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56화 (57/128)

56화

물마법사와 사령술사-4

해적소굴에 사령술사가 있다는 카드점술 결과를 받아든 지 오래다. 엘리자에게는 저 해적이나 사령술사 놈이나 똑같이 보였다.

“해적 소탕의 첫 제물로 나쁘진 않겠어.”

이름 모를 사령술사에게 증오를 투사하며 나온 불똥이 엄한 해적들에게 튀었다. 그녀의 어금니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신의 심판대에 올려주마.’

물론 그 심판 결과는 유황불이 타오르는 곳이 되겠지.

엘리자가 한 팔을 앞으로 뻗었다.

손가락마다 보석 박힌 반지들이 반짝였고 로브의 소맷자락 안으로는 보석과 장식이 가득한 화려한 팔찌 여러 개가 덜렁였다. 로브 안쪽에서도 잘그락거리는 쇳소리들이 들려왔다.

점성술사들에게서 사령술사가 아소르스 제도에 분명히 있단 말을 듣고는, 자신이 쓰던 건 물론이요, 온갖 마법 물품들을 죄다 수소문해 가져온 것이었다.

여기서 사령술사와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다만 지금 마법 물품을 쓰려는 건 아니었다. 저런 잔챙이 따위는 말 그대로 한 손만으로 수장시킬 수 있으니까. 엘리자가 손바닥을 위로 한 채로 서서히 주먹을 쥐며 확 내렸다.

그러자 저 멀리 해적선들이 있는 곳 주위 파도가 요동치더니 파도가 확 솟아올라 용오름이 생기려다 도중에 만 것처럼 길게 변모했다. 그 모습은 마치 다리 여러 개를 가진 연체동물이 수면 위로 다리를 내민 것 같기도 하고 채찍같이도 생긴 형상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파공성.

묵직한 물 무게에 해적선의 돛대가 단번에 꺾이고 옆구리가 크게 패였다. 이 정도면 조선소에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리보다 새로 하나 사는 게 더 낫다고 판정내릴 정도였다.

물의 채찍이 배를 내리치며 형태가 무너져 이미 전투불능이었지만 채찍질은 그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재차 내리친 물채찍은 기어이 배를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단단한 용골이고 자시고 무게로 짓눌러 꺾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배 하나를 단 두 번의 휘두름으로 침몰시킨 채찍은 방향을 홱 틀어 바쁘게 돛을 펴고 달리는 다른 해적선을 휙 움켜잡고는 뒤집어 버렸다. 돛이 바다 밑으로 풍벙 잠기면서 따개비 가득한 뱃바닥이 하늘을 향했다.

그 다음엔 배를 휘감아 다른 배 위에 그대로 찍어버렸다. 돛대가 서로 부딪히며 수수깡처럼 꺾이고 파편이 휘날렸다. 그렇게 나무로 된 요상한 모양의 조개가 생겨났다.

엘리자의 손길에 따라 물의 채찍은 쉴 새 없이 배를 내리치고 부쉈다.

열 척의 배가 수몰되는 데는 귀족이 식사 예절에 맞추어 천천히 고기를 칼로 썰어 입으로 가져가 씹고 삼키는 데 걸리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놈들을 건지고 심문해라. 소문 하나까지 싹 뱉게 만들어.”

배가 꼬르륵 잠겨버린 바다 위에서 끼룩거리지 않는 갈매기 한 마리가 황급히 솟아올랐다.

***

소년은 전율을 느꼈다.

저 마법사구나! 테르세이라 세력권을 쑥밭으로 만든 게!

도망치는 열 척의 빠른 배를 짧은 시간 내에 수몰시키다니. 저게 정말 마법사란 말인가?

‘도망쳐야 하나.’

무시무시한 마법의 위력에, 소년은 절로 도망갈 생각부터 떠올랐다.

저 마법사를 바다에서 상대한다는 건 이길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일이다! 사방이 물투성이인 곳에서 누가 저 마법사를 이길 수 있을까?

