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11
에크나르프 남부의 어느 한 지방.
한 무리의 기사 일행이 어둑해지는 하늘 밑으로 터덜터덜 말을 몰고 있었다. 종자가 들고 있는 창대에서는 이 지역 영주의 가문 문장이 수놓아져 있는 깃발과 등불이 걸려 있었다.
광택이 났을 갑옷과 망토 위엔 흙먼지가 내려앉았고 기사와 종자들은 노숙을 하느라 지친 몸을 뉘일 곳을 필요로 했다.
종자 하나가 ‘괴물은 무슨 괴물이야.’하고 투덜거렸다. 기사를 포함해 모두가 잠잠한 걸 보니 다른 이들도 격하게 공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이 벽촌까지 파견된 이유는 이 주변 지역 여러 곳에서 괴물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출동해보니 괴물은 고사하고 고작 늑대거나 밤중에 안광을 번쩍이는 초식동물에 놀란 것에 불과한 일도 빈번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크나르프 전역에서 늑대로 인한 인명, 재산 피해는 해마다 무려 수천 건에 달했기 때문에 아무리 괴물이 아니라 늑대라 한들 추살할 필요가 있었다. 진짜 괴물인 경우도 간혹 있었고.
“병사나 한 백 정도 풀면 됐지 기사까지 보내냐......”
“다 보여주기지 뭐.”
종자들도 견습기사인 동시에 귀족 출신이니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만, 휘둘리는 장본인이 되니 불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힘든 건 알겠지만 그만 떠들어라. 곧 불빛이 보인다.”
지친 일행의 눈에 저 멀리서 횃불이 불타는 조촐한 마을 하나가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코끝에 맴도는 뭔가 비릿한 향내.
“......인기척이 없는데.”
기사가 칼을 뽑아들었고 종자들도 마찬가지로 무기를 꺼내들고 기수 역시 창대를 기울여 날을 앞으로 향했다.
“앞장서라.”
거리가 긴 무기인 창을 들고 있는 기수가 겨드랑이에 창을 단단히 낀 채 앞장섰다.
가까워질수록 조촐하게 밝혀진 횃불 아래 마을의 상태가 서서히 드러났다.
“윽, 냄새.”
진한 피비린내가 모두의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마을 안은 쑥밭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집기들과 여기저기 튄 피에 처참하게 손상된 시체들까지.
“셋씩 붙어 움직여라. 너희는 교회, 너희는 밭, 나는......”
명령을 내리던 기사는 말을 멈추었다.
“그럴 필요 없겠군.”
으르릉......
크르르......
밤이 된 지 얼마 안 된 옅은 어둠 속에서 수십 쌍의 빛이 횃불의 빛을 반사해 번쩍였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의 네발짐승, 늑대들이 마을 곳곳에서 어슬렁거리며 튀어나왔다.
‘짙은 피냄새. 대담한 놈들이다. 마을 하나를 죄다 잡아먹었어.’
기사가 늑대 못지않은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칼을 다잡았다.
절그럭거리며 종자들이 서로의 등을 맞댔다. 기사는 그들이 걱정되었다. 자신은 몰라도 종자들은 피를 볼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긴장하지 마라. 해온 대로만 해.”
기사는 나직하게 종자들에게 경고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늑대 무리에는 대장이 존재한다. 그 대장만 잡으면 놈들은 꼬리를 말고 도주하리라.
‘어디 있느냐.’
늑대를 자극하지 않으려 천천히 목을 움직였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쪽으로는 무기를 겨누며 방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며.
이내 그는 늑대들 사이에 자리 잡은 독특한 녀석 하나를 포착했다.
‘개?’
아니. 개를 닮은 머리를 가진 무언가였다.
머리 형태가 늑대보다는 개를 닮았으나, 몸뚱이의 형상과 크기는 절대 개 따위가 아니었다.
‘무슨 몸이 저렇게......’
개의 몸은 무슨 수십 년 간 근력운동만 한 사람처럼 우락부락했다. 털이 덮인 살갗 위로 힘줄과 혈관이 도드라졌을 정도로 가죽이 팽팽했다.
그리고 어깨가 넓어 그런지 골격이 묘하게 사람이 엎드려 있는 것만 같았다.
“......”
개 같지만 전혀 개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는 어둠 속에서 기사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안광 역시 다른 늑대들과는 전혀 달랐다. 깊은 물속 같은 검푸른색. 그것도 하나밖에 없었다.
기사가 검을 놈에게 겨누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기사의 눈이 이해할 수 없는 걸 본 것처럼 크게 떠졌다.
“느, 늑대, 인간......?”
무언가는 분명 두 다리로 서 있었다. 터져나갈 듯 부푼 앞다리, 아니 팔은 땅이 아니라 허공에 있었다. 그 기이한 자세에 기사는 보름달을 보면 늑대로 변한다는 전설 속 이야기에만 나오는 늑대인간을 떠올렸다.
‘전설이, 아니었어?’
[크헝!]
