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보르도의 악몽-9
소년의 지식은 짧다. 하지만 빈민가에서 거지 노인에게 알음알음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왔고, 짧은 기간이지만 두 기사와 선장에게 세상의 지식을 다양하게 들었다.
그 지식들은 소년을 만났고, 이는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를 어떻게 대처할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되기엔 충분했다.
사람 안에 기생하며 요상한 말을 지껄이며 나쁜 쪽으로 행동을 몰고 가는 존재.
소년은 이 정체불명의 속삭임을 어떻게 대할지 가닥을 잡았다. 소년은 고통을 참아가며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는 운명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몸을 맡겨. 편해지는 거야.
개소리하고 있네.
소년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까 전까지 몸을 맡겼다가 이 사단이 났는데 뭘 믿고? 아무래도 이 녀석은 머리가 나쁜 모양이었다.
빠득
갑자기 소년의 몸 어딘가에서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느긋하게 놈의 정체를 탐구할 시간은 없었다. 몸 상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악화되는 상황. 우선은 몸을 되찾는 것이 먼저였다.
소년은 빈민가에서 별을 보는 노인과 그동안 나누었던 많은 대화 중 하나를 강하게 떠올리며 내면의 무언가를 도발하기로 했다.
‘편해진다고? 그럼 그럴까?’
-당연하지! 드디어 네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모양이구나, 그래야 한다! 좋아!
소년의 눈이 빛났다. 마지막 마디에서 속삭임의 목소리가 약간 변했다. 이겼다는 의기양양함이 느껴졌다. 틈이 보인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할게.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내 몸이 못 버틸 거 같은데.’
-무슨 상관이야. 나는 네 운명을 실현하는 것뿐인데.
‘이렇게 가면 세계를 멸망시키기도 전에 죽을 텐데?
-내 알 바 아니지.
이 자식이 지 몸 아니라고 막말하네. 소년은 화가 슬슬 치밀어 올랐다.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건 뭔가 있어 보이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게 틀림없었다. 남을 속이는 걸 주업으로 하는 녀석답다.
그럼 이제 슬슬 자존심을 건드려 볼까? 날 건드린 걸 후회하게 해 주지.
‘하. 정말로...... 넌 정말 바보구나?’
-뭐얏! 이 꼬맹이가 진짜!
‘바보 맞잖아. 세계를 멸망시킬 운명이라며? 그러면 여기서 죽지 않고 계속 세력을 키워야 되는데 당장 여기서 죽게 만들고 있잖아? 너는 분명히 머리에 물 찬 머저리가 분명해.’
-감히 내게 그런 말을!
속삭임의 목소리가 더 굵고 거칠게 변했다. 이게 정말 소년이 짐작하는 ‘그것’이라면......
소년은 놈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정했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깡패들에게 배운 수많은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말이라니. 지금 네 행동에 가장 걸맞는 표현인데. 혹시 부모님은 멀쩡하니? 아 그럴 일은 없겠네. 네 부모가 홀수라서 뇌도 반밖에 없으니 그런 멍청한 생각밖에 못 나오지. 뇌가 없는 대신 물이 차 있었던 모양이야.’
-뭐, 뭐. 지금, 뭐라고......
당황하는 속삭임. 좋아.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왔다. 소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삭임을 말로 밀어붙였다.
‘뇌에 물이 차 있으니 코로 뇌수를 질질 흘리고 다닐 건 뻔한 노릇이고. 그런 머리로는 뭘 할 수가 없을 테니 보나마나 남들에게 머저리 병신 취급이나 당하고 다니겠지.’
-아니야!
속삭임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그런 취급을 받고 다니는 이가 그걸 부정할 때 나오는 특유의 억지성 목소리였다.
‘아니기는? 머저리인 넌 물론 모르겠지만, 저 멀리 엘프의 속담에 말하는 걸 보면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단다. 그 말에 따르면 너는 단순하고 근시안적이며 짧은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거지.’
-아니야.......
