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46화 (47/128)

46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6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알 수가 없어......”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수북하게 수염을 기른 이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늘 덥고 건조한 지방임에도 유로파의 겨울을 느낀 것처럼 그의 갈색 피부 위에 소름이 알알이 돋아났다.

“스승님, 어제 별 관측 결과입니다.”

남자의 제자가 종이를 내밀었다. 남자는 황급히 그걸 받아들고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읽어내려갔다.

“역시. 분노하고 있다.”

“별이 분노했던 적이 적긴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닌 일인데 이게 그렇게 큰일입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건 전례 없는 격한 반응이지 않더냐?”

“그렇긴 했죠.”

혼란에 빠진 눈을 한 이 중년 사내는 술탄국에서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천체 점성술사였다.

과거 위대한 제국이 쪼개지고, 카톨릭의 그늘 아래 쇠퇴하여 신음하고 있을 때, 위대한 제국이 이룩한 각종 문물들은 술탄국으로 흘러들어 그 명맥을 유지했다. 개중 한 가지가 바로 천문학이었다.

현재 술탄국을 비롯한 이슬람권의 천문학은 유로파 따위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슬람권의 제일가는 점성술사조차 확신할 수 없는 별의 반응이라니?

“듣기로는 유로파의 야만인들이 신대륙에서 마구 약탈을 하고 있다던데 그 때문에 별이 화난 게 아닐지요?”

“신대륙이 발견된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약탈 역시 그렇지. 별이 화났으면 진작 화났을 거다. 신대륙과는 관련이 없어. 별의 시선이 멀리를 보고 있지 않아.”

“그건 저도 봤습니다. 대서양은 넘지 않았더군요.”

“그래. 분명 유로파 아니면 우리 쪽을 보고 있어. 별의 시야가 워낙 넓어서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동쪽은 아니야.”

점성술사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마법사 연맹에 좀 갔다와야 할 것 같다. 거기서 점성술사들을 만나봐야겠어.”

***

“그러니까 해적단의 위엄을 살리고 유명세를 떨치려면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 이말입니다!”

헤헤거리며 외모에 맞지 않게 간사하게 웃으며 아부를 떠는 윌리엄. 지금 그는 해적단의 이름을 정하는 것에 대한 주장을 한껏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박살난 배들이 으어어거리는 시체들을 실은 채 수리하느라 바빴다.

테르세이라 세력권 내에서 소년의 해적단의 통치를 거부하는 이들을 단죄하는 해전이 막 끝난 상황이었다.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우던 이들의 최후는 살아있는 시체가 되는 것이었다.

소년은 윌리엄의 아부에 고개를 대충 끄덕이면서 오랜 시간을 바다에서 보낸 늙은 노선장처럼 뒷짐을 진 채 뱃전 너머 바다를 바라보기만 했다. 윌리엄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소년은 묘하게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관심 없어 보이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윌리엄이 계속 떠들어대는 걸 아니꼽게 보는 시선들이 있었으니......

“홉킨스, 아직도 감정 있나?”

“당연하지. 해적 놈이잖아.”

“이젠 자네도 해적이란 사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긴 하지만, 천성 해적인 놈과 난 달라!”

“......”

브란트와 오르네리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셋 사이에 낀 제임스 대위 역시 고개를 저으며 괜히 푸른 외투만 고쳐 입었다.

“근데 선배님, 저도 저 윌리엄이란 놈이 맘에 들진 않아요.”

“왜?”

“출신은 그렇다 치고, 지금 해적들 한복판에 들어와 있으니까 이곳 상황을 더 잘 아는 저 녀석이 지금은 주인님께 더 도움이 되는 건 인정하는데, 자꾸 해적에 어울리는 조언만 하잖아요.”

브란트가 무언의 동의를 하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브란트 역시 저 윌리엄이란 자가 맘에 들진 않았다. 출신 성분이어서도 아니고 출신 국가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소년에게 해적의 생활방식을 알음알음 알려주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납치해 노예선에 팔아먹어서 짭짤하게 수익을 올렸다거나 불을 질러서 학살한 걸 자랑스럽게 떠벌린다거나 하는 등 온갖 범죄방식을 잔뜩 알려주기도 했다.

그나마 브란트가 소년에게 저건 올바르지 않은 생활방식이라고 귀띔을 해주고 소년 역시 윌리엄의 이야기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는 있으니 안심이긴 했다.

“모두들 잘 듣게. 우리는 지금 해적질로 돈을 모으고 있지만 주인님께서는 더 큰 해적이 되고 나아가 다른 국가의 귀족이 되어 사략선 제독이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네. 비록 니아트리브랑 에크나르프에서 좀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들의 경쟁상대인 카스테냐에 귀의할 수도 있고 정 아니다 싶으면 이교도 술탄국 쪽으로도 갈 수 있으니까 주인님께 최대한 올바르고 명예를 추구하는 그런 방향의 조언을 해주길 바라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주인님과 얘기를 해봤는데, 주인님께서도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을 원하고 계시더군. 그 이유까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지만 주인님의 미래로는 괜찮은 방향이라고 생각해.”

모두가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여~ 다들 뭐 하고 계시나 응?”

수다를 다 떨었는지 윌리엄이 뒷짐을 지고 걸어오며 킥킥거렸다. 마치 자신이 소년에게 더 쓸모가 있다는 걸 자랑하려는 듯이. 당연히 윌리엄을 향한 눈빛들은 곱지 못했다.

“흥, 뺨에 살점 떨어지는 거나 관리하시지.”

윌리엄이 흠칫 놀라 뺨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뺨은 멀쩡했다. 그의 얼굴에 감돌던 미소가 단번에 사라졌다.

