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37화 (38/128)

37화

보르도의 악몽-8

에크나르프가 다른 국가와의 전쟁을 많이 하여 군사력이 강하다 한들 보르도는 수십 년째 평화로운 지방이었다. 다른 나라 귀족들도 자주 들락거리는 사치품의 본고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화를 비껴간 것이다.

때문에 수비대의 질도 양도 별 볼일 없는 보르도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미니에 가문이나 수비대나 오판을 하며 병사만 밀어 넣어 계속 적의 수만 늘려 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고한 보르도 시민들이 마구 죽임을 당하고 재물들이 약탈당하며 배의 흘수선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세 척의 배는 점점 무거워졌고, 거리를 채우는 안광은 점점 늘어갔다.

더 약탈해라! 더 혼란을 일으켜라! 더 공포와 절망을 저들에게 새겨라!

더! 더! 더 죽여라! 더 먹어!

더 많은 영혼을 바쳐라!

소년의 몸은 고삐 풀린 말처럼 이미 소년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으, 으으으으!’

그에 따라 소년의 부담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천이 이천이 되고 삼천이 되고 그 이상이 되었다. 상주인구는 물론이고 외부인까지 가득한 보르도라 소년이 조종해야 하는 시체의 수는 너무나 빠르게 늘어갔다.

그 수는 빈민가에서 다루었던 빈민들의 수를 한참 넘은지 오래였다.

영혼을 빨아들이고 내뱉고, 거리를 퍼렇게 메운 안광들을 조종하느라 소년은 한계에 달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이 한없이 굴러 떨어지는 탈력감이 소년의 몸을 지배했다.

‘이건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소년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건 무리다. 더 이상 했다간 소년의 몸이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소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많은 영혼을 먹으며 강해진 소년의 육신조차도 근섬유가 찢어지고 뼈에 금이 가며 실핏줄이 터져 곳곳에 멍이 드는 등 과부하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았다.

하지만 소년의 멈출 수 없는 충동은 소년의 상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계속해서 소년의 힘을 움직였다.

아니. 이건 스스로의 충동을 한참 벗어났다.

이게 소년의 의지라면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 그만두거나 못해도 주춤거리기는 했어야 했다. 이건 다른 무언가가 자신을 조종하는 게 분명했다.

‘멈춰! 제발!’

소년은 여기서 끝나고 싶지 않았다. 빈민가에서 벗어나 더 넓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이 있는 걸 이제야 알았다. 소년은 더 많은 걸 경험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안 돼! 안 돼!’

-뭐가 안 돼? 키키킥.

충동이, 아니, 소년을 강제로 조종하는 무언가가 속삭였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은밀한 충동의 형태에서 벗어나 비로소 직접적인 울림으로 변모한 붉은 속삭임이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너 뭐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내가 누구냐고? 나는 너다.

‘뭐?’

-나는 너고. 나는 너의 운명이며. 나는 너의 힘이다.

‘무슨 헛소리야, 당장 내 몸에서 꺼져!’

-나와 너는 하나다. 나는 모든 걸 멸망시킬 네 운명이다. 너는 날 거부할 수 없다. 너는 나다.

‘으아아아!’

소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몸 내부에서 힘껏 몸부림쳤다. 어떻게든 힘을 통제하는 몸의 주도권을 가져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돌기둥에 묶인 밧줄을 당기는 것처럼, 줄다리기의 승자는 바뀌지 않았다. 속삭임은 몸의 주도권을 놔주지 않은 채 계속 속삭였다.

-거부하지 마라. 이게 네 운명이다. 모든 걸 죽이고 죽은 자의 세상을 만들어 이 세계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이 네 사명이고 의무다.

‘내 사명? 내 의무? 그걸 누가 정했는데?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그게 내가 지금까지 온 이유야!’

-크흐흐, 가소롭구나.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당장 꺼져!’

-하하하! 내가 어딜 가겠느냐? 내가 너인데?

‘당장 나가! 나는, 나는 더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고!’

-......뭐?

속삭임이 약간의 침묵 끝에 어이없다는 투로 내뱉었다.

뭘 들은 거지?

맛있는 거?

‘영혼보다 맛있는 걸 찾아내고야 말 거야! 그러니 당장 나가!’

-푸하하하하하!

내면에서부터 미친 듯한 폭소가 휘몰아쳤다. 순간적으로 소년이 먹고 뱉는 영혼들의 파편이 이리저리 휩쓸릴 정도였다.

