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12
카스테냐에 갔다 오는 동안 이렇게나 전황이 바뀌어 있을 줄은 몰랐던 해적 연락선은 소년의 해적단에게 간단히 나포되었다.
그로 인해 소년의 하수인들은 연락선이 지니고 있던 카스테냐의 도움 거절 의사를 알게 되었다.
“잘 됐네요. 카스테냐의 구원군은 없으니 이대로 말려죽이면 될 듯합니다.”
“이제 독안에 든 쥐인데 굳이 기다릴 필요 있습니까? 수적으로도 우세인데 그냥 밀어버리죠!”
의견은 브란트와 윌리엄으로 또 갈렸다.
-피해는 최소한으로!
-아니다. 어차피 불사 선원으로 밀면 그만이다!
소년은 이번엔 브란트의 손을 들어 주었다.
피쿠와 파이알 세력권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으니 이리저리 조각난 해적단들을 그러모아 세를 불리는 것에 더 집중하자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명성을 얻고 카스테냐와 접선하겠단 계획도 있었으니 안정화를 서둘러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담당은 아소르스 제도를 잘 아는 윌리엄에게 돌아갔다.
“하하! 그건 당연히 제가 적격입죠!”
브란트에게 밀려서 부루퉁해진 것도 잠시, 일이 맡겨지자 호쾌하게 웃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윌리엄.
“아무래도 저 친구는 주군께 인정받는 게 목표인 거 같아.”
홉킨스가 중얼거렸다.
음모와 술수가 가득한 해적 사회에서 지낸 윌리엄이다. 아무래도 세 간부보다 늦게 들어온 만큼 정치적인 입지가 떨어져 무언가 공을 세워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럼 주군께 나쁜 버릇 알려주는 것도 도움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두겠네요.”
“조만간 귀띔해줘야겠어.”
오르네리와 브란트가 윌리엄의 성격을 대충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주군께선 아직도 밑에 계시나?”
그랬다.
그들의 회의는 소년을 끼고 진행한 게 아니었다.
회의를 지켜보고 있다가 의견이 갈리자 소년이 그들의 머릿속으로 자신의 결정을 전달한 것이었다.
“나오신 걸 못 봤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홉킨스의 말에 브란트가 갑판에서 일어나 선내로 들어갔다. 한 배의 선장이 머무는 선장실을 지나치고, 선원들이 지내는 일반적인 공간도 지나쳐 계속 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하여 브란트는 배 맨 밑바닥, 균형추 역할을 하는 바위 사이로 바닷물이 찰랑이는 곳에 절그럭거리는 갑주를 디뎠다.
원래 밑창은 물과 식량 등을 싣는 곳이지만, 굳이 맛대가리 없는 선상 비상식량과 얼마 안 가 변질될 물을 먹을 이유가 없어져 지금은 모두 치운 상황이었다. 대신 바닷물이 스며도 어느 정도는 괜찮은 보물들을 싣는 곳이 되었다. 바위 사이로 금화가 이리저리 떨어져 등불 빛에 반짝였다.
소년이 있는 곳은 장교의 취미 호에 갓 들어왔을 때 배정받은 바로 그곳.
사방이 칸막이에 가로막힌 좁디좁고 초라한 곳이었다.
“......”
끼익거리는 나무 삐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등불 하나를 벗 삼아 해먹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두침침하고 습기 찬 배 밑바닥에서 이런 볼품없는 생활이라니.
보기만 해도 숨 막힐 듯 답답한 좁은 공간에서 소년은 잘도 견디고 있었다.
옷은 여전히 검은 천을 아무렇게나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 천 밑으로는 소년이 이 배에 처음 탔을 때 지급된, 헐렁해 끈으로 칭칭 동여맨 선원복을 입고 있으리라.
아소르스 제도라는 대형 해적 소굴의 지배자를 코앞에 둔 인물이라기엔 너무나 초라했다.
“아직도 여기 계십니까.”
