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3
해적들이 약탈을 하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약탈로 모든 걸 충당할 순 없다. 상대편 배에 뭐가 들었는지 알지 못하니까.
보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식량만 잔뜩 실려 있을 수도 있고 연안을 따라 건축 자재를 수송하는 배일 수도 있다. 보물이라 해도 쇠붙이를 먹을 수는 없는 법. 따라서 해적들 사이에서도 거래는 성행했다.
해적들이 대륙의 항구에 정박해 약탈품을 암시장에 팔고 물자를 사가는 것처럼, 해적 소굴 역시 해적끼리의 물물교환을 위해 생겨났다.
다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곳이니만큼, 칼과 총을 이용한 대화가 자주 있어서 그렇지.
테르세이라 섬 남쪽 마을의 거래소.
아소르스 제도쯤 되는 대형 해적소굴에는 거래를 전담하는 곳이 있다. 그걸 누가 관리하냐로 자주 싸우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체계가 잡힌 곳이 거래소다.
이곳에서조차 신뢰가 없으면 누구도 거래를 하지 않으려 할 테니 적어도 거래소에서는 해적들도 얌전한 편이다...... 라고는 하지만, 거래소에 들른 소년의 일행은 해적과의 거래를 할 때의 단점을 생생하게 맛봤다.
“해적은 역시 탐욕으로 똘똘 뭉쳤군.”
홉킨스 선장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피 묻은 칼을 닦았다.
“당연하지. 설마 해적에게 상인의 신뢰도를 바란 건가?”
“신뢰까진 아니고, 욕심은 부려도 최소한 거래는 시도할 줄 알았지. 설마하니 보물을 보자마자 칼 꼬나 쥐고 달려들 줄 알았나.”
브란트와 홉킨스의 뒤에는 보물이 든 상자를 실은 조그만 수레가, 앞에는 피투성이의 해적들 수십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보물상자 위에 앉은 소년이 한심한 표정으로 말 그대로 죽었다 살아난 해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란트, 해적은 이렇게 멍청해?”
무려 전신 판금 갑옷을 두른 기사가 둘이나 있는데도 보물을 뺏으려 달려들다니. 아마 진짜 기사가 아니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기사의 무서움을 제대로 모르거나.
소년은 이놈들같이 멍청한 해적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는 아닙니다. 똑똑해서 해군을 농락하는 해적도 있고, 욕심에 눈이 멀어 얼마 안 가 목매달리는 해적도 많죠. 이 녀석들처럼요.”
하늘같은 상관이 되어 버린 기사 앞에서 해적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랬나?”
“그, 그게, 바로 훔쳐서 잠적해 버리면. 이 넓은 바다에서 어떻게 찾겠습니까. 안 그래도 여기가 시끄러워서 그런 것까진 윗선에서 신경 못 쓸 거 같고......”
“그래서, 이렇게 넷만 온 거 보니까 숫자로 밀어 붙일 수 있을 거 같든?”
“예에......”
“허 참. 기사의 무서움을 모르는 놈들이군.”
홉킨스가 혀를 차면서 해적들에게 단검을 푹푹 박아 넣었다.
“니들 머리는 이제부터 단검꽂이다. 그렇게 매달고 다녀. 멍청한 녀석들.”
“하하! 엎드려서 못자겠네!”
이마 한복판에 단검 장식을 달게 된 해적들을 보고 오르네리가 깔깔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아무리 신의 없는 해적이라지만 집단 내부 결속을 위해 어느 정도는 틀이 잡혀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거래자를 다짜고짜 공격하려 들다니.”
“방금 섬이 시끄럽다고 했잖아. 물어봐.”
“알겠습니다.”
홉킨스가 턱짓으로 해적들에게 말하라는 눈치를 보냈다.
“그러니까......”
해적들의 말로는, 니아트리브 함대가 여기 온 이후에 이 근방 해적단과 소굴이 죄다 쓸려나가 규칙이고 뭐고 엉망인 상태라고 한다. 거래소를 관리하던 해적단조차도 갈려나가 아무나 거래소를 점거하고 서로를 뒤통수치는 혼란이 매일 벌어진다고.
소규모 해적단의 일원일 뿐인지라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고 하지만, 이런 졸개들조차 혼란을 틈타 한몫 잡으려고 드는 걸 보면 확실히 해적들 분위기가 엉망이긴 한 모양이었다.
해적들의 말을 듣고 난 이후 좀 더 넓게 볼 줄 아는 브란트의 표정이 기회 하나 잘 잡았다는 듯 밝아졌다.
“세력다툼이라. 물자를 거래하는 일선의 끄나풀까지 이렇게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 정도라면 확실히 질서가 엉망이긴 하군요. 니아트리브 함대가 제대로 한 번 뒤집고 갔나 봅니다.”
“근데 그게 우리에게 이득이 있나?”
홉킨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브란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우리가 다툼에 끼어 들어서 한몫 잡는 거지. 세력을 형성하는 거야.”
“그거 나쁘지는 않겠는데.”
“그러니 보물을 미끼로 해적들을 조종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인님?”