소년은 침몰한 해적선단에 붙여 놓았던 죽은 갈매기를 니아트리브 함대로 몰아 가장 큰 배의 돛대에 앉혔다. 갈매기의 죽은 눈이 여기저기를 훑었다.

‘저 사람인가?’

갑판에 가득한 푸른색 옷들 사이로 로브를 뒤집어쓴 이 여럿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가장 눈에 튀고 가장 앞에 있는 마법사가 있었다.

‘저 여자구나.’

하얗게 센 머리에, 적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흰색 로브를 걸친 이. 지금 보는 이 순간도 마력이 무섭게 요동치고 있었다.

‘죽지 않네.’

죽음의 기운은 일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마법사가 여기서 죽지 않는단 얘기는 소년이 저 여자와 맞붙는다 한들 질 거란 얘기와 같았다. 어쩌면 목숨만 건져 도망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글쎄, 저 대함대에 마법사들까지 다수 포함된 군대가 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도망칠...... 아니지.’

도망칠까 했지만 소년은 그래봤자 저 여자는 계속 자신을 쫓아올 것이다.

최대한 사령술 소문이 번지는 걸 막았음에도 저 마법사는 이곳을 다시 찾아왔다. 한번 휩쓸고 간 곳을 다시 찾아왔단 얘기는 그만큼 뭔가 확신이 있단 말.

제도를 떠도는 일개 헛소문이 저 멀리 떨어진 니아트리브까지 갔을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대마법사라 한들 국가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 고작 소문 하나 들었다고 대군을 이끌고 나올 수는 없으리라.

결국 이는 분명 소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수법, 그것도 확신이 들 만큼 신빙성이 충분한 수법이 있단 것이다.

‘세상을 적으로 돌린 대가인가.’

소년은 제일 먼저 세상 그 자체를 의심했다.

만일 별들이 소년을 감시하다가 정보를 알려준 거라면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이 이대로 도망쳐도 세상은 저 여자가 소년을 쫓아오는 걸 도와줄 것이다. 소년이 여기 있단 걸 알려줬듯이.

‘만약 그렇다면.’

무작정 도망치기보다는 그나마 큰 세력을 이룬 지금 부딪혀서 저 여자가 죽을 가능성을 높이는 게 더 합리적인 처사였다. 죽음의 기운이 보이지는 않는다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생기고 사라지는 게 죽음의 기운이니까.

아니면 저 함대에 큰 피해를 줘 소년을 쫓아올 엄두를 못 내게 만들던가. 저 대함대가 귀족의 사병은 아닐 테니 국가에게 경질 되는 상황을 만든다면 소년을 쫓아오기까지의 시간은 더 늘어날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지만 그 계란이 충분히 단단하고 충분히 많으면 바위에 금이라도 가게 만들 순 있겠지.

소년은 양털카펫처럼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한쪽 귀퉁이에서는 피처럼 붉은 노을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해는 점점 져 가는데 적은 다가온다라.

소년은 야간전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마법사가 강하다 한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배들을 모두 막진 못할 것이다. 정보 쪽에서는 갈매기를 다룰 수 있는 소년이 더 유리하며 백병전을 시작하면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어떻게든 최대한 피해를 강요할 수는 있겠지.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지만 지금은 선단을 이끌고 있다. 그 선단의 피해가 일정 이상 누적되면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할 것이다. 정 안 되면 죽은 척이라도 하지 뭐.

‘지금까지 내가 했던 방식으로...... 좋아. 해 보자.’

소년의 눈이 검푸른빛을 머금었다.

두 번째로 마법사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첫 번째와는 반드시 다른 결과를 내리라!

***

“음!”

“선장님? 왜 그러십니까?”

한 해적단을 이끌고 있는 선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백한 피부에 몸을 꽁꽁 싸맨 게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은 모습이었다.

“얘들아! 니아트리브의 함대가 아소르스에 왔단다!”

“예?”

“뭐 편지라도 받았나? 너 봤어?”

“아니?”

