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소르스 제도의 지배자-2
“뭐? 에크나르프에서 사령술로 보이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니아트리브의 왕실마법사단장이자 니아트리브 해군 제 4함대의 제독인 엘리자 스펠위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린던의 사령술사가 아소르스 제도로 갔다고 철썩 같이 믿은 엘리자는 해적이 드글거리는 그곳으로 가 한바탕 깽판을 쳤으나 전혀 소득이 없었다.
아소르스 제도는 섬이 다소 띄엄띄엄 있어서 넓다. 그곳에서 언제 사령술사를 찾아낸단 말인가? 니아트리브의 모든 배를 징발한다 하더라도 제도를 포위하진 못한다.
그래서 화풀이로 섬 몇 개를 쑥밭으로 만들고 반격하는 해적들을 싹 다 수장시키는 것 외엔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제 4함대에 포함된 1급 전열함을 끌고 갔다는 소문이 아소르스 제도와 가장 가까운 국가인 카스테냐 쪽으로 흘러들어가 한바탕 전투가 벌어져 곤혹스러운 일만 생겼다.
카스테냐와의 전투에선 엘리자의 힘으로 간단히 이겼지만 사상자가 없던 건 아니기에 엘리자는 귀족 의회에서 한바탕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에크나르프에 나타났다고?
“사령술이 확실하다 하던가?”
서슬 퍼런 대마법사의 기백에 장교가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에크나르프 내부에선 당연히 쉬쉬하고 있긴 하지만, 여러 정황과 소문 등을 골라 가장 신빙성 있는 것만을 취합하여 나온 정보입니다. 보르도가 입은 인명 피해는 가히 수천에 달하고 재산 피해도 어마어마하답니다. 그걸 모두 숨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긴, 일반적인 해적이 간 크게 에크나르프 본토를 습격하진 않으니...... 확실한 정보는 맞는 거지?”
“예. 확실합니다. 푸른 안광과 칼에 찔려도 죽지 않는다는 소문으로 볼 때 확실합니다. 왕실의 검증도 한번 마친 정보입니다.”
왕실의 검증이라면 온갖 정보가 떠도는 귀족 사교계에서의 교차 검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르도는 번화한 항구이며 사치의 도시다. 상주하거나 잠시 들른 귀족은 많았을 테고, 따라서 에크나르프 귀족 사교계에 보르도 습격에 관한 정보가 쏟아졌을 것은 당연한 일.
그 중 한 줄기를 타고 니아트리브 사교계에 정보가 새어나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유로파의 귀족 가문들은 거리의 정도만 있지 모두 이어져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에크나르프...... 놈은 에크나르프에 연줄이 있던 건가?’
에크나르프로 간 이유는 분명 암시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보르도를 습격했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국가를 건드리면 뒷일이 어떻게 될지는 알 텐데.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는 건가?
‘돈을 원하는 건 맞는데...... 강대한 나라 둘을 적으로 돌리는 건 대체 뭐하자는 수작......’
무언가 엘리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츠아?’
대륙 세력 전체를 견제하는 니아트리브, 대륙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에크나르프.
이 둘과 모두 경쟁하는 곳은 동부국, 엘츠아 가문 및 카스테냐 밖에 없다. 엘츠아 가문은 카스테냐의 외척이기도 하니, 만일 사령술사가 카스테냐 혹은 엘츠아 가문에서 고용한 공작원이라면?
‘곤란해지는데.’
카스테냐는 현재 신대륙에서 벌어오는 막대한 양의 보물로 한창 세를 불리고 있었다. 무적함대라 불리는 거대한 선단으로 카스테냐는 현재 유로파의 해군력 1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동부국 역시 지금은 세가 약간 기울긴 했지만 여전히 강대한 대륙 세력이다. 서쪽으로 에크나르프, 동쪽으로는 발칸과 그 너머 술탄국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둘 다 만만하진 않은 세력이다.
‘그러고 보니 날 습격한 것도 수상하긴 했어.’
엘리자는 카스테냐가 아소르스 제도에서 돌아오는 니아트리브 4함대를 공격한 걸 의심했다.
물론 그건 오판이었다.
그저 1급 전열함이 출병했다는 사실이 지나가는 카스테냐 상선에 의해 발각되어 카스테냐 측에선 얼씨구나 하고 니아트리브의 전력을 줄이겠다고 달려 나온 것뿐이었다. 거기에 물마법사가 타고 있단 것까진 몰라 참패했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놈은 어디 있는 거지?’
놈이 카스테냐나 동부국이 키운 비밀병기라면, 그렇게 거하게 약탈을 하고 꼬리를 그쪽으로 드리우진 않았을 것이다.
미덥진 않지만 점성술사들의 힘을 다시 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보르도에서 약탈한 막대한 양의 물건을 팔 곳은 역시 아소르스 제도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애오오오오--!!]
“팔!”
“멍청아, 팔이 아니라 앞다리지!”