“그 거친 놈들을? 우리를 습격하러 단체로 몰려들지 않으면 다행인데.”
“내 말이 그 말일세 홉킨스. 몰려들게 만들자고.”
“설마?”
홉킨스는 이내 브란트의 말이 뭘 의미하는 지 이해하곤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주인님. 얼마까지 수용 가능하십니까?”
소년이 부릴 수 있는 시체의 수를 말하는 것이다.
“보르도에서보단 적겠지만, 나름 많을 걸.”
보르도에서 사탄 때문에 겪었던 고난이 수련이 되었던 모양인지 소년의 힘은 한층 더 늘어나 있었다. 아니면 내면의 힘이 선심쓰듯 힘을 더 풀어준 거던가.
“해적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하면 선단 하나는 꾸리겠군요.”
“흐흐흐흐!”
세 간부가 음침하게 웃었다. 소년과 세 간부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며 속닥였다. 그렇게 작전회의의 시간이 지나고.
“그럼 이제 소문 퍼뜨리자고. 들었지? 가봐. 아, 그건 뽑고.”
소년은 하수인이 된 해적들에게 명령해 굉장한 보물선이 입항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곧, 테르세이라 섬 전체에 소문이 퍼지고 고양이가 들어온 닭장처럼 해적들이 푸드덕거리면서 난리통이 되었다.
통발에 걸릴 물고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아소르스 제도는 제도라는 이름답게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적 소굴은 제도를 이루는 섬마다 여럿 있었지만, 크게 본다면 테르세이라, 상조르즈, 피쿠, 파이알 이 네 개의 큰 섬을 기준으로 네 세력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세력권 내에도 수많은 해적들이 난립했지만 그 중 큰 해적단을 중심으로 일종의 조합 비슷하게 연합한 상태여서 균형이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근래에 있었던 니아트리브 함대의 습격은 그 균형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아소르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제도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던 테르세이라 세력권이 결딴나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그저 테르세이라 섬이 아소르스 제도의 가장 북쪽이라 니아트리브의 함대와 가장 먼저 만난다는 단순히 지리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니아트리브 함대는 거대한 해일과 물마법으로 테르세이라 세력권에 속한 동쪽의 섬 여러 개를 뒤엎고선 떠나 버렸고, 동시에 테르세이라 세력권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해적단들이 궤멸되는 바람에 현재 아소르스 제도에서는 힘의 공백이 생겨난 상태였다.
그래서 현재 공석이 된 우두머리 자리를 탈취하러 많은 해적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거나 노골적으로 힘을 키우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의 물자와 보물을 팔러 온 신흥 해적은 해적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뭐? 보물이 어마어마하다고?”
해적선장 윌리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손에 낀 황금 반지들이 촛불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예! 배 세 척에 온갖 게 꽉꽉 차있답니다! 금화는 물론이고 금덩이, 장신구, 미술품, 조각...... 하여튼 돈 될 건 모조리 있다고요! 지금 온 섬에 파다해요!”
“그, 그래서? 그래서 그놈들이 여기 아직 있는 게 확실하지?”
“예!”
윌리엄이 군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테르세이라 세력권 내에서 나름 세를 떨치고 있으나 그동안은 그 위의 더 강한 해적들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살아야 했다. 그들이 니아트리브 함대에 의해 싹 다 사라진 현재, 윌리엄은 맹주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지.’
해적이 연합하는 일은 의리 따위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돈!
저 세력에 합세하여 빌붙으면, 정기적인 상납금을 넘어서는 이득이 생길 것이다 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선장들 다 불러 모아. 신참 놈들 털어먹어 보자고.”
과연 털릴 쪽이 누구인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
“설마 했지만 역시나군. 떡밥이 너무 많았나?”
“이쯤 되면 수질오염 수준이지.”
그날 밤. 테르세이라 섬 남쪽의 마을 폐허에서 수많은 횃불이 피어오른 걸 보며 한 기사와 한 선장이 담소를 나누었다. 해적들은 움직임을 숨길 생각도 없이 그냥 들이닥치겠다 하고 아예 자랑을 하고 있었다.
현재 소년의 배들은 동쪽 마을에 비하면 그나마 정박할 구석이 남은 남쪽 마을의 부둣가에 정박해 있었다. 말이 부두지 그나마도 반 이상이 부서져 제대로 된 하역 작업을 할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전투 계획은 짜 뒀나 에크나르프 기사님.”
“당연하지. 내가 실전 경험이 얼마인데. 그리고 배를 이용한 전투에 대해선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나이는 비슷하지만 경력은 자네가 더 많지. 괴물까지 잡고 다닌 기사잖나.”
“뭐 많이 돌아다니긴 했지. 괴물 둥지도, 전장도.”
브란트가 눈엣가시 취급을 받아 한직으로 좌천된 탓에 백날 괴물 둥지만 찾아나서는 것은 물론이고 저놈이 죽었으면 좋겠다 하고 파병 때마다 불려나갔던 것이다.
“나는 다 살아 돌아왔지만. 나한테 목숨의 은혜를 입은 기사가 백은 넘어갈 걸세.”