선장이 해도와 목탄을 꺼내 그들이 향할 경로를 죽 표시했다.

“아소르스 제도의 모든 해적이 놈들을 공격할 것이다!”

“예에? 아니, 니아트리브 해군을요?”

“선장 미쳤어요?”

“이건 죽으란 얘깁니다!”

선원들이 모두 기겁하며 배를 몰기를 겁냈다.

“이런 겁쟁이들! 놈들은 고작 백 척이라셨어! 하지만 아소르스 전체는 사오백 척은 된다고! 모두 달려들면 이길 수 있어!”

“하, 하지만 또 마법사가 있으면 어떡합니까? 몇 달 전에 테르세이라 세력을 결딴낸 게 놈들입니다!”

“마법사라고 무적은 아니야! 사방에서 몰려들면 그치도 어쩔 수 없어! 일단 가보고 아니면 후퇴하던가! 벌써부터 겁먹고 내빼면 뭐가 돼!”

그렇게 아소르스 제도의 여러 해적들이 소굴에서 기어나오거나 뱃머리를 돌렸다. 해적단의 수장을 통해, 혹은 해적 소굴에 있는 시체 해적들을 통해 제도 전체에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테르세이라 세력권을 한 번 박살낸 전적이 있는 니아트리브 해군을 상대로라니 겁을 집어먹는 편이긴 했지만, 수적으로 밀어붙이면 된다거나 여길 뺏기고 모조리 목매달리고 싶냐는 선동에 불안감 반 자신감 반으로 순순히 닻을 올렸다.

물론 순탄하게 선장 말을 듣는 해적단만 있는 건 아니었다.

“미친! 우리는 개죽음당하기 싫다!”

한 해적단의 선원 하나가 스릉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칼을 뽑아들었다. 뒤따라 다른 선원들도 반항기 가득한 표정으로 무기를 들었다. 선장의 성격이 더러운 모양인지 선장에게 찬동하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푸하하하! 죽어?”

선장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스산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고지했다.

“선상 반란은 배 밑바닥 형인 거 알지?”

줄을 매달고 따개비가 잔뜩 붙은 배 밑바닥에 비벼버리는 극악한 처형 방법이었다.

“그전에 네놈을 죽이면 그만이지!”

한 선원이 칼끝을 선장의 가슴을 향해 힘차게 찔렀다. 선장은 막지도 않고 그 칼을 그대로 받았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선장의 몸 깊숙이 찔렸으나.

“뭐하냐?”

“윽!”

선장은 칼을 꽂은 장본인의 배를 뻥 차 넘어뜨리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였다.

“죽여!”

그 다음 수많은 칼이 선장에게 꽂혔으나 선장은 인상을 찡그리기만 할 뿐 쓰러지지 않았다.

“하하하. 얘들아. 요즘 소문 못 들었니? 영생을 하는 선장이 있다고 말이야.”

“으헉!”

“아, 안 죽잖아!”

선장은 칼을 하나하나 손수 뽑아냈다. 뽑아낸 자리에선 응당 붉은 피가 왈칵 뿜어져야 하겠지만 마치 시체에 찌른 것처럼 검은 피만 주륵 흘릴 뿐이었다.

땡그랑

마지막 칼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걸레짝이 되어버린 상의를 휙 벗어던진 선장이 상처투성이인 몸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살이 갈라지고 뼈가 드러난 만신창이의 몸이었지만 놀랍게도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이 멍청한 놈들아. 대선장께서 마법사란 소문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분의 세례를 받으면 이렇게 죽지 않게 되지!”

소년의 허락은 떨어졌다. 이제 몸을 안 싸매도 된다.

“세상에......”

“그러니까 뒤질 것 같다고 내빼는 닭대가리같은 짓은 하지 마라! 우린 안 뒤져! 뒤져도 대선장께서 살려 주실 거니까 당장 돛 펴고 달려 이 머저리들아!”

***

“새까맣게도 모여 드는구나. 제 죽을 자리인 줄은 어떻게 알고.”

