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55화 (56/128)

55화

물마법사와 사령술사-3

재앙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소년이 실리 제도와 보르도에 느닷없이 나타나 살육을 벌인 것처럼, 아소르스 제도에 자연재해와도 같은 존재가 찾아오는 건 아무런 예고가 없었다.

이미 한 번 아소르스 제도를 휩쓸고 지나간 이가 복수를 위해 같은 곳을 다시 찾아왔다.

북서쪽 방향으로 아소르스 제도의 섬 중 하나인 테르세이라가 노을을 받아 붉게 보였다. 이대로 접근하여 전투가 벌어질 때쯤이면 밤이 될 것이다.

야간 해전은 포격이 빗나갈 위험성이 높고, 난전이라도 일어난다면 아군 오사도 일어날 수 있으며, 깃발 대신 빛을 이용한 신호를 써야 해 명령 전달이 늦어져 여러모로 꺼려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복수에 눈이 멀은 엘리자는 접근을 강행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동안 봐왔던 엘리자의 힘에 경도된 장교들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어디 있느냐 사령술사......”

기함의 선수에서 엘리자가 이를 까득 갈았다.

범선의 선수에서 창처럼 비쭉 튀어나와 있는 보우스프릿(bowsprit) 끝에는 커다란 범선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종이 걸려 있었다.

“네놈을 위해 선물도 챙겨 왔으니까, 순순히 대가리를 내밀거라......”

종을 보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엘리자가 명령했다.

“전 함대 방어 대열을 갖춰라.”

4함대의 현 선박 수는 108척. 1급 전열함을 포함해 50문 이상의 포를 가진 선박은 42척. 해적을 상대한다기엔 너무나도 과해 보이는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할 해적은 바퀴벌레처럼 올망졸망 몰려다니는 놈들이 아니었다. 일통되어 수백 척에 달할 게 분명한 해적이다.

엘리자의 명령이 깃발 신호를 타고 함대 전체에 전달되었다. 거대한 덩치들이 돛을 펼치고 자리를 잡으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은 일대 장관이었다.

거대한 배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니아트리브의 전통 장궁처럼 유려하게 곡선으로 휘어진 전열을 만들었다.

그렇게 50척으로 구성된 단종진이 만들어지고, 그 단종진 뒤로 난전을 대비하여 30척으로 구성된 또 다른 전열이 마련되었다. 이제 단종진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는 진형이 되었다. 나머지 28척은 진의 위아래에 포진하여 섬 사이에서 튀어나올 해적들을 막는 역할을 수행했다.

위에서 바라본다면 마치 세로가 긴 직사각형 형태였다. 이전에 카스테냐 함대를 상대로 잘 써먹었던 방어형 진형이었다.

“전진하라.”

엘리자의 기함을 필두로, 옆구리만 돌리면 무자비한 포격을 쏟아낼 수 있는 진형을 유지한 채, 니아트리브의 제 4 함대가 아소르스 제도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세 척의 선박. 그 중 하나인 장교의 취미 호에서는 낚시가 한창이었다.

“언제 걸리나......”

“저번에 복어 하나 건졌던데 맛있더냐?”

“톡 쏘는 게 꽤 먹을만하더라. 안 죽었더라면 먹지도 못했어.”

“엇?”

해적 하나의 낚싯대가 쭉 휘어지며 요동쳤다.

“오오! 큰 놈 같은데?”

“잡아잡아잡아!”

몇 분에 걸친 치열한 힘싸움 끝에 수면을 뚫고 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펄쩍였다.

“이얏호! 대물이다!”

큼지막한 고기가 걸려 나오자 선원들이 오오하고 감탄하면서 즐겁게 웃어댔다.

“오늘은 내가 이긴 거 같은데?”

“아이고, 아까워라!”

내기를 한 이들 사이에 희비가 교차하고, 잡은 고기의 크기를 비교하며 깔깔거리는 우락부락한 선원들. 다소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들은 생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피부는 차갑고 심장은 뛰지 않았다. 내장은 조용하니 그지없었고 정신은 뒤틀려 있었다.

낚싯대를 잔뜩 드리운 난간 안쪽으로 갑판에 마련한 모래판 위에 모닥불을 지핀 간이 부엌에서 스튜를 만들기 위해 생선 손질이 한창이었다.

“얼른 가져와! 손질하고 맛있게 끓여 먹자고!”

이전까지는 살기 위해 벌레 꼬인 쉽비스킷과 짠 맛밖에 안 느껴지는 염장 고기 스튜를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지만 되살아난 이후엔 먹을 필요가 없어져 과감히 내버렸다.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고 입은 심심하다 보니, 결국 바다낚시로 고기를 낚아 입을 달래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약탈한 신대륙의 향신료를 듬뿍 넣어 만든 요리는 배 위에서 만든 것치고는 괜찮았다.

그들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목숨 걱정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타지에 남긴 가족이 걱정되긴 했지만 뭐 어떠랴! 그들은 불사의 몸이 되었다. 칼에 찔리고 총알이 관통해도 먹지도 잠자지도 않더라도 죽지 않는다. 앞으로 그들의 주인님과 함께 바다를 누비며 즐기면서 살기만 하면 된다.

