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53화 (54/128)

53화

물마법사와 사령술사-1

포위당해 쫄쫄 굶던 여덟 개의 해적단은 결국 닷새 만에 항복했다. 테르세이라 세력이 그간 행했던 약탈과 방화 탓에 남은 보급품이 얼마 없던 탓이었다.

세력 간 싸움에서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고만 있던 조그만 해적단들은 대세를 인정하고 새로운 패권자에게 충성맹세를 줄이어 했다. 괜히 미운털 박혔다가 목매달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이로써 갑자기 나타난 해적단은 수백 개의 군소 해적단이 난립하는 해적 소굴 아소르스 제도를 일통했다. 그 소식이 퍼지면 일대의 국가들은 긴장하며 머리를 한껏 굴릴 것이다.

어려 보이는 소년이 우두머리가 되면 해적들이 따르지 않을 걸 우려하여, 간부들과의 상의를 통해 브란트를 ‘대선장’으로 내세우고 소년은 막후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해적들은 새로운 지배자가 전쟁으로 인한 손해를 메꾸려 권력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벌벌 떨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소년은 해적들의 상납금을 줄여 민심을 다독이고 불태웠던 해적소굴을 재건하는 데에 우선 힘썼다.

이기적이고 뒤통수를 늘 조심해야 하는 해적들에게 이런 자비로운 처사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득이 되니 해적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대선장을 따르기는 해보자는 걸로 귀결되어 차츰 안정되는 추세가 되었다.

다만 입에 오르내리는 비밀스러운 면은 적잖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늘 바다 한가운데 둔 선단을 들 수 있었다. 한두 척이 아니라서 바다 한가운데가 마치 번화한 항구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선장은 기함 장교의 취미 호와 양옆의 두 척만을 대동하고 다녔고, 나포하여 얻은 배 수십 척을 대체 무슨 목적인지 바다 한가운데에 고스란히 모아 놓았다.

문제는 그 배들이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살아있다면 분명 먹을 것도 필요하고 주기적으로 손상되는 배를 관리할 자재 등을 적재하기 위해 항구에 들러야 할 텐데 그런 모습이 전혀 안 보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찜찜한 것은, 패권다툼 때 연락이 끊겨 실종되었던 배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의문을 증폭시켰다.

또한 은근히 해적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대선장님은 마법사래!”

“선장님이 영생을 얻었다나?”

“에이 말도 안 돼!”

혹시라도 사령술 소문이 새어나가 니아트리브의 공격이 올 것을 대비하여, 모든 시체가 된 이들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라 명령했다.

그러나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는 법이다.

시체로 가득 찬 배는 한곳에 몰아두어 접촉을 최소화 해 문제가 없었지만, 부하들과 부대끼며 선단을 조종해야 하는 시체 해적선장들의 경우는 달랐다.

해적선장들의 행동이 이전과 다르게 은밀해지고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꺼리기 시작하자 그 측근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측근의 잠복 혹은 선장의 실수 등으로 인해 선장이 썩어가는 증거를 포착한 이들에 의하여 약간의 정보가 새어나가 이리저리 퍼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는 정말 적었기도 하고 허무맹랑한 소리라 헛소문이라고 폄하당할 만도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해적단이 순식간에 제도를 일통한 전무후무한 사건과 겹쳐 생겨난 소문이라 암암리에 해적들 사이를 떠돌았다.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이 소년의 귀에 들어가자, 소년은 입이 가벼운 놈들은 제아무리 중요 직위라 해도 죽이거나 처벌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시체가 된 선장들은 ‘감히 대선장님의 명예를 훼손하다니!’ 하는 핑계를 대며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을 징계했다. 언제부터 해적이 그리 충성심이 높았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칼이나 채찍을 맞고 싶지 않은 해적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약간은 소란스럽지만 내실을 다지는 평화로운 기간이 지나갔다.

***

유로파 어딘가에 있는 마법사들의 도시.

이곳은 마법사 연맹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중심부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다양한 마법사들의 물결을 헤치고, 이슬람권의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복장의 중년 남성이 바삐 길을 걸었다.

술탄국 제일의 점성술사이자 이슬람권 전체 점성술사의 권위자인 압둘 나세르는 터번에 이어 자신을 쳐다보는 경멸 섞인 시선을 무시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가 향한 곳은 커다란 수정구가 간판 옆에 걸린 점성술사 조합이었다.

“아니, 나세르 교수님이시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슨 일인지 1층에 내려와 있던 점성술사 조합장이 나세르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카톨릭의 그늘 아래인 유로파 한가운데에 위치한 마법사 연맹 본부라 거리에서는 이슬람 쪽 인물에 대해 적대시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점성술사 조합에서는 정반대로 나세르는 엄연한 권위자였다.