윌리엄은 썩어가고 있었다. 고통도 냄새도 파리가 꼬이는 일도 없긴 했지만 조금씩 살점이 툭툭 떨어져 뼈가 보이는 건 스트레스였다.

하수인이 될 때의 일련의 의식으로 인해 두 입 먹은 만큼의 영혼만 남은 문제점은 바로 죽은 육신이 부패하는 건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얼굴이 아니라 다른 몸 부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 시체가 아닌 수하들에게 걸릴 일은 없지만 언젠가는 드러나는 부분까지 번질 일이라 그는 장갑을 끼고 외투를 늘 목 끝까지 올려 입는 등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윌리엄이 정색한 표정으로 홉킨스를 노려보았다. 원래 그의 성격상으로는 당장 총알을 면전에 박아버렸겠으나, 상대는 그런 걸로 죽지 않는 몸. 결국 욕만 내뱉을 수밖에.

“......비열한 해군 놈 주제에.”

“뭐? 방금 뭐라 했어?”

아이리시 인 학살 건으로 인해 니아트리브에 정나미가 떨어졌긴 했지만 그 자신이 해군 출신이란 건 변함없는 사실이며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홉킨스다. 해군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해적이 해군 욕을 하는 건 싸우자는 뜻과 진배없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왜, 여왕 욕도 해주리?”

“그 입 당장 다물지 않으면 살점 떨어지기 전에 내가 손수 발라주지!”

홉킨스와 윌리엄이 당장 박치기를 해도 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둘이 쓰고 있는 묘하게 닮은 모자가 당장이라도 몸싸움을 할 듯 가까워졌다.

“크흠, 그쯤 하게나. 홉킨스 자네도 말실수 했어. 윌리엄 자네도 윗사람에게 공손히 대하는 법을 좀 알게나.”

“흥, 운 좋은 줄 알아라 해적 놈.”

“흥, 공손? 해적에겐 그런 거 없습디다. 오직 힘에 의한 지배 아니면 굴복뿐이지요.”

“중간이 없는 사람일세. 우리에게 굴복되기 전에 그 중간 지점에 머무르는 연습을 하게나.”

브란트도 암암리에 쌓인 게 좀 있었다. 그 심정은 허리춤의 장검을 탁탁 치는 행동으로 드러났다.

“......”

윌리엄은 말문이 막혔다. 일전에 윌리엄이 거들먹거리면서 선을 한번 넘었다가 브란트에게 본보기로 목을 한 번 잘린 적 있어 두 기사 앞에선 슬슬 기곤 했다. 그러면서도 반항기는 죽이지 못한 게 완전 천성인 모양이었다.

윌리엄은 자기편이 없다는 걸 알고 못마땅한 눈으로 홱 등을 돌려 자신의 기함으로 돌아갔다.

“흠.”

그 광경을 소년은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다.

‘파벌 싸움이라?’

소년에겐 하수인들이 싸우는 광경이 빈민가에서 조직 간부들이 서로 투닥거리는 것과 똑같이 보였다. 근본적인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소년의 밑에서 기존 하수인 대 해적 하수인 구도가 나올 것은 분명했다.

세력이 갑자기 늘어나니 신경 써야 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시체가 된 해적선장들도 입단속시켜야 하고, 기존 부하들과 살아있는 해적들 사이의 마찰도 방지해야 했다.

속 편하게 산 놈들도 확 다 죽여 버리고 시체로 만들까 했지만 그건 ‘귀족적이지 못한 일’이라 관두었다. 모든 걸 죽여서 해결하는 건 간단하긴 하지만 너무 야만스러운 방식이었다.

그랬기에 소년 역시 윌리엄이 알려주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뭐만 하면 죽여라, 뭐만 하면 불태우거나 팔아치워라. 항복하는 해적들도 윌리엄은 싹 다 목을 치고 시체로 만드는 게 낫다며 소년을 꼬드겼지만 소년은 거절하고 그냥 받았다.

소년이 향할 방향은 돈을 많이 거머쥘 수 있는 귀족의 길이다.

그런데 귀족적이지 못한 일을 계속 해서야 되겠는가.

뭐 폭력이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언제든지 수반될 수 있는 요소다. 귀족이 되기까지 누구를 죽여 수하를 만드는 일도 계속해야만 하겠지. 그러나 해적의 방식은 깔끔하지 못하고 군더더기가 가득하다.

이런 표현이 있었는데...... 아 그래. 수려하지 못하다.

차근차근 벽돌을 쌓아 나가는데 쓸데없는 균열과 요철이 가득한 벽돌을 끼워 벽을 무너뜨리는 건 소년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소년은 벌써부터 해적질을 계속할 것인지도 고민했다. 사실상 소년의 의지로 행한 해적질은 실리 제도에서의 약탈, 딱 한 번만 했다. 보르도의 경우는 원치 않았던 상황이었고.

‘모든 게 이미 충분은 해.’

자의는 아니었지만 보르도를 턴 덕분에 재물은 이미 그득하고, 선원 역시 충분하다. 세력도 해적단들을 흡수하여 일대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수입을 ‘야만스런’ 방식으로 얻고 싶지는 않았다.

‘사략선 방식대로 할까?’

약탈은 하되 목숨은 살려주는 방식. 국제법을 지킨다며 말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항복하면 재물만 가져가고 목숨은 놔주는 것이다. 귀족이 있으면 바다의 규칙대로 몸값도 받고.

‘브란트는 국가의 밑으로 들어가라 했지.’

마냥 해적의 직위에만 만족하면 결국 모든 나라의 표적이 될 터이니 어느 국가의 밑으로 들어가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좋다는 조언.

권력자의 눈에 들어 공을 세우고 귀족이 되는 길이라......

소년은 바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귀족이 먹는 음식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