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9
횃불이 힘을 소진하여 살랑이고 화로에 지핀 불씨도 서서히 사그라드는 새벽.
“밤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갈매기가 많아?”
섬 근처 바다에 떠 있는 배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해적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은 그림자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별걸 다 불평하네.”
“불평이 아니고 신기해서. 끼룩대는 소리도 없고 조용히 날라다니는 게 신기해서 그렇지.”
“바다나 잘 봐. 언제 테르세이라 놈들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염병, 쳐들어온 거 같은데.”
“뭐?”
어느새 망원경을 눈에 대고 있는 보초병은 상대의 깃발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깃발 없어.”
테르세이라 세력을 칠 준비를 위해 세 세력권은 추가적으로 같은 깃발을 달자고 합의를 한 상태. 그런데 깃발이 없다?
어떤 머저리가 깃발 다는 걸 까먹었을 수도 있지만 세 척이 다 깃발이 없으면서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다는 것에서 볼 때, 머저리 아군이 아니라 적군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적이다! 비상! 비상!”
땡땡땡땡
종이 울리고 잠들어 있던 배가 급박하게 깨어났다.
아소르스 제도를 거머쥐기 위한 전쟁의 막이 올랐다.
***
브란트와 오르네리는 소년의 기함이나 다름없는 장교의 취미 호의 선수에 서 있는 소년을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 중앙갑판에는 서른 문에 달하는 대포들을 올려놓은 채 선원들이 화약과 포탄을 바삐 옮기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는 트롤 스프링밀이 머리를 긁적이며 빅커스에게 포탄 말고도 화약까지 장전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하이고 임마야! 화약 먼저 늫고 느라꼬!”
“으우?”
“하이고 속터져라. 그나마 조준은 할 줄 아니 다행이긴 흔데...... 에이 다시 한 번 드르봐라! 으이?”
트롤의 지능은 곰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 아무도 트롤과 곰과 인간의 지능을 비교해본 사례가 없었기에 확실친 않으나 일부는 알아듣는데 일부는 못 알아듣는 걸 봐서 대충 그쯤 되는 거 같았다.
“킁.”
스프링밀은 콧바람을 내면서 무작정 포탄만 슥 들어 몇 개고 대포 속에 밀어 넣었다.
“야! 한 개만 넣으라고! 잘못하면 대포 터진다고!”
화나면 사투리가 안 나오는 모양인지 열불이 폭발한 빅커스가 스프링밀의 허벅지를 퍽퍽 차댔다.
뒤편의 희극을 살짝 돌아보았다가 다시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린 두 기사는 자신들의 ‘주군’의 의중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전날 밤에 비로소 기사 서임식을 마친 터라 둘의 소년을 부르는 호칭은 주인님에서 주군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귀족이 되면 붙여주겠다고 약조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브란트는 설명 없이 명령만 내리고 따르라 한 독불장군 소년을 보며 불안해했다.
수적으로 몹시 열세인 상황이다.
해적들은 선박 나포를 위해 백병전을 선호하기 때문에 처음에야 죽지 않는 선원들을 동원해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패배하다 못해 포격전으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면, 까딱 잘못했다간 압도적인 선박 숫자 차이로 인해 포위되어 대포알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수 차이로 인해 전면전은 불리하며 이번 습격처럼 오로지 기습만 가능한데, 기습이란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탁 트인 바다에서 기습은 날씨와 시간대를 많이 타는 일이다.
선원들이 불사라고 한들 붙기도 전에 포격으로 배에 바람구멍이 나면 소용이 없다. 악착같이 버틴다면야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배가 가라앉아도 수영을 해서 상대 배에 올라타 싸움을 벌이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기는 게 과연 이기는 것일까?
‘그런 방식은 아니겠지.’
소년은 머리가 비상했다. 에크나르프 귀족 예법도 팔 하나가 없어 어색해보여서 그렇지 곧바로 잘 따라했고 보르도에서 약탈한 엄청난 양의 책더미도 벌써 절반 이상 독파했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에크나르프 글자를 가르쳐 줬나?’
