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48화 (49/128)

48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8

고대에 있던 ‘위대한 제국’의 심장이었던 곳.

과거 이곳을 침공했던 북쪽의 야만족들은 집을 지을 석재를 충당하기 위해 제국의 유산 역시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화려했던 흰 돌길과 대리석 건물들은 현재는 기둥뿌리까지 뽑혀 사라졌고, 대신 무성한 수풀과 듬성듬성 남은 금이 간 돌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인적도 끊겨 오로지 풀벌레 소리만 울리는 곳은 그저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 이들의 장소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런 조용한 곳의 적막을, 여러 소리들이 연달아 나타나며 깨부쉈다.

사박거리는 풀 스치는 소리, 좋은 원단으로 만든 옷이 스치며 나는 소리, 가죽 신발로 흙을 밟는 소리, 쇠가 부딪히는 갑옷 소리.

풀벌레는 입을 다물었고 어둠 역시 불길에 흐트러지며 소리의 앞길을 내주었다.

“......허어.”

폐허가 된 공터에서 한 인물은 그저 한숨을 내뱉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는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별빛의 시선을 받으며, 가느다란 목소리가 고요를 뚫고 튀어나왔다.

“모두 의식 준비를.”

“예에.”

여러 인물들의 대답과 함께 주위가 분주해졌다. 갑옷 입은 이들의 발걸음은 이내 그쳤고 분주한 가죽 신발 발소리가 주위를 정리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촛불이 밝혀지고, 횃불이 횃대에 꽂혔다. 서코트 밑으로 보이는 갑옷이 환하게 밝아진 공터의 모습을 반사해 빛났다.

촛불과 횃불은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둥글게 배치되었다.

그 중심에는 붉은 서코트를 입은 수녀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주변에 검은 수녀복을 입은 수녀들이 시립하고, 그 주변을 눈이 부실 정도의 백색 서코트와 백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철통같이 호위했다. 그 바깥으로는 세월의 흐름을 얼굴의 주름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교황 성하. 날이 찹니다. 여기까지 나오실 필요는......”

“난 괜찮습니다.”

추기경의 염려에 교황이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대외적으로 보일 때 입는 금실로 문양이 수놓아진 백색 옷 대신 수수한 일반 사제복을 입은 교황은 진지한 눈으로 저 가운데에 있는 붉은 서코트를 입은 수녀를 바라보았다.

“파올로 추기경.”

“예에......”

교황의 말에 대답한 추기경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별빛지킴이에게 금기를 저질렀다 들었습니다.”

“......무거운 죄임을, 저 역시 알고 있으매, 어떤 고행과 형벌이라도 달게 받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이번 별빛지킴이의 예언에 따라, 파올로 추기경께선 재앙을 막기 위해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예. 기꺼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 --- - **** * *** * *-”

붉은 서코트의 수녀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유로파의 그 어떤 언어와도 닮지 않았고 저 멀리 동방의 언어도, 지중해 너머 이교도의 언어와도 같지 않았다. 그저 손끝에서 튕기는 피아노 건반 같은 억양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별의 언어......”

교황이 중얼거렸다. 별과 대화하는 이 의식은 경건하고 신비로운 모습이었으나, 이 의식은 보이는 것처럼 신비롭지만은 않다.

이 의식이 시행되는 건 재앙이 예언되었을 때뿐. 의식이 성공적으로 끝나 별의 전언을 듣는다 한들 재앙은 예상치 못한 요소로, 미처 해석하지 못한 형태로, 제때 예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찾아오곤 했다.

거대한 반석이 쪼개진다는 예언은, 절대 쇠락하지 않을 것만 같던 고대의 ‘위대한 제국’이 연이은 악재에 급속히 쇠퇴하여 둘로 나뉘는 것도 모자라 야만족의 대이주로 인해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고.

유황을 품은 화살이 유로파를 꿰뚫을 것이란 예언은, 일찍이 화약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지중해 너머 이교도를 이르는 말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라 엉뚱하게도 이교도를 휩쓰는 동시에 유로파 남동부에서부터 나타난 엘프와 엘프를 이끄는 불 뿜는 용들에게 유로파 동부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검은 안개가 뒤덮을 것이란 예언은 전염병으로 해석하긴 했으나 유로파 전체를 말 그대로 뼈와 죽음으로 덮을 수준까지 커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번의 예언 역시 바다에서부터 안개가 몰려온다 했지. 과연 그건 무슨 형태와 규모로 유로파에 죽음을 불러올는지.......

교황은 자신의 대에 재앙이 태동하였다는 것에 침통해했다.

