 보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 뒤로 충각을 해올 해적선을 대비하기 위해 뱃머리를 돌리지 않고 대기하고 있는 배들. 진형의 위아래로는 마찬가지로 선수를 서쪽으로 향한 채 북쪽과 남쪽으로 포문을 열은 배들이 해적선들을 반기기 위해 대포의 머리를 내밀었다.
둥 둥 둥
북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북 따위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는 지났다. 이곳에 있는 수백 척의 크고 작은 선박에서는 북 따위는 없었다. 한껏 차오른 긴장 때문에 자신의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리는 환청인 걸까.
대신 길고 이지러지는 나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부우우우우-
부우우-
부우우-
서쪽에 포진한 해적선에서부터 나팔 소리가 시작되자 연이어서 다른 해적선들에게도 나팔 소리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사방이 깜깜한 바다에서 사방에서 들리는 나팔 소리는 사기를 낮추기에는 최적이었으나.
“바다의 여제께서 우리를 지켜준다 하셨다!”
“겁먹지 마라! 최대한 흘수선을 때리고 사슬탄으로 발을 묶으면 우리가 이긴다!”
1급 물마법사 엘리자의 마법을 본 수병들의 뇌리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거라도 있어야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버틸만 했다.
나팔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수많은 해적선들이 파도를 가르며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돛을 한껏 펼친 채 역풍에도 아랑곳 않고 돌진하는 해적들.
현재 바람은 북북동풍.
때문에 포격의 시작은 해적들이 가장 빨리 도착한 북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북쪽에 포진된 니아트리브 해군 선박은 14척.
50척과 30척이 열을 이루어 동쪽과 서쪽을 향해 대포를 겨눈 형태라 위아래의 방어는 다소 소홀했다. 하지만 그걸 대비하려는 것인지 북쪽과 남쪽에는 튼튼한 3급 전열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1급과 2급에 비한다면 다소 손색이 있지만, 1급은 모두의 표적이 되기에 항구 밖으로 나갈 일이 드물고 2급은 가성비가 떨어져, 바다를 누비는 ‘전열함’이라고 하면 3급 전열함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될 정도로 널리 그리고 많이 쓰이는 튼튼하고 가성비 좋은 배였다.
해적선들이 접근하며 서로가 서로의 배 형태를 명확하게 알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아무리 불빛 없는 어두운 밤바다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식별을 위한 불은 켜두어야 했으므로 이 정도로까지 접근하니 서로의 형태가 잘 식별되었다. 해적들은 생각보다 위풍당당한 전열함의 풍채에 다소 기가 죽었다.
“겁먹지 마라! 돌격!”
바람을 머금은 돛이 계속해서 부풀어 오른 채 숨을 헉헉댔다. 그렇게 더 가까워지자.
콰콰콰쾅!
어두운 밤바다의 은은한 파도 소리를 찢어발기며 수많은 천둥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다른 나라보다 사거리가 긴 니아트리브제 함포가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불꽃이 번쩍이며 어둠을 가르고 굵은 대포알과 사슬탄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해적선들을 향해 날아갔다.
육중한 쇳덩이가 날아오는 소름끼치는 조그만 소리. 그 공기 가르는 소리가 사라진 직후에는 나무 쪼개지는 소리와 비명이 해적선을 채웠다.
퍽하고 선수의 보우스프릿이 부러졌다. 콰직하고 뱃머리가 대포알에 직격당해 한쪽이 부서져 나갔다. 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수 한 부분에 구멍이 뚫렸다. 대포알이 포물선을 그리며 갑판 위에 떨어지거나 돛에 튕겨 갑판 위에 수직낙하했다. 운 없는 해적들이 포탄에 받혀 죽었다.
사슬탄 역시 위협적이었다.
사슬이 풀리며 회전하면서 날아가는 사슬탄이라 둥근 일반 대포알보다는 공기 저항 때문에 사정거리는 더 짧다. 때문에 대다수가 배 몸통을 맞추고 물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일부 잘 날아간 것은 돛을 찢어버리거나 얇은 돛대를 감고 부러뜨리거나 최소한 꺾이게는 만들었다.
돈좌된 배들은 몇 없었지만, 거리가 더 가까워지면 더 많은 사슬탄이 날아갈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에서도 전투가 시작되었다.
포격과 비명이 어우러지며 나뭇조각 토핑을 얹은 치열한, 아니 붙기 전까지는 일방적으로 한쪽이 두들겨 맞는 아직은 덜 치열한 그런 전투였다.
그런데 서쪽에서는 전투의 열기는커녕 포 소리조차 아직 들리지 않고 있었다.
서쪽은 니아트리브 해군의 절반이 포문을 열고 있는 만큼 돌격하면 해적들의 피해가 무지막지할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때문에 소년과 간부진은 서쪽에 포진한 배 일부를 빼내 상대적으로 배가 적은 위와 아래에 전력을 집중시켜 혼란을 유도하고, 서쪽을 향하고 있는 열의 분열을 노렸다. 틈이 생기면 그 안으로 파고들어 대포건 시체건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니아트리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50척 짜리 열 뒤에 마련해 둔 30척 짜리 열의 선박들이 각각 위와 아래에 가세한 것이다. 물마법사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그 큰 전열함치고는 방향전환이 신속했다.
안 그래도 체급도 화력도 떨어지는 탓에 전투가 지지부진한데. 기동력까지 딸리게 생겼다.
“이런.”
어둠을 틈타 우회해 동쪽으로 들어온 해적선단이 때맞춰 도착해 버렸다. 현재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상조르즈 섬 남동쪽에서 대략 50마일 정도 떨어진 해상이면서 테르세이라 섬 남쪽이었다. 어둠을 틈타 동쪽으로 우회해 접근하던 배들은 테르세이라 섬에서 출발한 배들이었다.
제 2열이 갑자기 빠져 버릴 때 딱 도착해버린 동쪽의 선단들은 그대로 1열과 2열에 동시에 노출되었고.
콰콰콰쾅!
쏴아아!
대포와 물의 채찍에 그대로 큰 피해를 입었다.
“으아아아!”
물의 채찍에 휘감겨 높이 떠올랐다가 수직낙하한 선박이 수면에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형체도 남지 않은 시체처럼 몸체가 나무 파편으로 분해되고 부러진 돛대들이 물 위로 맥없이 쓰러졌다.
“쳇.”
이를 갈매기로 보고 있던 소년이 혀를 찼다. 이건 뭐 상대도 안 되잖아.
우회하던 수십 척의 배들은 정말 찍소리 못하고 분쇄되었다. 소년은 동쪽에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드디어 주력인 서쪽의 해적선단에게 명령했다.
[전진!]
“전진!”
“전진!”
시체로 채운 백여 척의 배들을 선두로 이백 척이 넘는 서쪽의 해적선들이 돛을 활짝 펴고 돌격을 시작했다. 개중 스무 척의 선박은 직진이 아닌 비스듬하게 전진하며 각자 위와 아래 방향으로 갈라졌다. 그 배들은 아소르스 제도 전체를 탈탈 털어 나온 50문 이상의 대포를 가진 선박이었다.
다른 배들은 모두 백병전으로 넘어갈 것이지만 이 배들만은 적극적으로 전열 포격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이 배들은 백병전으로 승기가 잡힐 때까지 상대편 배 중 대포가 50문 미만인 선박을 맡아 마주 포격전으로 시간을 끌게 될 것이다.
“오는구나. 그래.”
엘리자가 팔찌를 틱틱 조작하고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동시에 옆에 있던 자루에서 마력검출장치를 꺼냈다.
“와라 사령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