없었다. 니아트리브 출신 빈민가 소년은 스스로 문자까지 깨우친 모양이었다. 아니면 책더미 속에 교육용 책자가 있던가.
그 정도로 총명한 소년이 무모한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으리라. 다만 소년이 어떤 전략을 사용하건, 시체가 아닌 해적들의 돌발상황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으니 그게 불안할 따름이었다.
새벽별이 으르렁거리는 하늘 아래, 소년이 저 멀리 해적소굴을 바라보았다.
해적소굴이 있는 섬의 앞바다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선박이 낯선 선박들의 등장에 종을 치고, 갑판이 소란스러워졌다. 해적소굴에서는 경계 선박에서 올린 불빛 신호를 본 보초들이 다른 해적들을 깨우느라 분주해졌다. 정박해 있던 해적선들에 불이 켜지고 하나둘씩 돛을 펴기 시작했다.
소년은 이 모든 게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훤히 보였다.
아니.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땅에서도 보고 있었고, 경계 선박의 선수에서도 보고 있었고, 해적소굴의 망루 위에서도 보고 있었다.
“.......”
죽은 눈동자의 갈매기들이 깃털을 고르는 척 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해적 소굴을 훑었다.
‘다 죽네.’
갈매기의 눈을 통해서 본 해적들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경계 선박의 해적들은 곧 다 죽고, 그 뒤의 해적선으로 다급히 달려가는 해적들 역시 하루가 가기 전에 다 죽는다. 이 항구마을 역시 모두 죽음의 기운이 이불처럼 폭 덮고 있다.
“이 전투는 이기겠어.”
소년이 중얼거렸다. 찬 바닷바람이 소년의 뺨을 스쳤다.
[돌격한다. 꽉 잡아라.]
두 기사를 비롯한 선원들의 머릿속에 소년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소년의 외눈 깊숙한 곳에서 검푸른 바람이 요동치자, 산들바람은 순식간에 강한 강풍이 되어 범선을 세차게 밀었다. 소년의 기함 장교의 취미 호와 바다의 진주 호, 일꾼 호 이렇게 세 척의 돛이 찢어질 듯 크게 부풀었다.
“돛 더 당겨!”
“주인님께서 바람을 부르신다!”
“세게 부르신다!”
“이얏호!”
방금 전까지도 역풍이 불어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접근하고 있던 세 배는 자세를 고쳐 잡고 최대 속도로 물살을 헤치며 달리게 되었다.
세 배의 일직선상에는 해적 소굴이 있고, 그중 일꾼 호의 경로를 해적선 경계 선박이 가로막고 있었다.
일꾼 호에는 실리 제도에서 그 배를 수송용으로 썼던 니아트리브 수병들이 그대로 타고 있었다.
“보딩 준비!”
제임스 대위가 명령을 내리자 수병들과 선원들이 분주해졌다. 달그락거리는 머스킷과 머스킷 권총 장전 소리, 덜컹거리면서 대포 장전하는 소리에 석궁의 시위 감는 끼리릭 소리가 더해졌다.
아무리 불사라지만 몸이 칼에 찔리고 목이 잘리는 기분은 더러웠으므로, 그들은 전투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격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었다. 영혼의 절반이 뜯긴 탓일까, 그들은 아픔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쿵쿵거리며 경계 선박인 상대편 카락이 대포를 쏘았다.
대포는 절반 정도가 빗나가고 일부는 제대로 날아갔지만 소년이 공기마법으로 대포알의 각도를 뒤틀어 결국 모조리 바닷속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일꾼 호는 힘차게 해적선에 들이박았다.
용골이 부서지건 상대방 배가 침몰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이 전속력으로 들이박은지라 비슷한 체급의 두 배가 세차게 출렁이며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고 양측 선원이 모두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격!”
파파파팡!
제임스 대위의 명령과 함께 아픔을 덜 느끼는 죽은 자들이 산 자들보다 빨리 일어나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머스킷 일제 사격을 날렸다. 머스킷에 죽는 해적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기선제압에는 더없이 좋은 물건이었다. 그리고는 착검한 머스킷을 앞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상대편 배 위로 뛰어올랐다.