곰의 울부짖음 같은 깊은 흉성을 터뜨리며 새까만 털을 지닌 놈이 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늑대들 역시 주둥이를 쩍 벌리고 칼날 같은 이빨을 드러낸 채 들이닥쳤다.
“으아아아!”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고함을 지르며 한 기사와 여섯 종자 역시 늑대들에게 무기를 찔러 넣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수적 우세와 몸이 베어져도 끝까지 물어뜯는 독기에 종자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모조리 무너졌다.
기사 역시 별반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그는 자신의 칼놀림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달려든 괴물에게 순식간에 팔을 잃고 엎어져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자신이 급수가 높지 않다고 한들 기사는 기사인데, 어찌 이런 짐승에게......
[크르릉......]
하나만 있는 안광 밑으로 침을 뚝뚝 떨어뜨리는 주둥아리가 쩍 벌어졌다. 혀는 잘렸는지 입 속으로는 뾰족뾰족한 이빨들과 뻥 뚫린 구멍만이 보였다.
“아, 안 돼! 으아아아!”
비명은 짧았고, 늑대들이 잔치를 벌이는 시간은 길었다.
그렇게 또 한 무리의 인간을 잡아먹은 놈과 늑대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은 그들을 잘만 질질 끌고 사라졌다.
또 다른 먹이가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리며......
***
아소르스 제도에서 온 해적 사신을 받은 카스테냐의 입장은 결론만 말하자면 NO였다.
아소르스 제도의 해적들이 미처 몰랐던 사실은, 아소르스 제도를 휩쓸고 돌아가던 니아트리브 함대와 카스테냐가 부딪혀 카스테냐가 대차게 깨졌단 것이었다.
무적함대가 무너진 건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함대가 출격했다가 니아트리브에게 된통 당했는데, 아소르스에 침투한 신흥 해적이 니아트리브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단 말까지 들으니 카스테냐의 입장에서는 니아트리브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해적 사신을 만난 카스테냐의 해군 제독은 고민했다.
‘니아트리브가 단단히 작정했어. 설마하니 고위 마법사를 배에 태울 줄이야.’
신대륙이 발견되고 해양 패권을 다투는 시대에 전투에 유용할 마법사를 태우는 것은 국가의 전력 향상에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열악한 해상 생활에 대한 마법사의 거부를 비롯한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여러 국가들은 아직 마법사를 적극적으로 바다로 밀어넣기에 주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근해에서 해전이 벌어진다거나 할 때만 마법사를 태우곤 했다. 그 이외는 마법사의 개인사정 혹은 사략함대에 소속된 극소수의 해적 마법사들 뿐.
그런데 니아트리브는 과감히 고위 마법사를 바다로 보내는 도전을 한 것이다.
‘역시 제 나라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나라답군.’
별별 기행을 벌이는 니아트리브라더니. 제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은 해군의 말로는 해일을 조종하고 크라켄을 불러낸다는 기상천외한 마법사였단다. 크라켄은 전설 속 괴물이니 사실은 물을 비슷하게 쓴단 얘긴데, 그 다리(?)의 크기가 전열함의 돛대 꼭대기까지는 닿는단다.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제독이 카스테냐 마법사들에게 물어본 바에 따르면 물웅덩이나 호수도 아니고 늘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그 정도의 마법을 쓴다면 원소 계열 마법의 종주국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고위 마법사가 분명하다는 암울한 얘기만 들었다.
하긴,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며 마법사를 태우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강력한 마법사면 귀족으로서의 지위도 높을 테니 귀족의 유흥거리 여객선에나 있을 번쩍번쩍한 시설을 장만해주고 보급도 최고로 마련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설마 마법사가 아소르스 제도에 숨어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테르세이라 세력권을 한손에 쥔 것도 그렇고, 나머지 세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정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물마법을 이용하여 승기를 잡은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니아트리브의 함정이라면 카스테냐는 도와주러 간 함대가 물에 수장되는 것은 물론이요, 카스테냐가 해적과 내통하고 있다며 온 유로파에 떠벌려질 게 뻔했다.
때문에 카스테냐는 파병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
***
우리 안에 가둔 토끼 신세가 되어버린 두 세력권의 신세는 암울했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며 휘하 해적단이 각자도생하겠다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상대방에 줄줄이 항복해 나갔다. 더 이상 세력권이라는 이름도 못 쓰고 이제는 중심 해적단 몇 개만 남은 상황.
총합 육십이 넘던 해적단은 고작 8개만 남아 파이알 섬의 소굴에 모여 전전긍긍하고 있는 신세였다.
소년은 배들을 동원해 섬으로 가는 모든 배들을 밤낮없이 차단하여 일종의 감옥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남은 해적들은 굶어 죽느냐 항복하느냐 두 개의 선택지만 남은 셈이었다.
“카스테냐, 카스테냐의 구원군은 언제 오는 거냐......!”
그들은 오지도 않을 카스테냐의 원군만 기다리고 있었다. 거절을 담은 연락선조차 상대방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