과거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현실에만 충실하면 되니 이들은 뭐든지 즐기자는 경향이 있어 일이 없을 땐 잔치를 계속해서 여는 이유가 되었다.

해적소굴에서 연주자를 불러와 춤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이렇게 간단한 낚시 대회를 연다거나, 가끔 나포한 배 중에 요리할 줄 아는 이가 있으면 데려다가 선상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 파티의 경우는 소년이 적극적으로 나서 어떻게든 먹을거리를 긁어모아 배 위에서 먹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든 나름 멋들어진 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신대륙에서 오는 배에서 뺏은 신대륙의 먹을거리도 모두의 혀를 즐겁게 해 주곤 했다.

시끌거리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선원들을 소년의 간부진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브란트와 오르네리, 홉킨스와 윌리엄은 정식으로 소년을 따라다니는 직속 간부 직위를 얻었다. 그 밑으로는 ‘기사 서임’을 한 여러 해적단의 해적선장들이 일선 간부로 정해졌다.

“이렇게만 간다면 귀족 작위 얻는 것도 순탄하겠어.”

“해적은 계속 모여들지, 상납금은 많아지지.”

“다 주군께서 명석한 덕분이지요!”

소년은 아소르스 제도의 패권을 다툴 때 썼던 전법을 해적질에 그대로 사용했다. 죽은 갈매기 떼를 아소르스 제도 곳곳에 포진시켜 눈 역할을 하고 즉각적인 정보 전달을 하여 포위 후 나포하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아군의 희생도 줄이고 지나가는 선박을 발견 및 나포하는 확률을 크게 올려 아소르스 제도 해적들의 수입과 충성심을 높이는 데 유효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해적단들을 쪼개고 합치는 일이 필요했다. 당연히 반발이 일었다.

소년은 이를 ‘기사 서임’으로 해결했다. 반항하던 해적선장들은 핏물이 흥건한 서임을 받고 충성심이 영혼에 가득해진 채 군말 없이 부대 재편성을 따랐다.

선장들을 기사 서임하는 바람에 좋지 않은 소문이 조금 돌긴 했지만, 그들의 충성은 결국 돈이다. 돈만 많이 쥐어준다면야 대선장이 마법사건 선장이 시체가 되었건 별 문제 삼지 않으리라.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와중, 윌리엄이 그러고 보니 하면서 말을 꺼냈다.

“어저께였나 반도 도시 국가에서, 그 피렌체였나 쪽에서 사람이 왔다던데. 정기적으로 통과세를 낼 테니 자기들 선박은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윌리엄의 말에 홉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치들은 지중해에서만 노는 놈들 아닌가? 이교도 술탄국이랑도 사이 나쁘지 않은 것들이라 향신료 무역엔 지장 없을 텐데 왜 굳이 대서양 쪽으로 나오겠단 거지?”

“뻔하지. 에프레카를 돌아서 무역로를 개척해보겠단 거지.”

“힘들 텐데.”

항로 개척의 어려움을 아는 홉킨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에프레카를 빙 돌아서 무역로를 개척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어왔다. 당장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대서양 건너편에 힌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한 악명 높은 모험가에 의해 발견된 것이지 않은가.

에프레카를 돌아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많았다. 다만, 그 성공한 경우가 끝이 안 좋아서 그렇지.

카스테냐의 경우는 향신료 무역을 개척은 했는데 신대륙이라는 황금의 땅이 발견되어 다소 소홀해졌다.

니아트리브도 성공은 했지만 그 역시 신대륙 발견으로 인한 정세 변화로 에크나르프 견제하랴 카스테냐 견제하랴 하면서 그냥 예전처럼 지중해 향신료 무역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중 제일 불행한 경우는 레흐텐이지.”

“아, 희망봉에 떠돈다는 유령선 얘기 말인가?”

유령선.

헛소문인지 아닌지 진위여부부터 의심하게 만드는 단어.

유령선의 이름은 플라잉 레흐텐(Flying rehten). 날아다니는 것처럼 빠른 레흐텐 배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었다.

“듣자하니 희망봉을 넘어갈 때 폭풍에 휩쓸렸다가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던데.”

“이유가 좀 엉뚱한걸. 역시 헛소문 아냐?”

“헛소문이라기엔 날씨가 험해서 신빙성은 있다 하던데? 어쨌건 그 유령선 때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희망봉 주변은 늘 폭풍우가 치는 곳이 되었다나? 다른 나라들은 국제 정세상 손을 못 뻗는다고는 말하지만 그건 사실 다 핑계고 그 요상한 폭풍 때문에 막혀서 못 가는 걸지도 몰라.”

“레흐텐만 불쌍하게 됐지. 그 전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돈 잘 벌던 부자 나라였는데 희망봉 막히자마자 아주...... 쯧쯧.”

엘츠아 가문 및 카스테냐에게 목줄이 붙잡혀 있던 레흐텐은 독립이 되자마자 바다로 나가는 데 제일 적극적인 나라였다. 유로파에서 힘쓸 수가 없으니 눈을 바깥으로 돌린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나라보다도 일찍이 에프레카를 넘어 동쪽으로 진출한 국가였다.