‘가까이 있는 땅만 보며 걷다가 나무에 머리 부딪히는 꼴이랑 뭐가 달라? 물론 넌 모르겠지만, 옛날 위대한 제국 시절에 라인강 너머 토이토부르크를 공격하러 갔던 바루스 총독은 그런 짧은 생각으로 유인책에 걸려서 대패를 했다던데. 안 봐도 그 멍청한 대가리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거야.’
-아, 아니야......
실제로 그런 일이 있기라도 했는지 울먹임이 추가되었다. 소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욕지거리의 수위를 높여갔다.
‘아 말하다 보니 갑자기 화나네? 네가 뭔데 내 몸을 멋대로 조종하고 지랄이지?’
갑자기 화난 것 같은 어조로 말을 높이는 것을 기점으로, 소년은 타인이 들으면 바로 욕설이나 주먹이 날아 들어올 정도의 성적 모욕 및 부모 욕까지 한껏 내지르기 시작했다. 다 빈민가의 깡패들의 싸움 구경을 하며 배운 것들이었다.
-가, 감히 내게 그런 말으으을!!
욕도 욕이지만 그 중에 지능과 엮인 모욕을 줄 때마다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속삭임은 처음의 위엄과 압박감은 내다 버리고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기는. 지금 하는 거 보면 뻔한데. 너는 정말로.......’
-아니야 이 자식아! 아니라고!
욕이 계속 날아 들어오니 속삭임은 점점 아이처럼 단순하고 아니라는 말로만 맞받아치려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소년은 준비한 회심의 마지막 욕설을 내뱉었다.
‘하. 그런 생각밖에 할 줄 모르면 뻔한 거지. 그러고 보니 성경에서 사탄은 위대한 선지자에게 뛰어내리라고 자살을 유도했다지? 누가 그런 걸 곧이곧대로 하겠어? 너는 그런 멍청한 제안을 내민 사탄보다도 멍청해.’
-뭐, 뭐야아아아아앗!!
빙고. 속삭임이 지금까지 냈던 것보다 훨씬 크게 화를 냈다. 가슴 언저리가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속삭임이 광분하면서 틈이 벌어졌다. 신체의 주도권을 틀어쥐고 있던 밧줄이 헐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 남은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자세가 약간 풀어지며 드디어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다.
소년은 이를 악물면서 화끈거림이 느껴지는 가슴을 향해 말뚝을 박듯, 손을 힘차게 박아 넣었다. 퍼석하고 살 뚫리는 소리와 함께 피가 질질 새어나왔다. 몸의 과부하로 인해 약해진 상태라 마치 젤리에 손을 집어넣은 듯 살이 손쉽게 밀려났다.
끄으윽. 고통을 삼키며 소년은 불타는 눈으로 오로지 상대방의 축출을 위해 손으로 자신의 몸을 헤집었다.
소년은 수많은 영혼을 빨아들이는 걸 느끼면서 마냥 당황만 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의 의지는 아니지만 수많은 영혼들을 출입시키면서 소년은 영혼을 다루는 힘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깨우치게 되었다.
그 방식을 이용하여 소년은 깜깜한 방 안에서 더듬어 물건을 찾아내듯, 가슴 부분에서 자신의 영혼에 박힌 이질적인 기운을 뽑아낼 수 있었다.
-으, 으아아아! 이놈! 어떻게 한 거야! 이거 놓지 못할까! 이럴 수는 없어! 말도 안 돼!
절망 어린 냄새를 풍기며 소년의 손 안에서 발버둥치는 무언가.
“잡았다 이 개자식아.”
소년이 통증에 범벅된 표정을 애써 움직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에 잡힌 것은 피처럼 새빨간 불길한 빛의 영혼덩어리였다. 지금까지 맡았던 영혼과는 달랐다. 먹고 싶은 충동은커녕 당장 내버리고 싶었고 고약한 냄새가 코를 얼얼하게 만들 정도였다.
“존스은!”
소년은 고통을 애써 억누르며 누군가를 불렀다.
“애옹!”
그러자 갑판 한쪽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고양이가 울면서 소년에게로 걸어왔다. 장교의 취미 호에서 이쁨 받던 고양이였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배를 장악한 뒤 소년을 경계하는 고양이를 소년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으니까.
