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35화 (36/128)

35화

보르도의 악몽-6

“소, 소위님! 배가 떠나고 있습니다!”

“뭐?”

한밤중의 보르도 항의 부두에서 한 선박이 다급하게 돛을 펴고 있는 것이 정찰대의 눈에 포착되었다. 미니에 가문이 이곳을 수색하기 시작하자마자 떠나는 배라?

미니에 가문의 사병들은 며칠 전부터 보르도 수비대의 빈 막사를 차지하고 언제 올지 모를 바다의 진주 호라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배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상부에서는 도망자들은 분명 밤 시간대를 이용해 나다닐 것이라고 했다. 괴물 사체를 판매하려면 떳떳한 방법이 아니라 보나마나 밤에 활성화되는 암시장을 이용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사병들 역시 밤에 움직여야 했고, 눈치를 채고 배가 바다로 도망가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거리를 수색하며 은밀하게 부두를 포위하는 방향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가 눈치를 챈 이상 배가 떠나는 것부터 우선 막아야만 했다.

“놈들이다! 당장 모두에게 전파하고 너는 가서 바다의 진주 호가 맞는지 확인해!”

장교가 외투를 다잡으며 정찰병들에게 명령했다. 이내 거리 곳곳으로 흩어진 부대들에게 정찰병들이 후다닥 달려갔다.

선박 확인을 맡은 정찰병은 발빠르게 부두로 갔다 돌아오면서 멀리서부터 소리를 질렀다.

“선수상 그림이 일치합니다! 여섯 번째 정박지에 바다의 진주 호가 있습니다!”

“가자! 포위한다!”

이리저리 흩어졌던 미니에 가문의 사병 부대들은 바다의 진주 호가 정박한 부두로 하나둘씩 접근하더니 어느 정도 수가 모이자 바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돛을 접어 앙상한 돛대가 드러난 배들 사이 돛을 펴 눈에 확 띠는 배 주위를 포위했다.

기사가 타고 있는 걸 아는지 미리부터 모두 장전을 끝내고 언제든 쏠 수 있도록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무리 기사라 한들 머스킷 일제사격으로 만든 탄막 앞에서는 피를 볼 각오를 해야 한다.

곧 미니에 가문에서 보낸 기사 나으리들까지 올 것이라 그들의 승리는 정해진 결과였다.

그러나 일선의 병사들은 마냥 낙관적이진 못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돌로 된 딱딱한 접안시설이 새삼 불편해졌다. 아군 기사의 지원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죄를 지은 기사의 칼날에 그들의 피가 묻을 것이다. 병사들의 다리 근육이 단단히 뭉쳐지며 혹시라도 있을 기사의 돌격을 대비했다.

횃불이 이글거리고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땀이 맺히는 가운데,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긴장된 목넘김 말고는 들리지 않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달아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배는 돛만 펼쳤지 닻을 올리진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장교들 중 하나가 나서서 외쳤다.

“미니에 가문의 기사 브란트는 들어라! 미니에 가문의 사유재산을 훔치고 사냥한 괴물을 빼돌리려 했다는 혐의가 있으니, 순순히 나와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미니에 가문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불빛 한 점 없이 깜깜한 갑판 위에서 돛이 바람에 가볍게 펄럭이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다른 장교 하나가 배로 올랐다.

갑판 위엔 선원의 그림자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돛을 폈다는 건 출항할 것이란 얘기니 응당 갑판 위에 선원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조용한 적막뿐.

“아무도 없습니다!”

“뭐?”

그렇게 누군가가 외치며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는 그 순간, 엉뚱하게도 바다의 진주 호가 아닌 옆에 있던 다른 배 두 척에서부터 공격이 쏟아졌다.

“으악!”

“기습이다!”

“적이다!”

