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10
피쿠 섬의 해적 세력을 이끄는 해적 선장은 입에서 불을 뿜을 듯 고래고래 외쳤다.
“이런 애미애비 없는 새끼 같으니!”
밤새 피쿠 섬의 동쪽 마을이 습격을 받아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생존자는 없음. 정박해 있던 배도 여덟 척이나 뺏겼다.
먼저 선빵을 당한 이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전쟁이다! 이 개자식들!”
피쿠 세력권은 다른 두 세력권에게 파발을 보냈으나.
“흐억! 적이다!”
선수상 위에 올라선 오르네리가 깔깔거렸다.
“까꿍! 반갑다 얘들아!”
연락선들은 마치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소년이 보낸 배에게 차단당했다. 이 소식이 다른 세력에게 전달되었을 때는 다른 세력들 역시 소년의 시체로 가득 찬 수십 척의 배들에게 각지를 공격당한 뒤였다.
시체가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은폐하기 위해 해적 소굴을 철저히 포위하고 단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하게 해 습격 소식이 퍼지는 건 더 늦어졌다.
“이 개자식들! 전쟁이다!”
“모두 태워버리겠어!”
그리하여 세 세력권을 모두 적으로 돌린 테르세이라 세력권.
“자, 대선장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파이알 섬의 파라이아를 공격한다!”
“우리는 이제 피쿠 섬의 마달레나를 공격한다!”
“우리는......”
1대3의 불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소년의 세력은 공격을 지속했다.
시체 해적선장들이 각각 다른 명령을 하달 받고 자신들의 해적단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하지만 정작 테르세이라 세력 해적들은 자신들이 세 세력과 모두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단 걸 몰랐다.
“명령 언제 내려왔지? 파발 본 사람?”
“여기 건드렸다가 세 개랑 다 전쟁 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1대 3을 하겠어? 머리가 있다면야.”
영문도 모른 채 해적들은 그 명령에 따랐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전원! 방향을 튼다! 우리는 다른 섬으로 간다!”
선장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일이 빈번했다. 일직선 경로를 마다하고 일정 지점을 크게 우회한다거나 난데없이 멈추고 회항하기도 했다. 해적들은 머리에 물음표를 띄워가면서도 명령을 따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테르세이라 세력권의 해적들이 귀신같이 병력이 적거나 텅 빈 소굴들을 습격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야 신기하네. 가는 데마다 텅텅 비었어.”
“잡담하지 말고 챙겨!”
“선장님이 챙길 거 챙기고 싹 다 태우랜다!”
테르세이라 해적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신나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한편, 나머지 세 세력권은 분통을 터뜨렸다. 무려 일대삼인데도 삼 쪽이 맥을 못추고 얻어터지고 있었다.
“아니 이 미친놈들 어디로 간 거야?”
분명 이쪽으로 오고 있단 정보를 들었는데 막상 예상 경로로 가보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전혀 오는 걸 못 봤는데!”
해상에서 수적으로 우위를 잡을 새도 없이 포위당해 두드려 맞아 패퇴했다.
“어떻게 안 거야!”
출정해 비어있다고 들은 해적 소굴을 공격하러 왔더니만 어처구니없게도 뒤에서부터 공격당하기도 했다.
“왜 자꾸 연락이 하나씩 끊기는 거야!”
몇몇 선단은 귀신같이 실종되었다.
더 기가 막힌 건 공격하려고 도착한 테르세이라 소굴들은 텅텅 비어 있거나 도착하면 병력이 와글와글했던 것이다. 마치 공격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제크 네놈이지? 어쩐지 예전부터 틱틱거린다 싶더니만!”
세 세력권들은 의심 가는 놈들을 추리면서 떠들썩했고 이는 제살 깎아먹기가 될 뿐이었다.
돛대에 앉은 갈매기가 혼란에 빠진 해적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
“허 세상에 이런 전과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결과군요.”
일주일 동안 아소르스 제도 전체에서 벌어진 해전은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82척 나포, 10척 침몰, 해적 소굴 22곳 약탈 및 파괴.
테르세이라 세력권 전체를 바쁘게 움직여 가며 만들어낸 전과였다. 연속된 승리에 이끌린 군소 해적들도 하나둘씩 테르세이라 세력권에 합류하여 상황은 긍정적으로 흘러갔다.
그에 반해서 아군의 손실은 13척 나포, 2척 침몰, 소굴 7곳 약탈 및 파괴.
그나마도 나포된 것은 다시 되찾아왔고, 약탈당한 소굴도 미리 병력과 재물을 빼놓은 곳이라 큰 타격은 아니었다. 피해도 소년이 직접 관여하지 않는 산 자로만 이뤄진 해적단만 피해를 입었을 뿐.
브란트가 감탄했다.
‘죽은 짐승을 통한 시야공유로 상대방의 정보 획득, 그리고 그 정보를 수하로 받은 해적선장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라니. 주인님의 명령으로 바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서 굉장한 이점이야.’
정보와 속도. 척후를 보내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빨리 상대방의 정보를 획득하여 움직이느냐는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소년의 능력은 전장에서 태양처럼 밝은 빛을 발할 수 있다.