“대단하시구려.”
선장은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면 에크나르프 인이라 인정해주기 껄끄러운 거던가. 하지만 브란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전 경력이 인정을 받건 말건 상관없었다.
괴물 사냥을 동경해 미니에 가문에 들어갔던 기사는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부패한 가문에 염증을 느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주군을 갖는 것에 대한 갈망을 해왔다. 때문에 그는 섬길만한 새 주군을 찾은 지금은 그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그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그나저나 선수상이 그리도 맘에 안 들었나?”
“재수없잖나. 나중에 또 들킬지도 모르고.”
바다의 진주 호의 선수상은 우악스럽게 뜯어낸 것처럼 박살나 있었다. 여기저기에 도끼자국이 선명했다.
“그래도 정식으로 해체하지 그리 거칠게 뜯어냈어야 했나?”
“......큼, 슬슬 움직입시다.”
홉킨스는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뱃전에서 두 명의 모습이 사라졌고, 배 내부와 갑판 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해적들의 횃불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
완전히 폐허가 된 마을 한구석에 그나마 멀쩡한 건물이 서 있었다. 니아트리브의 대마법사가 부린 거대한 해일의 손아귀를 가까스로 피해간 조그만 창고였다. 주변에 해적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그 안에서 소란이 새어나왔다.
창고에선 다양한 복장의 해적선장들이 모여앉아 자신의 개성을 뽐내는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며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있었다.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거다. 알았지?”
“아 알았다고.”
“애들 주머니에 엄한 거 들어가는 일 없이 잘 관리해!”
해적선장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둥근 탁자에서 옥신각신 말이 오고갔다. 무려 열셋의 해적단이 모인 대규모 습격. 고작 배 세 척을 상대로는 과한 전력이었다.
이 습격을 제의한 이, 해적선장 윌리엄은 나누는 몫이 줄어들 수 있음에도 굳이 이 정도나 많은 해적 세력들을 모았다.
그 이유는 선심 쓰듯 정보를 알려주고 습격의 주도권을 가져감으로써, 모인 해적들을 운명공동체로 만들고 자신이 테르세이라 세력권의 맹주로 우뚝 서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현재 이 상황에서 은근히 윌리엄이 상석 취급 받고 있었다. 나름 이전부터 힘 꽤나 쓰는 해적단을 이끌고 있기도 했거니와 몫이 줄어들 수 있는데도 다른 해적들을 끌어들인 것부터가 나 대장할거야 하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세력 차도 있고, 테르세이라 세력권이 붕괴 직전인 이때 다른 세력권에 찢어져 먹히지 않으려면 신속히 우두머리를 성립할 필요가 있었으니 여기 모인 자존심 높은 해적선장들도 윌리엄의 패권야욕을 지지해 주는 편이었다.
물론 순순히 윌리엄의 뜻에 따라가지 않으려는 이도 있었다.
“공평은 무슨. 뺏은 대로 나눠야지.”
한 해적선장이 중얼거리듯 의견을 제시했다. 그 역시도 세력권의 우두머리를 노리는 자였다.
윌리엄의 시선이 돌아갔다. 도전자를 향하는 그의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윌리엄이 험한 말투로 말했다.
“모두 뒤섞여서 약탈할 텐데 잘도 뺏은 대로 나눠지겠다. 피해가 큰 쪽은 그만큼 덜 먹는단 얘기 아냐?”
“그건 많이 뒤진 쪽 책임이지.”
“오, 그래?”
꼬투리가 잡혔다.
“그 말은 쉬이 넘기기 어려운데. 네놈이 일부러 뒤로 빠져서 사상자를 최소로 했다가 우리 뒤통수를 칠 수도 있잖아.”
윌리엄이 정색하자 그 말에 해적선장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돈으로 의리를 사는 놈들이니, 돈이 걸린 일에는 절로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
다수의 해적단 선장들의 벌침 같은 시선을 받고 윌리엄의 체제를 거부하려던 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빈정 상한다고 빠져 봤자 윌리엄이 모은 해적들이 배를 약탈하고 보물을 나눠가질 건 뻔하니 결국 빠진 쪽의 손해가 되니까 말이다.
반항했던 선장은 갑자기 험악해진 선장들의 분위기에서 각자를 향한 동질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놈들 서로 미리 짠 건가.’
윌리엄은 여기 모인 해적단 중 일부를 이미 포섭해놓은 상태였다. 물론 그 수단은 돈이다. 니아트리브의 습격 이후부터 힘의 공백이 생기자마자 준비해놓은 것이다. 아무렴 한 세력권의 머리가 되는 일인데 우연히 나타난 보물선 사건 하나만으로 상석을 차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지금 모인 건 마냥 급조되었다기 보다는 윌리엄의 지지도를 공고히 하려는 일종의 모임 역할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돈만 보고 끼어든 이의 발언권은 무시될 수밖에.
정치적 열세로 인해, 도전자는 수그리고 윌리엄의 밑으로 들어갈 운명이 되었다.
똑똑
하지만, 그 운명은 이 문 두드리는 소리로 인해 다소 달라지게 되었다.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