내려갈수록 서서히 어두워지는 물속을 닮은 안광들이 번득이며 먹이를 발견한 개미떼처럼 갑판에 올라탔다.
나머지 두 척은 일꾼 호를 내버려두고 해적 소굴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아무리 바람을 잘 받아 일반적인 배의 속도보다 빠르다곤 하지만 한계는 있었다. 바람이 너무 세면 돛이 찢어지고 마니까. 그 속도의 한계는 해적들에게 전투 준비를 마치고 배가 부두 밖으로 나오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말았다.
하지만 소년은 두렵지 않았다.
[전투 준비.]
상대방의 배는 옆구리를 보이기보단 정면으로 돌격해 와 백병전으로 나가겠다는 의도를 확실히 했다. 포격전을 하지 않고도 백병전으로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만만함이 느껴졌다.
곧,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만용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선두의 해적선이 장교의 취미 호의 옆을 스치며, 해적선에서 갈고리들이 후두둑 쏟아졌다. 소년도 바람 속도를 줄여 배를 잘 붙잡도록 도와주었다. 상대편의 갑판 위에서 산탄 포격이 한 차례 날아와 소년의 하수인들이 파편을 맞고 나동그라졌지만 이내 다시 일어났다.
“돌격!”
브란트와 오르네리는 갑옷 광택을 번들거리며 뛰어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거리를 넘어 해적선에 간단히 안착했다. 둘이 난간을 박찰 때부터 자욱한 화약 연기와 함께 총알이 둘에게 박혔다. 그러나 총알은 산 자에게나 통하는 무기였다.
“기사다!”
“이런 미친!”
두 기사는 양떼를 휘젓는 늑대처럼 마구잡이로 해적들을 도륙했다. 두 배 사이의 틈이 더 좁혀들자 다른 선원들도 넘어가 학살에 동참했다.
“그으으......”
“으아악! 목이 잘렸는데!”
“캬아악!”
죽은 해적들은 지능 낮은 시체로 되살아나 동료였던 이에게 칼을 겨누었다.
‘역시 문제야.’
소년은 인상을 썼다.
지능 낮은 시체. 소년의 힘이 규칙을 가지게 된 부작용이었다.
이는 테르세이라 세력을 통합할 때 알았다. 죽은 해적들을 일으켰는데 으어어하고 울부짖으며 돌아다니는 걸 보고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챘다.
‘영혼이 별로 없다.’
되살아난 해적들은 영혼의 고작 30퍼센트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절반만 쪼개자는 의지를 전달해도 소년의 몸은 ‘규칙이 먼저다!’하고 주장하듯 영혼의 70퍼센트를 떼먹었다.
‘절차’를 밟지 않고 되살린 탓인 모양이었다.
나름 장전할 줄도 알고 무기도 휘두르는 거 보니까 아예 이성이 없어진 건 아닌 모양이지만, 영혼의 파편만 남은 이성 없는 시체처럼 캭캭대는 걸 보니 별반 다를 바는 없어 보였다.
‘이러면 단점만 많은 거 아닌가?’
기사 서임식을 하면 영혼의 40퍼센트가 남고 지능이 떨어지는 일은 없지만 부패한다.
기사 서임식을 안하면 영혼의 30퍼센트가 남고 지능도 떨어진다. 당연히 부패도 하겠지.
규칙이 생기기 전에 하수인이 된 두 기사에게 다시 서임식을 해도 50퍼센트 남은 영혼이 40퍼센트로 떨어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이건 너무 안 좋은 거 아니니?’
......
하지만 소년의 힘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하기야 악마처럼 별개의 영혼도 아닌데 대답을 할 리가 있나.
[미야아아앙......]
돛대에서부터 기분 나쁜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싸움이구냐앙......]
사탄이 사방에서 번지는 진한 피 냄새를 맡고 깨어난 모양이었다.
쿵!