‘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꼬.’

“--- *-** -** *-- --- *-* *-** -**”

고대의 유적지 위의 밤하늘에서 별들은 마치 급보를 전하는 전령이 낱말을 급히 뱉어내는 것처럼 무수히 반짝였다. 바람은 더 거세게 불고, 별빛은 더 빠르게 깜박였다. 신기하게도 굵은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강풍인데도 촛불들은 흔들릴지언정 절대 꺼지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인지 빙의인지 모를 중얼거림을 한참 한 끝에, 별빛지킴이가 풀썩 풀밭에 쓰러졌다. 의식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수녀들이 황급히 다가와 별빛지킴이를 부축했다.

“별빛께서...... 속삭이셨습니다.”

기력이 쇠한 그녀의 목소리는 모기소리만큼 가늘었다.

“바다에서부터...... 서쪽에서부터...... 죽음의 안개와, 기존의 세상을 사라지게 할...... 배가 다가올 것이라고......”

수녀는 고개를 푹 꺾으며 기절했다. 별과의 소통은 몹시도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 예언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를 다시 시도했으니 쓰러질 수밖에. 수녀들이 들것에 별빛지킴이를 눕히고 폐허를 떠났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두들.”

교황이 침통한 얼굴로 추기경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입을 앙다물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추기경이 말했다.

“서쪽이면, 신대륙이 아닐지요?”

신대륙에서 한창 땅따먹기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도 있고, 카스테냐와 니아트리브가 신대륙에서 가공할 약탈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새로울 게 아니었다.

“신대륙에 살고 있던 야만인들이 보복을 하러 오는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죽음의 안개라는 건 우리가 모르는 신대륙의 사악한 마법이 아닐지요?”

추기경들의 대답은 비슷비슷했다.

“그렇다면 파올로 추기경.”

“예. 성하.”

“바다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예.......”

추기경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 또한 위험했다. 풍랑과 함초, 해적과 폭풍을 뚫고 달 단위가 걸리는 일이다.

“그리고 북에프레카에서, 성녀님을 데리고 가는 걸 허락하겠습니다.”

추기경들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씀들 할진 알겠지만, 재앙입니다 재앙.”

교황의 말에 당장이라도 무어라 항변을 하려던 추기경들의 입이 닫혔다.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꽃피우는데 주력하고 계신 그분을 전장으로 내모는 건...... 저 역시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만, 상황이 이러니 그분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고 말입니다.”

“......”

불미스러운 일.

북에프레카에서 갑자기 몰아닥친 여러 재앙들.

모두가 저주니 악마의 분노니 하면서 한때 떠들썩했었다. 성녀가 아니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살당했을지 모를 일. 그 때문일까, 성녀는 이교도의 영토 안에서도 민심을 얻으며 술탄국의 방관 아래 카톨릭의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만일 신대륙의 야만인들이 복수를 위해 오는 거라면, 저희는 상상 이상의 사악한 마법과 맞닥뜨려야 할지도 모르지요. 그 점을 감안한 겁니다. 수백 년 전 엘프와 용의 침공을 잊지 마십시오.”

***

“......그래서 보아하니 아무래도 우리를 공격할 거 같아.”

소년의 말이 끝났다.

소년은 브란트의 의견에 따라, 하수인으로 만든 해적들을 도망자 대열에 편승시켜 다른 해적섬 세력에 침투시켜놓은 상황이었다.

그 결과, 암암리에 세 세력권이 테르세이라 세력을 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침투한 이들이 도망자 신세라 정확한 고급 정보를 알 순 없었지만 도망자들에게까지 그런 소문이 퍼졌다는 거면 거의 확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외로 해적들의 대응이 빠르군요.”

홉킨스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겪어야 했을 일입니다. 다만 너무 빨라서 불안하긴 하네요.”

브란트 역시 상황이 엇나가 수틀렸다는 표정이었다.

“하, 우리를 선제공격할거라니. 차라리 우리가 먼저 공격하죠! 안 죽는 애들 가득한 배가 수십이잖습니까!”

유일하게 해적선장 윌리엄만이 근심이 없었다. 그는 팔을 치켜들며 당장이라도 출항하자고 주장했다.

“윌리엄, 시체로 채운 배는 드러내지 않기로 했잖나. 이유도 들어놓고 그런 소리를 하나.”

“죽은 애들 빼면 어때! 산 애들도 몇이나 되는데 선제공격 하나 못할까!”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사기 문제야. 이제 세력 편성을 막 끝마쳤어. 아직 휘어잡지 못한 해적들이 이탈할지도 몰라.”