“무슨 일이야?”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소년이 물었다. 책 표지에는 ‘마력의 운용법’이라고 고급스러운 필기체가 쓰여 있었다. 기초 마법서까지 있었다니. 대체 선원들이 어딜 털어온 건지 원. 그 옆에는 마력의 특징, 선천 마력의 종류 등등 ‘마력’ 글자가 들어간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왜 넓은 데 안 계시고......”
“싫어서. 불편해.”
소년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릎에 책을 올리고 한 손으로만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는 몸짓에서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풍겼다.
귀족의 몸가짐은 다 배웠지만 소년은 저 볼품없는 옷차림과 거주공간을 부득불 유지하고 있었다. 빈민가에서의 생활이 오래 몸에 배인 건가 하고 브란트는 생각했다.
“선장실에 비슷한 걸 마련해놓을 테니, 위로 올라오시죠. 배 밑바닥에 계시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힘듭니다.”
“......”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보라고 손짓했다. 단기간에 바로 올라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생각에 바로 올라가지 않고 조금 주저하는 브란트를 소년이 다시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곤 가볍게 손짓했다. 손짓에서부터 기이한 기운이 브란트에게 흘러들었다.
소년의 근본을 이루는 힘이자 죽은 자들을 살아있게 유지하는 힘. 그 힘이 브란트에게 흘러들었다.
브란트가 놀란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생전에 기사 수련을 거듭하면서 몸속의 마력을 조금씩 성장시켜 갈 때 느꼈던 감각과 동일했다. 즉, 브란트의 힘이 늘어난 것이다.
소년은 관심이 없는 건지 이 정도는 별 거 아니라 그런 건지 무덤덤하게 책장을 넘길 따름이었다.
브란트는 깊숙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는 소년을 대신해 대소사를 이끌고 상의하는 브란트에게 내리는 상이리라. 표정도 말수도 적은 소년이라 제대로 표현은 하지 못하지만 소년도 고마움이라는 개념은 알고 있었다.
일전에 보르도에서 여러 음식을 맛본 뒤, 소년은 이런 환상적인 맛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한 적이 있었으니까. 책 읽는 것 같이 무덤덤한 말투여서 그렇지.
위층으로 올라가는 끽끽거리는 나무 밟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소년은 그런 브란트의 뒷모습을 살짝 쳐다보았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책에 따르면, 서로 다른 이가 품은 마력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했어.’
예외인 경우는, 가진 마력보다 불어넣는 마력의 크기가 극심하게 차이 날 경우와 원소 계열 마법일 경우였다.
전자는 큰 쪽의 마력이 작은 쪽을 잡아먹어 마력이 엉키니 반발하니 하는 부작용이 일어날 새도 없이 정리가 끝나는 경우고, 후자는 원소 계열 마법의 마력은 속성이 가미되어 있어 같은 속성일 때 나름 괜찮게 섞이는 경우였다. 때문에 원소 계열 학파에서는 같은 속성 마력을 제자에게 전수하여 실력을 끌어올리는 경우도 간혹 있다고 한다.
다만 절대 섞이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기사의 마력과 마법사의 마력이었다.
육신을 강화시켜 주는 기사의 마력, 외부로 방출해 다른 것에 영향을 끼치는 마법사의 마력. 수많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렇게 둘로 나뉘어진다.
옛날부터 어떻게든 마법을 쓰는 기사를 양성하기 위해 연구가 숱하게 진행되었지만, 둘 다 수련하려고 했다가 마력이 꼬여 죽은 이만 무수히 만들어냈기에 지금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검술을 익힌 마법사나 근접전 전문 마법사도 없는 건 아니지만, 순수한 육체적 능력으로만 따지면 기사에는 다소 뒤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 기사만큼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난 된다.’
브란트와 오르네리. 두 기사는 죽기 전에 기사의 마력을 품고 있었다. 마력을 품은 이가 죽으면 그 마력이 흩어진다고는 하지만 천천히 흩어지는 거라 짧은 시간 만에 부활한 두 기사는 기존의 마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마법을 발현하고 운용할 수 있어 마법사의 마력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년의 힘을 잘만 흡수했다. 엉키거나 반발하기는커녕 부드럽게 맞물려 힘을 키워준다니.