위대한 제국 멸망 이후 카톨릭의 지배 하에서 점성술사들은 사교라고 탄압받았었다. 그들이 이슬람 쪽으로 많이 도주했기 때문에 점성술사들의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은 묽었다.

“반갑소. 하지만 지금 인사할 때가 아니오. 지금 당장 각지의 점성술사 권위자들을 모아주실 수 있겠소? 급한 일이오.”

“저, 혹시, 별의 분노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맞소. 혹시 조합장도?”

“예. 보시지요.”

조합장이 팔을 들고 조합건물 1층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가리켰다.

브르타뉴 드루이드 우두머리, 스칸디아 룬 마법사 부족장, 마그라니아의 제사장, 우랄 컬트 주교......

원시종교에서부터 이어져 온 유로파 각지의 점성술사들의 수장들이 모여 있었다.

“이런, 급해서 미처 못 보았습니다.”

나세르는 자신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유수의 점성술사들에 인사를 올렸다.

“괜찮소이다. 교수의 말대로 지금은 편히 앉아 인사할 때가 아니니. 모두들 별이 분노하는 사태를 직관했으리라 보오.”

늑대가죽을 통째로 벗겨낸 망토를 쓰고 밑으로 갑주를 입은 스칸디아 룬 마법사 부족장이 거칠게 기른 회색 수염 밑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이들 모두 조합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먼지나 흙이 옷에 묻어있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조합장의 안내에 따라 유로파 및 이슬람의 점성술사 권위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

“그래, 나세르 교수. 별에 대해 알아낸 게 있는가?”

드루이드 우두머리가 쓰고 있던 사슴 두개골 투구를 내려놓고 말했다.

카톨릭의 치세 아래 억압받았던 유로파의 점성술 계파들은 발전이 더뎠으나 이슬람의 점성술은 화려하게 꽃피었다. 나세르의 직함이 교수에 불과함에도 한 계파의 우두머리와 동급인 이유였다.

발전한 이슬람권의 점성술로 유로파 점성술사들이 못 본 것을 나세르는 보았을지도 모른다.

“저도 그렇게 많이 알아낼 순 없었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별이 이렇게나 분노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별은 인간사에 무심하지. 엘프와 용이 그 사단을 냈을 때도 화는커녕 구경하기만 바빴던 게 별이라는 작자들이니까.”

발칸반도 북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온 음산한 느낌의 점성술사가 중얼거렸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별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수백 년 전 엘프 대침공 때 많은 피해를 입었던 지역 중 하나였으니 그럴만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주물럭거리려 드는 오만한 것들이지. 이렇게까지 분노한 전례가 없긴 하지만 그 이유는 뻔하지 않겠나?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생긴 걸 테지. 별이 분노했을 때는 늘 마법계에서 이단아가 탄생했을 때뿐이었으니까.”

마법계의 이단아들.

최초의 사령술사, 어둠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 주장한 이론마법사, 계급제를 철폐하자 주장한 붉은 마법사, 종교 개혁을 주장하던 대주교이면서 마법사였던 빛마법사 등등.

시대가 요구하는 기준에 벗어났기에 이단아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때문에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린 그들의 최후는 모두 좋지 않았다.

마법계의 이단아 말고도 별들이 조금이라도 분노한 이들은 좋건 나쁘건 사회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이들이었다.

지금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던 시절엔 별을 숭배하던 사람들은 별이 분노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원인을 죽이려 들었다. 별이 인류를 조종하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별에 대한 증오는 그쯤 하시오. 별이 분노했을 땐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인물 말고도 많은 죽음을 불러온 악한도 있었으니.”

“흥. 그들이 괜히 그렇게 되었겠소. 다 세상이 만들어낸 산물이지. 별은 그걸 용납지 못하는 것뿐이 뻔하오.”

“자자, 두 분 진정하시지요. 지금은 별의 과오가 문제가 아니라 분노가 문제잖습니까.”

말싸움으로 발전하기 전에 조합장이 드루이드와 트란실바니아 대사제의 대화를 끊어냈다. 다시 좌중이 조용해지자 나세르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별의 과오와 그에 대한 의심은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런 전적이 있는 별들이 이번만큼 분노한다는 건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날 것이거나 일어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이백년 동안 간헐적으로 원정대를 보내 싸운 수십 차례의 십자군 원정 때도, 유로파는 물론이고 이슬람권 동부, 힌디 북부, 동방 전체를 석권한 유목 국가 엘프와 푸른 용의 대학살 때도, 신대륙 발견 이후 학살에 가까운 약탈이 이어져도 별들은 잠잠했다.

하지만 별들이 분노했을 때는 단일 인물 혹은 세력에 의해 큰 반향이 일어날 때였다. 국가 간 분쟁보다 인물 혹은 국가보다 작은 세력을 더 경계하는 별이라니.

“인물일지 세력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선 사단이 반드시 일어날 겁니다. 별이 그토록 증오하는 일이라면 필시 이전에 있던 일들보다 큰일을 몰고 올 테니까요.”