홉킨스 선장이 우려를 표했다.

“단순히 삼대일이라면 모를까, 세력 전체와 맞물려 있는 일이라 섣불리 승리를 점치긴 곤란해. 주인님 하의 모든 해적이 불사도 아니잖나. 겁이라도 먹거나 한쪽이 무너지면 바로 패배와 직결되는 일이야.”

브란트 역시 홉킨스의 의견에 동의하며 소년에게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계속해서 자신만만해했다.

“허이고, 그건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야! 상대방을 먼저 무너뜨릴 수 있으면 오히려 우리가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우리는 이제 합쳐진 상황일세. 새로 들어온 이들이 명령을 제대로 들을지도 장담할 수 없어.”

“내 아래 있는 배 열두 척은 뭐 걔네들이 심성이 고와서 내 밑에 있겠어? 해적은 두려움으로 휘어잡는 거야.”

윌리엄은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휘어잡듯 팔을 휘두르며 주먹을 꽉 쥐는 시늉을 했다.

“세력 대 세력 싸움에서는, 작은 놈들은 지레 겁먹고 어떻게든 싸움을 피하려 들어. 해적이 충성심이 안 높다고?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야. 괜히 상어 싸움에 몸 디밀었다가 잡아먹히고 싶진 않을 테니까. 전황이 기울어진다 싶으면 바로 튀겠지.”

“하지만 우리 쪽 사기는......”

“거참, 이럴까봐 돈도 뿌린 양반들이 뭐 그렇게 걱정이 많어? 그리고 정말 안 된다 싶으면 죽은 애들 동원해! 뭐 지금까지는 안 동원했어? 테르세이라 장악할 때 잘만 썼구만. 지금껏 그래왔듯이 도망가는 놈 없도록 하면 되잖아?”

“......”

“시체로 꽉 찬 배가 지금 몇 척인데 못 이긴다고 헛소리야? 지금 죽은 애들 탄 배 빼고 전력 계산하고 있으니까 그런 소리나 나오지! 그리고 주인님이 계신 전장은 무조건 우리가 이길 텐데 승패를 왜 논해?”

윌리엄의 주장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신의 없는 살아있는 해적들의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그렇지.

명령불복종이나 배신, 도주 가능성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홉킨스 및 브란트의 의견과.

해적은 줏대도 뭐도 없는 만큼 불사 선원들을 이용해 단번에 치고 나가 상대의 사기를 거꾸러뜨린다면 오히려 이쪽으로 붙을 해적들이 생겨 승산이 있다는 윌리엄의 의견.

이 둘이 팽팽히 맞붙으면서 갑론을박이 한참이나 펼쳐졌다.

“......”

소년은 그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동시에 아소르스 제도를 그린 해도를 보고 있었다.

보르도에서 선원들이 도서관 하나를 통째로 털은 모양인지 책더미 속엔 별게 다 들어있었다. 개중에는 항구도시라 그런지 항해와 관련된 책도 다수 있었다. 홉킨스 선장의 도움과 독서를 병행한 끝에 소년은 이미 해도를 파악하는 항해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한참이나 고요한 눈빛으로 해적들이 손수 그린 해도를 바라보며 손으로 육분의를 의미 없이 주물럭대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제공격한다.”

윌리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브란트와 홉킨스는 다소 걱정은 있었지만 소년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윌리엄, 다른 해적들이 어디 많이 모이는지 알아?”

“흐흐, 여기서 지낸 지만 6년이 넘었습죠. 그쯤 되면 자기 세력권이 아니더라도 다른 섬의 상황은 훤히 꿰게 됩니다요. 다 거기서 거기에 정박하고 있을 겁니다. 섬의 지형 상 한계가 있어서 요상한 곳에 몰려 있다던가 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장담합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너는 어디어디가 해적들의 본거지인지 여기 표시하고...... 음, 다른 선장들한테 방금 아군 수 파악하라고 해뒀으니까 병력 배치 들어가자. 홉킨스, 병력 배치할 때 윌리엄이랑 같이 좀 도와주고, 브란트랑 오르네리는 선원들하고 석궁 챙겨서 갈매기 잡아와. 최대한 많이.”

해전을 몇 번 겪어보지도 못한 소년이 마치 십 년 이상 선장노릇을 한 이처럼 노련하게 명령을 내렸다. 단순히 갓 어른이 된 소년의 치기어린 행동인지 조숙한 행동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소년의 하수인들은 소년의 명에 따랐다.

그날 테르세이라 섬에 가득한 갈매기들 상당수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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