“하하! 머리! 오늘 니 스튜는 내꺼다!”
“어허, 꼬리가 제일 점수가 높다고! 계속 움직이잖아. 점수표 제대로 봐!”
장교의 취미 호의 가운데 돛대에 고양이 한 마리가 네 다리를 쫙 벌린 채 매달려 있었다. 네 다리와 꼬리는 못으로 박혀 있었고 목은 아예 단검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선원들이 고양이를 향해 단검으로 다트 놀이를 하면서 낄낄거렸다.
[차라리 날 죽여라! 우애애앵!]
고양이 안에 깃든 악마가 처절하게 울부짖었지만 누구도 불쌍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흑흑, 불쌍한 존슨......”
선원 존 빼고.
“그럼 나랑 순순히 계약하지 그래?”
[그럴 순 없다! 그딴 불공정계약은! 캬아악!]
사탄은 소년의 말에 항의하다가 소년이 날린 단검에 입이 꿰뚫렸다. 깔끔한 솜씨였다. 선원들이 10점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점수표는 꼬리가 10점이고 입이 3점이었지만 따지는 이는 없었다.
소년은 사탄에게 부하가 되라는 계약을 제시했다.
소년이 죽을 때까지, 사탄은 소년과 그 세력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며 소년이 시키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소년이 죽으면 자연스럽게 고양이를 살아있게 유지하는 소년의 힘도 해제될 테니 그 몸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헛소리!!]
사탄은 불공정계약에 동의할 순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그 결과는 표적지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흐흐. 돛대는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좋은 곳이지요.”
홉킨스 선장이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돛대에 매달고 물도 음식도 안 주고 뜨거운 바다 햇살에 바싹 말려 주면 누구라도 말을 듣게 되어 있다. 사탄의 경우는 사체에 들어가 있어 음식은 필요 없겠으나, 실시간으로 계속 고문을 하고 있으니 사탄도 별반 다르진 않으리라.
돛대 밑은 사탄이 흘린 검은 피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앞으로도 그 위에 먹물이 더 덧씌워지겠지.
“아, 육지군요.”
“저기가......”
“예. 아소르스 제도입니다. 해적들의 소굴로 유명한 곳이지요.”
수평선 가운데에 비죽 튀어나와 있는 섬은 자신을 순순히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흐릿한 면사포를 두르고 있었다.
아소르스 제도의 섬 중 하나, 테르세이라 섬의 동쪽이었다.
***
해적들의 소굴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멀리서 보는 섬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해골 모양의 커다란 바위절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음침한 분위기에 박쥐가 날아다닌다거나, 새까만 돛을 단 배들이 득시글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고 나무가 울창한 섬의 해안가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점점 접근하여 마을의 형상이 뚜렷해질수록 소년과 그 하수인들의 표정은 굳어갔다.
해안 모래톱에 배들이 처박혀 있었다. 물이 빠지면서 좌초된 게 아니라 꼭 높은 하늘에서 곤두박질 친 것처럼 산산조각 난 채 용골과 흉한 갈비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두 척도 아니고 무려 수십 척에 달하는 다양한 배들이 돛대가 꺾인 채 시체처럼 나뒹굴고, 일부는 심지어 마을 한복판에 선수를 하늘 높이 세운 채 죽어 있었다. 물을 먹어 축 늘어진 돛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마치 교수형 당한 시체 같았다.
마을 역시 멀쩡하지 않았다.
거인이 골고루 밟고 지나가기라도 했는지 건물들이 죄다 모조리 납작해져 있었다.
배를 수리하는 곳도, 예인선을 보관하는 곳도, 하다못해 창고와 배가 정박하는 부두 구조물까지도 완전히 박살나 물 위에 나뭇조각을 둥둥 띄우고 있었다. 일부는 한참 멀리 떨어진 바다 위를 유영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건...... 꼭 해일이 덮친 것 같은데.”
홉킨스 선장이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배가 이렇게 될 수준의 해일이 이런 데서 일어날 리가......”
“일단 내려가서 물어보는 게 낫겠습니다.”
브란트의 제안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정박지가 없어 작은 보트를 이용해 해적섬으로 향했다.
그 수는 96명.
실리 제도에서 얻은 93명의 니아트리브 수병에 두 기사와 소년을 합한 숫자였다. 나머지는 혹시나 있을 해적선의 공격을 대비하여 배에 두었다.
니아트리브 해군을 상징하는 푸른 외투 입은 이들이 사방에 총검 꽂은 머스킷을 겨누며 땅에 발을 디뎠다.
“윽! 대위님, 완전 진흙밭입니다.”
수병들의 지휘관인 제임스 대위가 진흙에 코가 맞닿을 듯 가까이 살피고 냄새를 맡더니 그 윗선인 소년에게 보고했다.
“물이 빠져서 드러난 바다 진흙이 아닙니다. 육지 흙이 바닷물을 머금은 겁니다.”
“확실히 해일인 모양인데, 왜지?”