힌디의 동쪽 섬들을 식민지로 삼고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북쪽 대륙에 깃발을 제일 먼저 꽂기도 했다.

향신료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려 받는 술탄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싼값에 대량으로 향신료를 유통하여, 유로파의 향신료 무역 중심지임과 동시에 금융 중심지가 되어 한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국가가 레흐텐이었다.

물론 희망봉이 막힌 이후에는 북해 무역과 신대륙 식민지로 겨우 먹고 사는 그저 그런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

“......”

바다 사나이들의 이야기에 아는 게 없어 끼어들 틈이 없는 두 기사는 그저 멀뚱멀뚱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령선 얘기가 나오자 브란트가 슥 껴들었다.

“유령선이라면, 주군께서 한번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시체를 다룬다. 유령선 역시 유령인지 시체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살아있는 것들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소년의 손에는 악마 중의 악마라는 사탄도 있지 않은가. 악마의 저주를 풀건, 수하로 삼건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있다고 치고, 유령선을 잡겠다고?”

“그래. 특히 레흐텐이나 카스테냐에겐 좋은 미끼가 될 걸세. 희망봉을 뚫어준다는데 그냥 귀족이 아니라 명예 왕족 대접도 해줄지 모르지.”

“나쁘지는 않은 시도인데, 과연 주인님께서 가능할까?”

“주군의 마법실력은 지금도 상승하고 계시네. 우리가 마법사가 아니니 얼마만큼 강해지셨는지는 모르지만 가끔 느껴지는 주군의 기운은 정말로 광대해. 그래서 그런데, 마법사라도 납치할까 하는데.”

“마법사를?”

“그래. 주군께선 우리 둘 못지않은 몸놀림과 힘을 가지고 계시네. 아니지, 그 이상이지. 트롤과의 힘싸움에서도 이기셨지 않은가. 그쪽 방면으론 우리가 지금 수련을 시키고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마법은 아니야. 독학도 나름 좋긴 하겠지만 스승이 지름길을 알려준다면 더 좋겠지.”

“지금 해적한테 마법사를 잡으라 하는 건가? 잡는 건 둘째 치고 바다로 잘 나오지도 않는데?”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지. 듣자 하니 해적 마법사도 있다던데.”

“해적 마법사는 대부분 사략함대고 이 주변엔 없어. 애초에 뛰는 무대가 달라.”

“연안 여객선이나 해안 운송선은?”

“미쳤어? 그런 데는 십중팔구로 귀족도 탄다고.”

“니아트리브나 에크나르프 쪽으로 가면 돼. 어차피 거기랑은 척졌잖나.”

“끙...... 맞는 말이긴 한데 위험성이 조금......”

그렇게 간부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소년의 지배하에 있는 이들의 머릿속으로 천둥 같은 소리가 내리쳤다.

[모두 전투 준비!]

모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래를 설계하고 있던 간부진도, 저마다 즐기고 있던 죽은 선원들도, 저마다 한창 약탈할 거리를 찾던 해적선장들도.

[아소르스 제도 동쪽에서 니아트리브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

소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저번에 여기에 왔다던 그 물마법사야!]

***

대규모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걸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테르세이라 섬 남쪽에서 희생양을 찾아 돌아다니던 해적 선단이었다. 가끔 길을 잘못 들어 아소르스 제도 내부에서 포착되는 선박도 있었기에 그들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일선 간부’가 포함된 해적단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로만 이뤄진 해적단인 그들은 카락과 슬루프 열 척으로 이뤄진 선단이었다.

“어이! 뭐 보여!”

갑판의 해적이 돛대 위에 해적에게 외쳤다.

“......”

“왜 대답이 없어!”

“적이다!”

돛대에서 황급히 내려온 견시병은 망원경을 휙휙 휘두르며 기겁한 표정이었다.

“대선단이다! 해군이 틀림없어!”

“어느 나라인데?”

“몰라! 붉은 바탕에 노란 그림이야!”

그 증언에 선장이 기겁했다.

“이런 씨발! 니아트리브잖아! 얼마나 있는데!”

“수평선이 죄다 꽉 차있었습니다! 최소 오십 이상!”

뭐? 몇 달 전에 그렇게 휘저어 놓고 또?

“튀자.”

튀어야 산다.

모두가 정색하며 제 위치로 달려갔다. 저 멀리에 있으니 다가와서 포격전을 하려면 한참 걸리겠지. 이 선단은 저들보다 작고 빠른 배로 이루어져 있으니 지금 빨리 달리면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에 시야에 들어가는 순간 도망가는 건 틀렸다는 걸 몰랐다.

“해적선입니다.”

망원경에 눈을 댄 채 한 장교가 보고했다.

“나도 보인다.”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배경으로 엘리자베스 스펠위버가 눈에서 시퍼런 광망을 쏟아냈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해적선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똑똑히 보였다.

“해적 소탕의 첫 제물로 나쁘진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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