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4
“뭐냐?”
윌리엄이 배부른 고양이 같은 느낌으로 말했다. 곧 막대한 보물이 손 안으로 들어올 것이고, 테르세이라 세력권의 우두머리가 되는 길이 어른거리니 마음은 이미 여유가 가득했다.
“실례합니다, 알려드릴 게 있어 그런데 들어가도 될런지요?”
에크나르프 억양의 카스테냐 어였다.
아소르스 제도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카스테냐라 약탈품을 거래하는 이들이나 해적의 상당수가 카스테냐 출신이어서 이곳의 공용어는 카스테냐 어였다.
“무슨 일이야? 들어와 봐!”
문이 열리고, 온몸을 망토로 두른 두 명의 인물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는 장신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인지 조그마했다.
“뭐야 너희들은?”
“제의를 하러 왔습니다.”
“뭐? 니들 누구야!”
선장들이 저마다 칼과 머스킷 권총을 뽑아 겨누었다. 습격을 앞둔 이 때 갑자기 제의를 하겠다는 생뚱맞은 소리라니.
“두건 벗어.”
“하하,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두건을 벗자 밝은 금발의 귀공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 봐도 고귀한 도련님의 모습을 한 기사, 오르네리는 뒤이어 앞을 여미던 망토자락도 걷어 절그럭거리는 전신 판금 갑옷까지 드러냈다.
“기사?”
“정답!”
“우리가 노리는 보물선에 기사가 타고 있다 했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오 맞아. 내가 그 배에서 왔어.”
“항복이라도 하러 온 거냐? 잘도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왔군.”
“항복? 내가? 아닌데?”
오르네리는 웃는 낯으로 단어 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겐 이 상황이 장난이라도 되는 걸까.
“항복은 너희들이 해야지.”
“뭐? 으하하하!”
해적선장들이 일제히 웃어제꼈다. 윌리엄의 풍성한 갈색 수염이 출렁이며 소년의 시선을 끌었다. 오 잘 길렀네 하고 오르네리가 실없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근접전에서 무시무시한 기사라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날아올 총알이 무섭지 않단 말인가? 게다가 몇몇은 한 번에 여러 발이 나가는 오리발식 권총이라 몇 발을 튕겨낸다 한들 치명상을 입을 게 명백했다.
세력으로만 봐도 그렇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배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평균 다섯 척이다. 큰 해적단은 열 척도 넘는 배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해적 선원들도 많다. 누가 봐도 신입 해적의 열세다.
그런데 그 앞에서 고작 세 척의 신입 해적이 항복 권유라고?
“무서워서 미친 모양이구나. 미안하지만 그런다고 우리가 네놈들을 약탈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단다. 뭐 스스로 보물을 바친다면야 목숨쯤은 살려줄 수 있지만.”
윌리엄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권총 끝을 까딱였다.
“꿇어봐라. 그럼 네 목숨은 살려주마.”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가만히 있던 조그마한 이가 입을 열었다.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앳된 남자아이의 목소리. 하지만 모두가 알 수 없는 소름을 느꼈다.
“바닥이나 보시지.”
무심결에 바닥을 본 해적선장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바닥은 회색빛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일부는 덩굴처럼 그들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으악! 이게 뭐야!”
“바깥에 있는 놈들은 뭐하는 거냐!”
바깥의 경비들은 검푸른 안광을 번쩍이며 안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못 들은 체 했다.
“마, 마, 마법!”
선장들이 안개가 다리를 기어 올라오며 몸을 죄자 기겁했다. 다리를 움직여 떨쳐내려 했지만 분명 안개의 형상일진대 더욱 단단히 다리를 감아와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죽어!”
콰앙!
권총을 든 이들이 소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까짓 탄환은 마력으로 만든 방패에 간단히 튕겨나갔다.
“마법이다!”
“마법사다!”
“내가 마법사인 건 나도 아니까 입 다물어.”
소년이 손짓하자 회백색 안개로 된 덩굴들은 순식간에 선장들을 칭칭 동여매고 재갈을 물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이내 읍읍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자, 이제 협상 준비가 된 것 같네에?”
오르네리가 으스대면서 히히 웃었다.
소년은 소름끼치는 외눈으로 선장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소년의 시선이 향할 때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마치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오르네리. 내가 얘네들을 부하로 만들면 얘네 밑에 애들도 다 내편이 되는 건가?”
“그렇죠. 선상반란만 안 일어난다면요. 하지만...... 히히. 반란할 생각도 못할 걸요?”
반란으로 등짝에 칼날을 쑤셔 넣었는데 죽지도 않고 뚜벅뚜벅 걸어와 칼 꽂은 놈의 엉덩이를 차준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흐흠......”
지금 이 상황이면 소년이 해적선장들을 모조리 죽이고 영혼을 절반 뚝 떼어 하수인으로 만들면 테르세이라 세력권 전체가 소년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하지만 소년은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
소년은 부하들에게서 ‘빈민가 밖의 가치관’을 많이 주입받았다. 보르도에서 약탈한 책으로 독서도 병행하며 소년은 외부의 지식을 한껏 습득했다.