“듣자하니 니아트리브와 에크나르프에서 사령술사가 나타났다 하던데. 혹시 별이 주목하는 게 그 사령술사 아닐까?”

“제가 본 바로는 별의 시선은 대서양 동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즉 유로파 혹은 이슬람권 내에 있단 얘기지요.”

“별의 시선이라! 별이 어딜 보는지까지 그렇게 상세히 알아내다니. 나세르 교수의 점성술은 꽤나 본받을만 하오.”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사령술사 소문을 더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에크나르프 북서부 브르타뉴 반도에서 온 드루이드 우두머리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아직 두 나라에서 다소 쉬쉬하고 있는 데다 어디까지나 소문에 의한 추측일세. 니아트리브에선 린던에서 사령술사가 나타났다 하고, 에크나르프에선 보르도였나 하는 도시에서 사령술사가 대규모 약탈을 했다고 해.”

“둘이 동일인물이랍니까?”

“그것까진 모르오. 그저 문제를 일으켰단 것밖엔......”

“사상자는 얼마랍니까?”

“니아트리브는 잘 모르겠고, 에크나르프 왕실에서는 천 명 정도 된다 하던데. 해적의 습격이라고 얼버무리는 걸 보니까 보나마나 축소했겠지. 정확히 알아보려면 귀족 사교계에서 정보를 알아봐야 할 걸세.”

“사상자는 대략 두 세배로 보면 되겠군요. 마법계는 뭐랍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야. 진짜배기 사령술사는 옛적에 다 죽었고, 지금은 악마와 계약한 놈들만 사령술을 쓰잖나. 사상자가 제법 되긴 해도 그 정도면 따로 마법계가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죽을 거란 전망일세.”

“그럼 그 사령술사는 아니겠군요.”

악마와 계약한 사령술사의 수명은 매우 짧으니까 말이다.

영악한 악마는 계약자의 영혼을 뺏기 위해 오래 살려두고 싶지 않아한다. 건강이나 젊음, 권세를 달라는 거면 모를까, 사령술의 경우처럼 ‘힘’을 받는 경우는 더더욱 짧아진다.

목적 달성을 조건으로 자신의 혼을 직접 바치던가, 힘에 취해 먹혀버리거나 자만해 계약상의 실수를 저질러 혼이 달아나버리기 때문이다.

“요즘 교황청이 바쁘다고 들었어.”

스위체 연방 점성술사 협회장이 발언했다.

“교황청이요?”

모두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실증은 없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카톨릭 세력 내에도 예언자나 점성술사가 있으리란 심증은 많았다. 유로파의 다른 점성술을 박해했음에도, 정작 카톨릭에서는 별을 신들의 사자로 여기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어떤 점성술사라 하더라도 별이 화났다는 걸 알아볼 수 있을 때에, 유로파의 그 어떤 점성술사보다 뛰어난 점성술 기법을 가지고 있으리라 추정되는 교황청이 움직인다?

“교황청 역시 이 일을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우리조차 모르는 무언가의 실마리를 찾았거나.”

“교황청도 움직였다면...... 악마 숭배자나 적그리스도일 수도 있겠군요.”

“악마 숭배자 문제라면, 마법계에서도 움직였을 거야. 하지만 그런 기미는 없어.”

“장담할 수는 없지요. 마법계는 넓고, 우리가 모르는 조직도 수두룩하잖습니까.”

모두가 떨떠름하게 그 말에 동의했다.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마법이 모두 모이는 마법계다. 겹겹이 커튼이 쳐져 있다고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마법계엔 비밀조직이 많았다.

“그렇게 따지면 가능성이 너무 늘어나는데. 혹시 모두들, 별들이 분노하는 그 당사자의 별이 관측되진 않았나?”

스칸디아 룬 마법사 부족장의 물음에 나세르를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별이 분노하는 당사자가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별빛의 치우침이 일어난다. 그 중심부는 당연하게도 분노한 당사자다. 하지만 이번 격노는 치우침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야. 하늘에 기록되지 않았다니.”

“악마가 지옥에서 기어나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는 게 없어서 미칠 지경이군.”

“하늘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자부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어.”

시장 한복판처럼 한마디씩 하며 의견을 나누는 수십의 점성술사들. 그들의 논의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보가 부족했다. 마법사 연맹에서 그리 힘이 크지 않은 점성술사 조합은 평소 닿아 있는 선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대마법사들이라도 찾아가야겠어.’

나세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강한 마법사란 의미의 대마법사가 아닌,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라는 의미의 ‘대마법사’

‘그분들이라면 점성술사들보다 별에 가까워진 분들이니 어쩌면 좋은 조언을 주실지도 몰라.’

속세를 벗어나 함부로 아래 일에 개입할 수 없어진 초월자들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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