-무슨? 안 돼! 안 돼애애애애!
붉은 영혼은 소년이 무엇을 할 것인지 눈치 챈 듯,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소년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소년의 주변으로 날아오고 있던 영혼들이 기겁하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남의 몸에 기생하는 놈이라면 아무 몸에다가 처박아 넣으면 되겠지!’
영혼의 발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은 회색고양이 존슨의 입을 벌려 붉은 영혼을 코르크 마개를 억지로 병 주둥이에 꽂는 것처럼 거칠게 쑤셔 넣었다.
영혼을 꿀떡 삼킨 고양이가 잠시 멍하니 있더니, 눈동자 색깔이 핏빛으로 물들며 제자리에서 발광하기 시작했다.
[애, 애오오오오옹! 안 돼애애애! 이럴 수느으으응! 미야아아아악!]
고양이 소리와 사람 말이 뒤섞인 비명이 존슨에게서 퍼져 나왔다. 걸레에서 짜낸 물 색깔 같은 비명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소년은 소년에게 발톱을 세우고 뛰어드는 고양이를 마법으로 잡아채고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애오오오오-]
고양이의 비명은 도중에 그쳤다. 소년이 마법을 부려 고양이의 목을 뒤틀어 꺾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미 시체라 그런지 죽지 않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살았다.”
소년은 땀과 피로 범벅된 이마를 훔쳤다. 어느새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안개가 피투성이인 가슴의 구멍을 감싸고 있었다. 이곳저곳 갈라진 피부와 조직에도 안개가 붕대처럼 덮어갔다.
“괜찮으십니까?”
소년을 호위하던 브란트가 몸을 구속하던 명령이 약화되자 다가와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소년은 그저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 철수한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몸 상태를 고르며 소년이 명령했다.
보르도를 휩쓸고 다니던 시체들의 물결이 우뚝 멈춰 서고는 그대로 배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물건은 챙기고.]
손에는 두둑한 전리품을 지닌 채. 이왕 약탈한 거 챙기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돈은 죄가 없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선원들을 이끌고 거리로 내려갔던 오르네리와 홉킨스가 헐레벌떡 복귀했다. 갑자기 뇌리로 꽂히는 명령을 이기지 못해 약탈에 어쩔 수 없이 가담했던 둘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문제가 있었어. 지금은 해결했으니까 얼른 떠나자. 빨리 물건 실어.”
“어, 주인님, 그, 사람이 많아졌는데 걔네들은 어떡하죠?”
“냅두고 갈 거야. 배고 사람이고 지금은 필요 없어. 물건 싣는 것만으로도 좁아. 부피가 큰 건 부수거나 바다에 버리고 작고 가치 있는 것만 싣는다. 빨리 움직여!”
소년은 시체들을 모두 거둘 생각이 없었다.
약탈한 물건들을 가져오자마자 보르도에서 얻었던 시체들은 차례차례 부두에 나자빠졌다. 소년의 한계를 뛰어넘었던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영혼의 편린만을 심어두어 스스로 생각조차 못하는 시체들일 뿐이라 챙길 가치도 없었다.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브란트가 옆에서 안개 위로 붕대를 추가로 감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약탈한 물건과 선원, 배들을 모두 가지고 간다면 세력은 확실하게 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세력이 아니었다. 그저 머릿수만 불리고 그 대신 국가 하나의 원수가 되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른 국가와 권세가의 경계를 사 결국엔 몰락하겠지.
“불을 질러라. 우리의 흔적을 없앤다.”
소년은 항구 근처의 출입국 사무소를 비롯해 소년이 공격하여 주인이 없어진 배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소년의 배 세 척이 아예 여기에 들어온 적이 없었던 것으로 만들 셈이었다. 기록도 없애고 항구를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면 소년의 일당을 의심하는 이는 없겠지.
그렇게 보르도의 항구는 붉은 화마에 휩싸여 조금씩 재로 화해갔다. 새카만 연기가 자욱하여 배 세 척이 몰래 강을 타고 빠져나가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의도치 않은 보르도의 끔찍한 밤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