도덕, 윤리, 질서, 규칙, 명예, 존중, 배려, 연민, 협력, 헌신, 양보 등등등......
‘무력’ 이외의 수많은 개념들을 습득한지라, 지금에 이르러 소년은 이런 ‘무식하고 야만스런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 방식에만 의존했던 빈민가 생활이 달갑지 않은 것에서 파생된 영향이기도 했고 자신만의 특징을 확립하겠단 다짐도 한몫했다.
‘뭔가 나만의 독특한 방식을 수립할 필요가 있어.’
다른 것에 휘둘리지 않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확고한 삶을 살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이는 마법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었다.
마법은 의지의 발현이다. 동시에 마력이라는 매개체를 다루면서 이뤄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의지와 마력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마법의 특색을 결정하는 것이다.
마법에는 마법진이나 여러 재료를 이용한 의식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힘을 아끼거나 증폭하는 법이 있다. 또한 마력은 자신과 맞지 않는 방식으로 강제로 부리려 들면 당연하게도 마력이 더 많이 들고 힘들다.
이는 마법 과정에 입문하면 기본적으로 교육받는 내용들이었다. 상성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어떻게 자신에게 맞도록 마력을 효율적으로 쌓고 관리할 것인가가 갓 마법에 입문한 이들의 해결과제다.
그런 방면에서 보면 소년의 경우는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마력을 쌓고 관리하는 데는 문외한이었고 관심도 없었다. 왜냐면 하고자 하면 그냥 됐으니까. 영혼만 뚝 떼서 일어나라고만 하면 충실한 수하가 되었고 저주를 걸고자 하면 그냥 됐다.
그렇지만 보르도에서 자신의 힘의 한계를 체험하게 된 이후, 소년은 힘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잘 쓸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약탈한 마법서적에서 배운 것도 많이 있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강제로 내 부하로 만드니까......’
죽고 살아나는 것엔 당사자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 강제성이 자신의 힘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 절차와 동의로 희석해보는 거야.’
절차와 상대방의 동의(강압적이건 아니건)를 통해 강제성을 줄이면 상대적으로 힘을 덜 쓰고 더 많은 하수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소년의 생각이었다.
‘그냥 죽이고 부하로 만들면 멋없기도 하고. 이왕 하는 거 뭔가 의식 같은 게 있으면 더 멋지지 않겠어?’
뭐, 아이 특유의 멋짐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욕심도 있고 말이다.
보르도에서 약탈한 책에서 봤던, 왕과 귀족이 기사를 임명하는 예쁜 삽화가 들어간 기사도 소설은 소년에게 다소 환상을 심어주었다.
***
소년은 오르네리를 쳐다보았다. 혈색 없이 창백한 흰 피부가 도드라져 마치 병약한 도련님 같았다.
“음? 왜 그러세요?”
“그러고 보니까, 너 성 안 받았다 했지?”
미니에 가문에 들어가는 시험 도중에 소년의 부하가 된 바람에 오르네리는 브란트처럼 성이 없었다.
“네 그렇죠.”
“줄까? 성.”
“오오, 그럼 앞으로 주인님이 아니라 주군이라 불러야겠네요!”
주군. 소년은 그 단어에 자신이 벌써부터 귀족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뭐 원하는 성 있어?”
“딱히요? 미니에 가문에서는 제 출신 가문 성으로 해달라 하려 했는데 지금은 그냥 주인님이 지어주시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그럼 그 기사 서임이라는 거 어떻게 하는 거야?”
소년의 물음에 오르네리는 간략하게 기사 서임 방법을 알려 주었다. 기사도 소설에서 읽은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하긴 둘 다 에크나르프 출신이니. 해적선장들은 묶인 채로 난데없이 에크나르프의 기사 서임 방식에 대한 강의를 같이 들어야 했다.
“그럼 여기서 할래?”
“어...... 주인님, 지금은 때와 장소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중에 일 끝나고 하는 게 좋을 거 같고, 브란트 선배님 먼저 서임을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음.”
성급했나. 그래. 생각해 보니까 지금은 상황이 맞지 않은 것 같았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오르네리 말을 들어야지.
대신 해적은 여기가 녀석들의 소굴이고 하니 이들은 여기서 해보기로 했다.
소년은 해적 선장 하나의 입을 막고 있던 안개 밧줄을 뗐다.
“......”
마법에 대한 공포는 거친 해적의 입에서 욕설조차도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살고 싶어?”
“그, 그, 그렇습니다.”
목숨과 돈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내다버릴 수 있기에 선장은 자신보다 훨씬 작고 훨씬 어린 소년에게 저자세로 나왔다.
“잘 들어. 너 말고 다른 녀석들도.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마.”
“?!”
해적선장들은 이게 대체 뭔 소린가 하며 눈을 뒤룩뒤룩 굴리기만 했다.
“오르네리, 보여줘.”
“넵!”
오르네리가 칼을 스릉 뽑아들고 곧바로 자신의 목을 푹하고 관통했다. 검은 피가 틈새로 주르륵 쏟아졌다.