당장 이번 전쟁의 결과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미리 침투시킨 시체 해적들을 상대방 소굴에 보내 병력 이동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쉴 새 없이 이동하는 선단에는 아군적군 가리지 않고 갈매기를 한 마리씩 붙여둔다.
그렇게 얻은 정보들을 시체 해적선장들에게 즉각 전달하여 적의 동선에서 벗어나 은밀히 행동하고 적의 빈집을 털어버리며 아군을 돕거나 적의 뒤통수를 후릴 각도를 잡는다.
대포알과 화약만 필요한 시체 해적선이 나설 경우는 적었지만 보급 횟수가 적어 더 오랫동안 숨어 있을 수 있어 전략적으로 쓰일 데가 많았다. 특히 연락선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하는 데는 요긴했다.
좁다고 할 수 없는 드넓은 제도의 모든 것이, 소년의 손아귀에서 주물럭거려진 셈이었다.
“......항복하겠소.”
그 결과 세 세력 중 상조르즈 세력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상대적으로 테르세이라 섬과 가까워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두드려 맞아 절반의 전력이 날아간 탓이었다.
피쿠와 파이알은 아직 세력이 건재하긴 하나, 그들도 각각 이십여 척 정도가 나포당해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빈집이긴 했지만 테르세이라 섬을 마찬가지로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상대방을 거꾸러뜨려야 했다. 공격을 미리 알고 철수하여 습격에 의한 피해는 없긴 했으나 죽은 자와는 달리 산 자는 보급품이 필요했으니까.
싸움을 빨리 끝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카스테냐에게 지원을 받자고 합의해 연락선을 보냈소.”
항복한 상조르즈 세력의 우두머리에게서 카스테냐를 끌어들이기로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해적과의 싸움과 정규 해군과의 싸움의 양상은 다르다.
해적은 선박 나포를 주 수입원으로 하고 있기에 순순히 백병전에 어울려 주어 함정에 빠뜨리기 수월하지만, 정규 해군은 선박 나포 말고도 포격전으로 파괴해버린다는 선택지를 택하는 것이 비교적 자유롭다.
“국가를 상대로 하면 골치아프겠군요.”
현재 테르세이라 세력권이 가진 배들은 소년 관할의 여덟 해적단을 합쳐 총 스물아홉 해적단 133척. 상조르즈 세력권은 총 스물다섯 해적단 92척.
아직 저항하고 있는 두 세력에게서 나포한 배와 선원은 가둬둔 상태기도 했고 그 빈자리를 채울 선원들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라 나포한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놀려 두어야 했다.
상조르즈의 합류로 인해 소년의 세력은 무려 225척이나 되는 대선단이 되었다.
하지만 소년의 힘은 이보다 더 컸다.
나포한 적 선박 82척 중 44척은 항복한 상조르즈의 것이고 그중 20척 정도만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왜 절반만 되돌려줬냐 하면 나머지는 소년의 배에게 직접 공격당해 모조리 되살아난 시체가 되었으니까.
그렇다. 소년은 시체로 꽉꽉 채운 선박만 무려 백 척을 넘게 가지고 있었다.
테르세이라 내부 세력 다툼 때 얻은 시체들과, 일주일간 싸움을 벌이며 만든 시체로 꾸린 선단이었다. 다만 이는 시체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제한적인 상황에만 쓸 수 있어 모처에 숨겨만 두고 있었다.
그것까지 다 합한다면 삼백 척이 넘는 대규모 해적 세력이라 누구도 소년에게 덤빌 수 없을 것 같지만...... 숫자는 그저 허울뿐이다.
70퍼센트 가량이 카락이나 슬루프 등 소형 전투선이거나 고작 무장상선 수준이고 50문 이상의 대포를 가져 전열함 구색을 갖춘 배는 단 다섯 척에 불과했다.
이 제도 하나에 이렇게나 많은 해적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배는 그보다 훨씬 많고 전열함급 배 역시 훨씬 많다. 작정하면 말 그대로 사백 오백 척을 동원할 수 있는 게 국가란 집합체의 힘이다.
물론 이번에 카스테냐가 고작 해적 싸움에 큰 함대를 이끌고 올 리는 없겠지만 소년이 카스테냐와의 싸움에서 이겨버린다면 카스테냐는 이를 경계하긴 할 것이다.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 세력이 자신의 숨통을 쥐는 꼴을 용납하기 힘들 테니까.
때문에 상대방 해적 세력이 카스테냐의 지원을 받겠단 소식은, 소년에게 이왕이면 해군력 1위 국가인 카스테냐의 귀족 작위를 받게 할 생각이 있는 브란트에게는 곤란한 소식이었다.
아무리 영원한 적은 없다지만 미운털 잘못 박혔다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건 정치판에서 흔한 일이다. 거기다 소년은 아직 귀족도 뭣도 아닌 일개 해적이다. 카스테냐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버리는 건 좋지 않았다.
“......해서, 우리도 카스테냐 쪽에 접선을 하는 게 좋을 듯해. 거래를 해서 카스테냐가 방관하도록 하자. 그치들도 해적의 세력다툼에 피해 입는 걸 좋아할 리는 없으니까.”