뱃머리에 우뚝 선 엘리자가 음침하게 웃었다.

“제, 제독님. 놈들의 수가 벌써 이백 척이 넘어갑니다.”

“그래서?”

제독을 돌아보는 엘리자의 눈은 이미 반쯤 맛이 가 있었다.

“위대한 니아트리브의 해군이 수만 많은 졸개들도 처리 못하겠다 이건가?”

“아, 아닙니다.”

“배에 가득 실은 대포는 뭘 위한 거냐. 저런 놈들을 격침시키기 위함이 아니냐.”

“제독님, 죄송하지만...... 대포로는 반파는 가능하지만 격침은 무리입니다. 제독께서도 해상전에 대해서 많이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대포는 쇳덩이를 쏘는 무기다. 따라서 흘수선 밑에 정확하게 구멍을 뚫지 않는 이상 상대방을 격침하기엔 무리다. 최근엔 마법을 새긴 대포알이 만들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시험작이고 비싸 많이 사용되진 않았다. 하물며 1선급 함대도 아니고 다소 전력이 떨어지는 함대에 그런 귀한 탄알은 없었다.

“화력으론 저희가 우위지만 저들이 수적 우세로 밀고 들어와 백병전을 시도한다면 필시 큰 피해가 날 것입니다.”

“내가 막아주지. 너희는 포격만 해라. 나포할 생각은 하지 말고 최대한 흘수선 밑을 맞춰. 해적 놈들이 백병전을 하지 못할 거라는 건 장담하지.”

바다의 여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장교는 알겠다고 답하면서 물러갔다. 엘리자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이 물었다.

“엘리자 님, 어떤 방도를 쓰시려는지요?”

“해적선 주변의 물을 굳혀 버릴 거다.”

배는 물 위에서 물을 타고 온다. 그 수단을 없애 버린다면 아무리 돛이 멀쩡하다 한들 옴짝달싹 못하고 우월한 니아트리브 대포에 벌집이 되는 수순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은 딱 봐도 수백 척입니다. 전 방면에서 올 텐데 모두 감당하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소리냐. 당연히 못하지. 나는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할 뿐이야. 보딩을 허용하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럴 때를 위해 지금까지 훈련한 해군이 아닌가? 해적선 한둘에 점령당할 놈들이라면 그게 해군인가? 밥버러지지.”

전체 108척 중 50문 이상의 포를 가진 함선은 42척. 나머지는 최소 30문 이상은 가진 큼직한 갤리온들이다. 대포가 적은 배도 대포 외의 물자를 운송할 경우에 대비하여 크게 건조된다. 따라서 높이도 높아 동급이 아니라면 높이 때문에 사다리를 걸치고 반쯤 공성을 시도해야 하는 해상 요새나 다름없다.

50문 이상 대포를 지닌 42척 중 28척은 60문 이상인 3급 전열함, 12척은 80문 이상의 대포를 가진 2급 전열함이며, 나머지 2척은 제독 엘리자의 기함인 1급 전열함과 1급과 2급 사이의 체급을 지닌 부제독의 전열함이었다.

병력 수는 평상시보다 많은 추가 병력을 태운 상태라 배마다 최소 200명 이상은 타고 있다. 3급은 오백 이상, 2급은 육백 이상, 1급은 무려 천에 달하는 인원이 꽉꽉 들어차 있다.

“그런 인원을 가지고 저 조막만한 해적선에게 당한다? 해적 하나하나가 기사쯤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도 지금 조금씩 수를 줄여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사령술사가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면?”

“......”

“지금 저 점처럼 보이는 것들도 당장에 수장시킬 수 있어. 하지만 놈들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그래서 일거에 다 쓸어버리는 거지. 나는 내 남편의 원수를 갚는 동시에 이곳을 니아트리브에 귀속시킬 거다.”

여왕의 밀명이었다. 이왕 아소르스 제도로 가는 거, 카스테냐의 목줄을 쥐기 위해 아소르스 제도에 니아트리브의 깃발을 꽂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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