그 다음 장면을 본 해적 선장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어이쿠 따끔해라.”
헤실헤실 웃는 오르네리는 목이 뚫렸어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춤추듯 한 바퀴 휙 돌면서 과장된 인사를 하기도 했다.
“신사 선장 여러분! 저처럼 주인님의 부하가 되어 영생을 얻어봄이 어떨까요? 물에 빠져 죽을 일도, 칼이나 총알에 심장에 구멍 뚫릴 일도 없답니다! 아니지, 뚫려도 괜찮답니다!”
시장의 호객행위처럼 떠벌이는 오르네리. 말 많은 이 기사가 목에 칼이 관통된 채 발하는 쾌활함은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는커녕 더 옥죄었다.
“자. 어때? 니들, 내 부하가 되어 영생을 살고 싶지 않아?”
“......”
입을 막는 게 없어졌음에도 해적선장은 입술이 돌이 된 것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입 속까지 올라온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입술을 계속 움찔거리는 것이 굉장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부터 쿵쾅거리면서 대포 발사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멀리서 울려오는 조그만 함성 소리로 보건대, 해적들이 공격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런. 쓸데없는 희생이 나오겠네요. 우리 선원들은 죄다 불사라 아무리 찌르고 쏴도 안 죽는데.”
오르네리의 장난스런 말투에 선장들의 눈이 둘 곳을 못 찾고 이리저리 배회했다.
“읍읍!”
한 선장이 버둥거리며 뭔갈 말하려 하자 소년이 재갈을 풀었다.
“충성을!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풍성한 갈색 수염을 흔들면서 다급히 말하는 자. 지금 이 습격을 주도한 해적선장 윌리엄이었다.
대장이고 자시고 당장 뒤지게 생겼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히려 이 정체불명의 마법사 밑에 들어가 호의호식하고 영생까지 누리는 게 낫지!
따지고 보면 기존의 테르세이라의 대형 해적단들 밑에서 있던 거랑 다를 바가 없었다. 더 큰 이의 힘을 등에 업고 누릴 것 누리면서 사는 것. 그것이 윌리엄의 행동방식이었다.
“아, 그래? 그럼 총이랑 칼부터 놔.”
땡그랑!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개 밧줄에 묶인 채로도 꼭 쥐고 있던 양손의 무기를 툭 떨어뜨렸다. 그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윌리엄을 묶고 있던 안개의 덩굴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앞으로 와 무릎을 꿇어라.”
나름 지엄하게 하는 말이었지만 변성기도 안 와 앳된 목소리라 참으로 어색했다.
윌리엄이 순순히 다가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슥 숙였다. 오르네리가 걱정하던 것처럼 품에서 뭘 꺼내 달려든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진 않았다.
“오르네리. 기사 서임 방법이 양 어깨를 칼로 두드리는 거랬지?”
“옙.”
“그렇다면......”
소년이 손을 뻗자 윌리엄이 버린 칼이 날아올라 소년의 손에 탁 잡혔다. 역시 마법사! 해적들의 불안한 눈동자가 그대로 칼의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너는 내게 영원토록 충성할 것을 맹세하겠는가?”
에크나르프 법도에 따른 불필요한 선서라던가 그런 건 과감히 생략하고 맨 뒤쪽 문구만 말했다. 외우긴 했는데 말하기 귀찮았다. 소년이 삽화에서 본 것처럼 칼을 겨누었다. 그런데 어깨가 아니라 목숨을 위협하는 것처럼 목에 가까이 대고 있었다.
“주인님, 좀 떨어져서 두드려야 됩니다. 목 말고 어깨로.”
“아 그렇지.”
소년이 칼 위치를 살짝 옆으로 옮겼다. 삽화는 평면에 약간 엉성하게 그려져 있어 소년이 착각을 했다. 하지만 칼날을 어깨에 대고 있어야 하는데 칼의 옆면을 대고 있었다.
“흠흠. 이름?”
“윌리엄이라 합니다.”
“그래 윌리엄. 너는 내게 영원토록 충성할 것을 맹세하겠는가?”
영원토록이라는 그저 형식적인 말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질 줄이야. 윌리엄이 침을 꿀꺽 삼키고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
“예. 맹세합니다.”
“네가 내게 귀의하도록 만드는 원인은 네 본인의 의사가 분명하렷다?”
오르네리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저거 기사도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잖아!
오르네리도 그 소설을 읽어본 적 있어서 알고 있었다. 에크나르프에서 꽤나 유명한 소설이었다. 언제 그런 걸 읽으셨대? 약탈한 거에 섞여 있었나?
다만 소설 속의 내용과 현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과 그에게 충성하는 기사가 아름대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저택의 화려한 정원에서 비공식 기사 서임을 하는 장면이지만, 이건 짠내와 퀴퀴함이 진동하는 반쯤 썩은 나무 창고에서 반강제적으로 하는 서임이었다.
“예, 제 의사입니다.”
서걱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윌리엄의 목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