“뭐, 원래도 카스테냐와 은근히 손을 주고받긴 했지.”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했다. 테르세이라 세력권이 이전에 가장 컸으니만큼, 카스테냐와의 거래도 자주 한 적이 있어 익숙했다.
“내 생각은 달라.”
하지만 이번에는 홉킨스가 반대하고 나섰다.
“카스테냐가 아소르스 제도와 손을 잡아온 이유는 아소르스 제도가 카스테냐에게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곳을 네 개의 세력이 나눠먹는 게 아니라 강력한 세력 하나가 통일하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국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나 다들. 나라에 꽤나 귀찮을 수 있는 곳을 한 세력이 지배한다면, 자네들은 그들이 배신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 예컨대 니아트리브와 아소르스가 손을 잡는다는 가정을 하지 않을 텐가?”
“......!”
“카스테냐 놈들은 우리가 아니라 저 두 세력이 아소르스를 손에 넣는다 해도 간자를 침투시켜서 세력을 또 조각낼 게 뻔해. 아소르스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지 않아야 카스테냐가 조종하기 편할 테니까.”
브란트가 미처 생각 못 했었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면 해결 방법은 하나군.”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이렇게 된 김에 곧장 카스테냐의 귀족 작위와 거래하는 거다.”
아소르스 제도는 지중해의 키프로스 섬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해적 소굴이다. 토벌해도 계속 생겨나는 해적 소굴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국가가 직접 그 해적과 손을 잡는 것밖에 없다.
“원래는 아소르스 제도 일통 후에 명성을 좀 더 쌓고 그 다음에 카스테냐와 접선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 국가의 경계를 산다면 귀족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카스테냐의 밑으로 들어가자는 거래를 미리 하는 거지. 사략선단의 제독으로 말이야. 그러면 우리가 다른 나라에 빌붙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셈이니 신뢰도를 올릴 수 있어. 우리가 아소르스 제도를 평정한다면 최소 4백 척 이상의 선단은 꾸릴 수 있을 거고, 그걸 낼름 집어삼킬 수 있는 기회를 카스테냐는 거부할 수 없으리라 본다네. 물론 세력이 크니 견제가 좀 들어오긴 하겠지만 어차피 목표는 귀족작위야. 카스테냐가 술수를 쓰더라도 생각이 있다면 너무 바짝 조이진 않겠지. 언젠가 타국과의 전쟁에 써먹어야 할 테니까.”
추가적인 첩보나 공작을 할 필요 없이 일통된 아소르스 제도가 알아서 카스테냐에게 숙이고 들어온다면? 세금도 바치고 니아트리브의 사략선들에게서 보호해준다고 하면? 수백 척의 배들 중에 국가 간 함대전에 써먹을 만한 배들은 소수겠지만 작은 배는 작은 배 대로 쓸모가 있는 법. 공짜 사략선단을 거부할 리가 없다.
귀족 작위를 당장 안 준다고 해도 나중에 전쟁이라도 터져서 손이 부족해지면 저쪽에서 먼저 작위증명서를 팔랑거리겠지. 국가는 원래 그런 집단이니까 말이다.
“그걸 거부하는 게 바보지.”
“확실히 나쁘지 않네.”
“오오! 그런 방법이 있군요!”
간부들의 의견은 카스테냐에게 마찬가지로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다만, 그 시기가 늦은 만큼 카스테냐 본국으로 보내기보다는 두 세력을 돕기 위해 카스테냐 함대가 온다면 밀사를 파견해 은밀하게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근데 카스테냐가 안 오면?”
“그러면 일통 후 명성을 쌓고 접선하자는 기존 계획으로 가야지. 당장에 적대시하진 않을 거야. 얼마 동안은 지켜만 보겠지.”
***
카스테냐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피쿠와 파이알 세력권은 항구에 묶여 있어야 했다.
항구를 비우거나 조그만 선단이 정찰 등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즉시 습격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단체로 우르르 몰려 나가면 죄다 도망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부대를 쪼개버리면 어떻게 알았는지 그 즉시 쪼갠 부대보다 많은 배가 달려와 대포를 쏴댔다.
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이었다.
두 세력은 내부를 싹 다 뒤집어엎었는데도 정보를 계속 보내는 간자가 잡히지 않자 급기야는 우두머리끼리 서로를 의심했다.
“혹시 네놈이 신발 바꿔 신은 건 아니겠지?”
“이 미친놈이! 피해는 내가 너보다 커!”
“기껏해야 나포잖나. 선원이 얼마나 죽은 건지도 모르고. 끝나고 이권을 보장받는 거래를 한 거 아닌가?”
“하! 맘대로 생각하던가. 뒤통수치는 순간 너부터 죽인다.”
하지만 물증은 없고 공공의 적이 코앞에 있었기에 으르렁거리면서도 일단 손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카스테냐가 오면 두고 보자!’
‘카스테냐가 오면 두고 보자!’
둘은 벌써부터 카스테냐의 지원을 받은 자신들이 이길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