어두운 뱃전에서 머스킷 발사하는 불빛들이 번개처럼 번쩍거렸다. 그 불빛은 방아쇠를 당기는 창백한 얼굴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맹렬한 총포 소리가 보르도를 덮은 한밤중의 평화를 산산이 찢어발겼다. 화약의 폭발력으로 발사된 둥근 납 탄환이 사병들의 몸을 꿰뚫으며 붉은 피를 터뜨리고 비명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돌겨억!”

“죽여라!”

“으우어어어어!”

“케에엑!”

머스킷 발사로 만들어진 자욱한 연기 사이로 수많은 이들이 튀어나와 돌진하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다의 진주 호의 갑판 밑에서부터 텅텅거리는 나무계단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선원들이 돌격하며 내지르는 함성 사이로 기이한 괴성이 섞여 들렸다.

“쏴라!”

쾅쾅거리며 미니에 가문의 사병들이 총을 마주 쏘았으나, 총알이란 것은 생명체의 신체조직을 파괴하여 살상하는 무기다. 즉, 조직이 파괴되어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는 이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라는 말이다.

“뭐야! 왜 멀쩡해!”

“오지마!”

“으아아!”

선원들은 단 하나도 쓰러지지 않은 채 접근해 병사들을 덮쳤다.

“총검! 총검 질러!”

사병들이 머스킷에 장착한 총검을 앞으로 내밀었으나 선원들은 죽음도 두렵지 않은지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창처럼 내지른 병사들의 총검은 선원들의 몸을 꿰뚫었지만 선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등 뒤로 총구가 튀어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다가오거나 아예 총째로 병사를 휙 들어 메치기도 했다.

머스킷 일제사격에 발생한 화약 연기 사이로 괴성과 비명이 난무했다. 챙챙거리는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와 경악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은 피와 붉은 피가 바닥에 고이며 부두의 물비린내를 비릿한 피비린내로 바꾸었다.

생명이 꺼지고, 대신 검푸른 불이 켜졌다.

횃불이 바닥에 떨어져 피 웅덩이에 치직하고 꺼지며 사방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와는 반대로 되살아난 이들의 안광은 밝아져만 갔다.

총성과 싸우는 소리는 다른 곳에서 수색을 하고 있던 미니에 가문의 사병들과 보르도의 수비병들을 자극했다.

“모두 총 챙겨!”

“비상! 비상!”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옥의 아가리에 몸을 들이밀었다.

***

일상과 다른 일이, 그것도 목숨의 위협이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두려움에 떠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걸 겪는 장본인이 힘없는 이라면 더더욱.

바깥에서 싸우는 소리가 거세게 들리자 주민들은 그저 집 안에 갇혀 벌벌 떠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불을 끄고 안에 없는 척 하며 가구 안이나 지하실에 숨는 수밖에.

하지만 철없는 호기심은 위험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불 꺼진 2층집에서 한 아이가 무슨 일인가 하고 호기심에 창문을 통해 몰래 소란스런 거리를 내다보았다.

거리는 두 쪽으로 나뉘었다. 횃불을 들어 밝은 쪽과 반대편의 어두운 쪽.

어두운 쪽에서부터 인파가 정신없이 거리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저 끝에 도달하는 것이 일생의 목표라는 듯이. 짐승에게서나 보일 법한 안광이 어두컴컴한 거리를 채우며 질주했다.

횃불 아래, 푸른색과 하얀색이 섞인 복장의 병사들이 전열을 이루어 차례차례 머스킷에서 불을 번쩍였지만 달려드는 안광들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발사음과 동시에 달려드는 이들에게서 핏물이 픽픽 터져 나왔지만 쓰러지는 이 하나 없었다. 일제사격으로 인한 흰 연기를 뚫고 죽은 자들이 마침내 병사들에게 도달했다.

시체들이 날붙이를 휘두르며 사냥감에게 달라붙는 사자처럼 달려들었다. 비명과 함께 일선이 단번에 깔아뭉개졌다. 머스킷이 돌로 포장된 길거리에 나동그라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으나 이내 비명에 파묻혔다. 바닥에 떨어진 횃불이 발에 채이고 밟히며 불똥을 사방으로 날렸다.