-영혼, 영혼보다 맛있는 걸 찾는다고? 그건 불가능해!

폭소 끝에 속삭임이 외쳤다. 고작 그런 거냐는 듯 약간 화가 담긴 목소리였다.

-네가 황홀하다고 느낀 마법사의 영혼보다 훨씬 맛있고 중독적인 영혼은 그 위에 더 있다! 그걸 맛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영혼 이외에 네 입맛을 충족시킬 음식은 없을 거다!

‘아니! 분명히 있어!’

빈민가에서 소년은 무채색이었다.

뺏고 뺏기는 빈민가. 절망이 가득하며 생존에 급급해 행복과는 먼 빈민가. 가진 것 없는 자들끼리의 질시와 탐욕이 교차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는 빈민가.

그런 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 배울 수 있던 것은 한정적이었다.

소년은 폭력을 배웠다. 갈취를 배웠다. 위협을 배웠다. 거짓말을 배웠다. 살인을 배웠다. 모략을 배웠다.

누군가를 밀치고 밟고 죽인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행위만이 허락받는 곳. 그런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맛을 느끼는 행위는 소년에게 더 특별히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뺏을 수 없다. 남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없다. 거짓말로 소감을 숨길 수도 있다.

빈민가에서 배운 그 어떤 것도 맛이라는 개인이 느끼는 감각을 앗아갈 방도는 없었다.

그런 맛에 대한 가치관 때문에, 소년은 처음 느낀 황홀한 영혼의 맛에 더 쉽게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 충동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돈을 벌 거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한 것도, 빈민가 밖에는 빈민가보다 더 맛있는 게 있을 거라는 막연하고 짧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 보르도에서 소년은 신세계를 맛보았다.

소년은 보르도 거리에서 군것질거리를 먹은 순간, 빈민가에서 먹던 것은 모두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영혼을 맛보았을 때처럼 충격과 은은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놀랍게도 그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준 음식들은 보르도의 중산층도 아니고 일반적인 하층민이 먹는 길거리 먹을거리라는 것이었다. 니아트리브보다 훨씬 식량 자원이 풍족한 에크나르프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소년은 브란트와 함께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며 에크나르프의 놀라운 음식들을 접했다. 마법사 영혼의 약에 취한 듯한 황홀한 맛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독특한 풍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맛의 다양성으로 따진다면 영혼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다양한 종류의 채소, 해산물, 고기. 또 그것들을 보조하는 다양한 향신료와 양념들.

소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이름을 모르는 재료들로 만들어졌지만, 그것들이 소년의 혀와 배를 즐겁게 해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고유의 맛을 살리거나 재료들이 모조리 뒤섞여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다양한 음식들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화끈하거나 새콤한 소스들은 혀와 턱을 짜릿하게 만들고, 부드러운 기름기는 볼 안쪽과 목구멍을 감싸 행복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기름과는 사뭇 다른 우유의 부드러움은 매콤한 양념의 위를 덮어 달뜬 입속을 진정시켜 주고, 달콤한 과일의 향과 달달함은 다시금 코와 혀를 촉촉하게 축이며 다른 음식들을 반기도록 만들었다.

이게 정말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었다니! 이런 게 있었다면 진작 빈민가 따위는 내버리고 왔을 텐데!

소년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손해 본 것만 같았다. 아니, 소년의 기준으로는 명백히 손해였다.

소년의 무채색이었던 세상에서, 영혼의 맛은 명암을 추가해 주었다. 그에 더하여, 사람이 빚어낸 맛은 소년의 세상에 색을 칠해 주었다.

비록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소년에게 콩닥거리는 생소한 감정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리하여 소년에겐 목표가 생겼다.

소년은 하층민이 먹는 것부터 돈 많은 중산층이나 하급 귀족이 먹는 것까지 맛봤다. 그렇다면, 귀족의 제대로 된 만찬이나 왕이 먹는 건 더 좋을 게 아닌가?

그럼 이 세상엔 그 황홀한 마법사의 영혼보다도 더한 음식이 있을 게 분명해! 그걸 맛보고야 말겠어!

그래서 소년은 보르도에서의 먹을거리를 접한 이후로 영혼이 아닌 ‘음식’을, 영혼 대신에 자신의 심리적 허기를 충족시켜줄 음식을 맛보길 꿈꾸기 시작했다.

-정말 보잘것없구나!