두 거체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 바다의 진주 호와 또 다른 해적선이 백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함성은 이내 경악 섞인 비명이 되며 해적선 위가 처참한 상황이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장교의 취미 호가 맡은 해적선은 벌써 다 정리가 되어갔다. 아무렴 두 기사가 선두에 서 짚단처럼 해적을 베며 아군을 늘려나가는데 일개 해적선이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저주를 끼얹을 필요도 없었다.
해적선의 3분의 1 정도가 살아있는 시체가 되자 장교의 취미 호 선원들이 배로 복귀했다. 나머지 해적들은 아군이 된 해적들이 아군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선원들이 복귀하자 갈고리가 풀리며 두 선박이 떨어졌다.
“그으으으..... 주인니므을......”
“시체가 되살아난다!”
“으이하여어.......”
“키에에엑!”
“나, 난 죽기 싫어!”
바다로 뛰어내리는 해적을 본 소년이 마법으로 붙잡아 다시 갑판 위로 내던졌다. 혹여나 탈출해 소년이 시체를 되살린다는 사실을 퍼뜨리면 곤란하다. 내던져진 해적에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이들의 칼이 쑤셔 박혔다.
이제 저 배는 완전히 시체에게 장악되게 될 것이고, 소년의 명령에 따라 다른 해적선에 붙어서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알아서 진행되는 전투에 여유가 생기자 소년은 십자가에 매달린 선지자처럼 돛대에 매달린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야 사탄.”
[우애오옹......?]
“너는 내 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우리와 계약하지 않았는데도 사령술 쓰는 거! 영혼 먹는 거! 그거밖에 몰라아옹. 진짜다옹! 찌르지 말아주라냐아앙!]
물 밖에서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축 늘어진 육신과는 정반대로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는지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는 사탄.
정신적으로 완전히 몰린 모습이었다. 돛대에 묶인 뒤로도 하루도 빠짐없이 주기적으로 고문을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려나? 그러면서도 소년과의 불공정계약은 결단코 하지 않는 것이 아직 고문이 부족한 것 같았다.
“내 힘이 규칙을 가졌어. 그런데 지금은 안 좋은 면모가 더 부각되고 있지.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네 힘은 나도 정확히 모른다 했잖냥. 하지만, 영혼을 다루는 방식은 악마와 엇비슷하다옹. 그렇다고 같은 건 아니고 악마에게서 파생된 힘도 아니다냐. 정말 이상해냐, 나도 모른다냐, 제발 찌르는 건 말아주세냐아앙......]
악마로서의 기백은 다 내버리고 지금은 그저 고통을 주지 말라고 구걸하는 한낱 고양이만 남아 있었다. 인생 다 산 듯 축 처진 눈매 밑에서 흐려진 핏빛 눈동자가 소년을 훑었다.
[더 강해졌구냐아...... 으으 보기도 무섭다옹. 영혼에 강한 구속력이 생겼구냐앙.......]
구속력?
“뭐가 보이는 거지?”
[말로 설명을 자세히는 못해옹. 그저 그렇게밖에 안 보이고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거드응. 으으 제발 찌르지는 말아달라냥......]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쓸모없는 악마새끼 같으니.
구속력이라......
‘기사 서임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결속력이 단단해졌단 얘길까?’
대체 구속력이 뭘 의미하는 걸까. 굳이 그렇게 안 말해도 하수인들은 소년에게 종속된 이들인데 말이다. 그게 좋아져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서임식을 해도 바뀌는 건 없고 오히려 되살리는 하수인의 질만 낮아졌는데.
사탄과의 대화에도 별로 얻은 게 없는 소년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돌진을 시작한 배의 선수에 섰다. 어느새 해적소굴이 코앞이었다.
[모조리 죽이고 빼앗아라.]
소년이 귀족적으로 행동하며 순순히 포로들을 살려주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포격전 끝에 상대방이 항복했을 때뿐이다. 죽지 않는 시체를 전면으로 내세운 싸움에서는 포로 따윈 없다. 오직 자신의 부하가 될 놈들 뿐.
[그리고 싹 다 불태워.]
세 척에서 여섯 척으로 늘어난 소년의 전력이 항구를 빠져나오는 배들을 덮쳤다. 소년의 하수인은 더 늘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