브란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일은 바다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일이 드물다. 최근에 커다란 폭풍우라도 몰아친 걸까?
“일단 들어가 보자.”
검은 천을 뒤집어쓴 소년이 명령했다.
가까이서 본 해적 마을의 상태는 더욱 처참했다.
위에서 찍어 누른 다음 갈퀴로 바다 쪽으로 끌고 간 것처럼 건물 잔해들이 마구잡이로 얽힌 채 바다를 향해 끌려가다가 만 형태로 뭉쳐 있었다. 지붕 잔해 밑으로 부러진 기둥과 벽의 잔해들과 함께 시체들의 팔다리가 삐죽 튀어나온 모습이 꼭 내장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주인님, 일으킬 수 있으십니까?”
브란트가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물었으나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영혼은 없고, 사념도 없어. 너무 순식간에 죽어서 그런가봐.”
“그럼 어딘가에 살아있을 해적을 찾아야겠군요. 작은 섬도 아니니 분명 다른 곳에도 마을은 있을 겁니다.”
소년의 부대는 마을을 뒤지면서 혹시 생존자나 귀중품이 있을까 넝마주이 노릇을 했지만 아무 소득도 보지 못한 채 마을을 떠야 했다.
[너희들도 따라와.]
소년이 배에 탄 선원들에게 원거리로 명령을 내리고 부대는 해안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해안가를 따라 대략 1마일 정도를 이동하자, 소년과 부대는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브란트와 오르네리가 동시에 손을 들어 부대를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앞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해안을 따라 난 길을 가리는 나무들 너머, 탁 트인 조그만 절벽이 있는 곳에서 해적으로 보이는 선원 복장의 두 남자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거 니아트리브 식 선박 아니야?”
“에크나르프 식도 있는데? 뭐 나포했나?”
섬에 상륙한 부대를 멀찍이서 따라오고 있는 소년의 선박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가봐.”
소년의 명령에 죽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사이로 나왔다.
다수의 인기척에 두 해적이 고개를 돌렸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씨발 니아트리브 놈들이잖아!”
그렇게 카스테냐 어로 욕을 내뱉은 해적이 두 손을 들었다. 머스킷을 겨누는 수병들 사이로 브란트가 갑옷 광택을 번들거리며 나왔다.
“카스테냐 놈이군. 에크나르프 어나 니아트리브 어 할 줄 아나?”
“이 악독한 니앗 놈들아! 지난번에 와놓고 또 왜 온 거야!”
어설픈 에크나르프 어로 비명 지르듯 외치는 해적.
지난번?
브란트와 오르네리가 시선을 교환했다.
‘니아트리브가 왔었다!’
바다에 보물선이 돌아다니는 이 시대는 해적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시대이기도 했다.
해적 소굴은 쓸어도 쓸어도 계속 생겨나기 때문에 특정 해적 집단만 토벌하면 모를까 직접적으로 해적섬이나 소굴을 토벌하는 국가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정보를 얻기 위해 간자를 심어두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국가가 와서 이 지경을 만들었다?
‘마법사가 왔었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마법이다. 해일이 덮친 처참한 광경은 군대만으로 할 수 없는 일. 국가의 군대라면 마법사를 동원할 수 있으니 분명 마법이 만들어낸 것이리라.
브란트는 왜 마법사가 이런 벽지까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주인님 때문인가.’
소년은 린던에서 사단을 일으킨 적이 있고, 실리 제도 약탈도 했다. 더구나 린던에서는 마법사를 상대하기까지 했단다.
마법사들에게 사령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곱게 보지는 않을 거라는 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양항해를 잘 나오지 않는 마법사까지 껴서 보낸 거겠지.
니아트리브는 소년을 찾으려 여기저기 뒤지다가 소년이 갔을 법한 곳을 찾아 한바탕 한 모양이다. 아소르스의 해적들에겐 괜히 애먼 불똥이 튄 셈이다.
[물어봐.]
브란트에게 소년의 의념이 전달되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라.”
총과 검으로 해적을 설득한 끝에, 소년은 무슨 마법사가 왔는지 알아냈다.
‘물마법사라고?’
바다에서 거대한 해일을 만들어내 마을을 완전히 덮어 물청소하듯 쓸어버리고, 바다 위의 선박은 물로 만들어진 촉수로 붙잡아 해안가로 던져버렸다!
해적의 개인적인 과장을 조금 빼고 생각하더라도 대단한 마법사가 이곳을 뒤엎고 갔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만일 그 마법사가 내 하수인이 된다면......’
바다에서 소년은 무적이 될 것이다. 극상의 영혼 맛도 더해서.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휘휘 저어 욕심을 떨쳐냈다. 지금의 소년은 그 마법사와 강대한 니아트리브 해군을 마주한다면 하수인은커녕 살아남는 게 기적이다. 지금은 욕심을 부릴 게 아니라 천천히 힘을 기를 때다.
그러려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물건 팔러 가자. 안내하라 해.]
자금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