‘내 힘은 마력이 확실히 아니야.’
기존엔 선천 마력인줄 알았으나 마력과는 다른 특징이 여럿 있어 의심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선천 마력이란 것이 정말 종잡을 수 없이 수많은 종류가 있다 보니 아주 특별한 선천 마력일 가능성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소년은 자신이 가진 힘이 마력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선천 마력은 선천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장본인에게만 딱 맞는 성질이라 오히려 섞이면 더 큰 반발을 일으킨다고 하니까.
아무리 소년의 하수인이 되었다한들 기사의 마력은 기사의 마력이다. 저 두 기사가 가지고 있는 마력의 느낌은 살아있을 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때문에 소년의 힘이 선천 마력, 즉 마법사의 마력이라면 서로 섞이지 않아야 했다.
‘혹시 내 힘은 마력을 집어삼키는 기능도 있나?’
소금이 물에 녹듯, 소년의 힘도 다른 성질의 마력을 동화시키는 걸까? 두 기사의 힘이 아예 소년의 힘으로 대체되어 섞이니 마니 하는 일이 사라지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두 기사는 마법을 전혀 쓸 수 없다. 아니면 기사들이 그저 마법을 써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걸까?
소년은 내면에 자리한 커다란 돌덩이에게 물었다.
‘정말 네 정체는 뭐니?’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배의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밑창에서 은은히 울렸다.
그럼 그렇지. 많은 걸 알고 있는 거 같던 별을 보는 노인도 모른다는데.
소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을 체내에 집적하여 근육과 신체의 강도를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이 바로 기사가 가진 마력의 쓰임새였다. 마법사의 마력과는 사용 용도도 응축하는 방법도 다르다보니 충돌하는 건 당연한 일.
‘혹시 나도 기사처럼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소년의 신체 역시 소년의 힘으로 이뤄져 있다. 강해질수록 소년의 육신 역시 더불어 강해진다.
이는 기사의 마력 운용법을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제는 황소를 가볍게 내던질 수 있는 트롤과의 팔씨름에서 가볍게 이길 정도다.
브란트와 오르네리는 소년에게 기사의 재능이 있다며 훈련을 받자고 권유했지만 아소르스 제도를 섭렵하는 것으로 바쁘기도 했고, 검을 휘두르는 것보단 마법에 관해서 더 관심이 있었기에 나중으로 미루었다.
소년은 이미 빈민가에서부터 기사 수준의 몸놀림을 가지고 빈민들과 마법사 로드릭을 사냥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때는 별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두 기사의 몸 쓰는 솜씨는 그저 자신에 비해 한없이 높아만 보였으니까.
‘아무래도 기사의 마력 운용 방식을 확실히 알아봐야겠어.’
약탈한 책들은 아무래도 특정 마탑의 도서관을 털은 모양인지 ‘보르도 마탑에서 개발함’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게 많았다. 그래서 마법에 대한 서적이 더 많아 직접적인 기사의 마력 운용 방식을 알기엔 여건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국가 혹은 가문 대외비기도 했고.
결국 기사의 마력 운용법을 배우려면 브란트와 오르네리에게서 기사 훈련을 받아야 한단 얘기였다.
‘두 직종의 마력 움직이는 방식을 잘 연구한다면, ‘마법 쓰는 기사’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기사니 마법사니 하는 구분이 없는 소년의 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했던 걸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그건 곧, 소년을 거부한 세상 앞에서 콧대를 당당히 세울 수 있는 일이 된다. 봐라, 너희들이 거부한 내가 너희들이 이루지 못했던 업적을 세웠다! 하고 말이다.
세상에게 선전포고를 날린 소년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승리의 깃발이리라.
소년의 책장 넘기는 속도와 눈동자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