밝은 쪽의 빛은 사라지는 생명의 수만큼 줄어만 갔다.

“후퇴! 후퇴!”

산 자들의 병력은 총이 통하지 않는 기이한 자들에게 계속해서 밀렸다. 골목마다 형성된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지고, 더 이상 대열을 이루지 못해 패잔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리는 순식간에 죽은 이로 가득 찼다.

패잔병을 따라, 산 자의 온기를 따라 습격자들이 불빛 하나 없는 거리를 질주했다. 그중 하나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위를 바라보았다. 안광의 주인은 창문이 활짝 열린 것을 인식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머리를 넣는 꼬마 역시.

시퍼런 안광 밑으로 은은히 보이는 입이 호선을 그렸다.

***

소년은 하얗게 까뒤집은 눈에서 핏빛 기운을 발하며 하수인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죽여라.]

시체들이 아무 집이나 박차고 들어가 칼을 휘둘러 아군을 늘렸다. 자비도, 죄책감도 없는 안광을 빛내며 죽은 자가 산 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역설적인 일이 늘어만 갔다.

[중요한 곳을 모조리 약탈하라.]

소년이 돌아다니며 눈에 담았던 그 경로를 시체들이 그대로 따라가며 돈이 되는 모든 것을 약탈했다.

부두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보르도 서쪽, 번화가의 화려한 상점들의 문짝이 부서지고 검푸른 불빛을 눈에서 빛내는 시체들이 들이닥쳐 돈, 보석, 미술품, 돈이 되는 물자들을 되는 대로 모조리 챙겼다.

괴성과 웃음을 흘리며 약탈품을 운반하는 그림자들의 모습에 온 보르도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무기, 탄약, 대포를 쓰지 못하게 확보해라.]

되살아난 보르도 수비대의 정보를 통해, 소년의 하수인들은 무기고를 습격해 군수물자를 손에 넣었다. 비상종을 듣고 무기고로 향하는 수비대들은 도중에 습격당하거나 무기고를 장악한 죽은 자들에게 역으로 공격받아야 했다.

도시 외부도 아니고 내부에서 갑자기 천이 넘는 적이 나타난 상황. 그것도 모자라 수가 점점 늘어나고, 죽지도 않는 적이라 보르도 수비대는 맥없이 물자를 털릴 수밖에 없었다.

죽지도 못하는 저주받은 이들이 지나가는 이들을 보이는 족족 동료로 만들며 보르도 거리는 사악한 기운과 피로 넘쳐흘렀다.

[계속 죽여라! 계속 약탈하고 불질러 더 많은 혼란을 일으켜라! 더 많은 영혼을 끄집어내라!]

소년은 계속해서 명령하며 죽은 자들을 날뛰게 만들었다. 소년의 흰자위는 물감을 풀은 것처럼 서서히 새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영혼들이 소년에게 마구 흡수되고 다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영혼의 절반만을 떼어내 지능을 온전히 보전하는 소년의 방식이 아닌,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편린만 남은 영혼들이 서늘한 바람을 타고 시체로 되돌아갔다.

“끄으으!”

“캬아악!”

평범한 주민, 부두의 선원, 보르도 수비대, 길거리의 거지 등등이 죽어 나자빠지고, 이성이라곤 전혀 남지 않고 명령만을 수행하는 산송장들이 되어 또 다른 희생자를 찾기 위해 도시 곳곳을 배회했다.

“끄, 끄으으......”

소년의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흐르고 곳곳의 혈관이 부풀어 올랐으며 근육들이 부위마다 살아 있는 것처럼 펄떡였다.

더! 더! 더 먹어라! 더 죽여라! 더 늘려!

혼돈! 파괴! 영혼!

더 약탈하고 부수고 불질러 혼란을 키워라!

공포와 절망을 새기고 뽑아내라!

소년의 머리를 점령한 붉은 안개는 떠나갈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소년을 떠밀었다. 그 끝이 낭떠러지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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