무언가가 한껏 비웃음을 담았다. 소년의 자그마한 소망을 산산이 짓밟기를 희망하며.

세계를 정복하겠단 야심도 아니다. 귀족으로 올라가 향락을 누리겠다는 욕심도 아니다. 아랫도리를 휘둘러 여자를 품겠단 음심도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금을 모으겠다는 탐욕도 아니다.

누군가가 보면 정말 별것 없는 꿈이라고 비웃을 만한 꿈이었다.

그 힘을 가지고 고작 그거라고?

하지만 누군가에겐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누군가에겐 천금보다 귀한 것일 수 있다.

세상을 가진 황제는 암살자나 반란이 두려워 그저 편하게 잘 수 있는 밤을 원할 것이다.

귀족은 다른 가문의 견제와 모함에 늘 긴장하고 다투는 것에 진저리가 나 평민의 생활이 부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를 탐하는 바람둥이는 자신의 이상형을 만나 행복하고 단란하게 사는 가족을 부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을 쌓아놓은 상인은 업무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차라리 다 내버리고 자유롭고 고민 없는 것 같은 거지의 삶을 동경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태생과 환경과 지닌 경험에 따라 수많은 이들은, 다른 이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의 삶을 한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년도 자라온 환경에 영향을 받아 ‘다양하고 새로운 맛을 느끼고 싶은 것’이라는 욕망을 가졌을 뿐이었다. 다른 욕망들보다야 소박하겠지만, 당사자에겐 그 무엇보다 크리라.

-그게 가능할 거라 정말 생각하는 거냐? 영혼은 인간의 모든 것이다. 삶을 살며 쌓아온 그 모든 경험과 감정의 집대성이다. 그걸 이길 맛이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누군가의 삶을 집어삼키고 누군가의 감정을 산산이 부수는 그 쾌감을 이길 게 과연 있을 거 같나?

‘분명히 있을 거야!’

-크하하하하핫!

속삭임은 또다시 크게 웃었다. 비웃었다. 붉은 안개를 타고 조롱 가득한 비웃음이 뇌주름 사이사이에 흘렀다.

-불가능해!

속삭임이 칼을 내려치듯 날카롭게 변했다.

-설령 그런 맛이 있다 한들, 너는 이미 늦었다. 네가 빈민가의 인간을 모두 시체로 만들 때부터, 너는 세상을 멸망시킬 운명을 따르는 길에 오른 것이다. 세상의, 별의 적대감을 샀다. 늦었어도 너무 늦었어!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평범한 삶과는 멀어지고 있지! 내가 이렇게 나오지 않았더라도 너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영혼을 먹고 시체를 일으키는 녀석을 그 누가 받아줄까! 이 세상에서 사령술은 배척받는 힘일 뿐, 너는 결국 혼자가 될 뿐이다. 그러면서 맛이라고?

크히히히히!

귓속을 따끔하게 하고 심장을 죄는 타락한 웃음소리가 소년을 한 발짝 더 절벽으로 가까이 가게 만들었다. 소년의 피부 곳곳이 파랗게 멍들고 그것도 모자라 핏방울이 점점이 피부에 맺히기 시작했다.

‘닥쳐!’

-저항하지 마라. 받아들여라. 운명은 바꿀 수 없다. 누가 정한 게 아니라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네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겠느냐? 넌 이미 세상의 적대를 샀고 그걸 피하려면 결국 세상의 산 자를 모두 없애버리는 방도밖에 없지 않겠느냐?

소년은 동의할 수 없었다.

세상의 적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가져야 된다는 건 맞다. 하지만 자신 외의 모든 걸 없애버리는 건 할 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다. 왜냐면 소년은 사람들이 만든 다채로운 맛을 느껴야 하므로.

이 속삭임은 소년의 진심이 확실히 아니었다. 소년의 소망을 비웃는 것도 그렇고, 소년이 알지 못하는 주장도 내세운다.

이 내면의 속삭임이 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위화감이 들었다. 이건 절대로 소년의 일부가 아니었다.

설마?

고통 속에서도 활로를 찾던 소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속에서 이 목소리의 정체에 관한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소년의 감각은 현재 과부하로 인해 불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신체에서 벗어나 내부로 향했다. 그리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속내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머리를 잠식한 것과 똑같은 붉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소년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것 때문이구나. 사람 안에 기생하며 나쁜 쪽으로 행동을 몰고 가는 존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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