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34화 (35/128)

34화

보르도의 악몽-5

놀라서 안색이 하얗게 변한 브란트가 제정신을 차리고 소년에게 돌아가는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설마, 지금까지 배를 추적하고 있던 건가!’

두 기사가 탄 바다의 진주 호가 기한이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으니 소속 가문에서 수색에 나섰을 건 분명하지만 이렇게나 일찍 걸릴 줄이야.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니에 가문은 에크나르프 북부에 있다. 그러니 남부에 위치한 보르도에서 두 기사가 목격되어도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다. 두 기사를 찾으려는 손아귀가 도착하기 한참 전에 물자를 다 팔고 다른 곳으로 뜰 테니까.

‘집요한 것들 같으니.’

도착한 당일에 발각되었으며, 지역 순찰대가 아니라 가문의 사병이 있단 것은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항구 곳곳에 눈을 심어두었단 얘기였다. 브란트가 언제 어디서 도착할 줄 알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단 얘긴지.

거기다 보르도는 사냥한 트롤을 선적한 항구도시보다도 남쪽에 있는 곳이라, 만약 미니에 가문이 일찍이 눈을 풀어뒀어도 신경을 끌 가능성이 크다고 브란트는 판단했었다.

물론 이제는 그 판단이 틀린 게 되었지만.

‘끝까지 말썽이구나 미니에......’

괴물 시체가 그리도 좋더냐.

브란트는 생전에도 미니에 가문과 사이가 좋진 않았다. 브란트는 지금까지 성을 하사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올곧은 성격 때문에 가문에 들어갈 때 가문 실세에게 미운털이 박혀서였다.

그래서 브란트는 강하고 현명한 기사인데도 불구하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입 기사들의 채점관으로만 일하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생고생을 해야 했다.

별별 걸 다 아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총과 마법이 발달하고 사람의 영역이 끝없이 확장하는 이 시대에, 산골짜기에 꽁꽁 숨은 괴물을 찾는 일은 고된 일이라 그만큼 여러 시행착오와 모험을 겪으며 많은 걸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 오르네리와 동행하던 것 역시 신입 기사인 오르네리가 트롤을 잡는 것을 도와줄 겸 채점관으로 정해져서였다.

브란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과정이 어땠건 드디어 모실만한 주군을 찾았는데 여기서 발목을 잡히게 될 줄이야.

브란트는 소년에게 돌아와서 다급히 말했다.

“빨리 여길 떠야겠습니다. 제가 있었던 미니에 가문입니다. 아무래도 발각당한 모양입니다.”

“망할, 그러니까 저 기분 나쁜 선수상 달은 배는 팔아버려야 됐다니깐!”

선장 홉킨스가 침을 뱉으면서 서둘러 배 쪽으로 달려갔다. 소년은 브란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왠지 모르게 혼란스러워하는 눈이었다.

“......싸우는 건, 어떻게 생각해?”

“미니에 가문은 기사 가문이자 금속 가공 사업까지 하고 있는 가문입니다. 입문 시험은 괴물을 잡아오는 것이고요.”

병사 여럿이 달라붙어야 하는 괴물을 상대하는 입문 시험을 통과했으며, 금속 가공 사업을 하는 만큼 질 좋은 무기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몰려온단 얘기였다.

“많이 세?”

“주인님의 생각보다는 셀 겁니다.”

“마법사보다도?”

브란트는 말문이 막혔다. 기사가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마법사의 실력이 천차만별이라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브란트는 소년이 가진 능력을 전부 알지 못했다.

“그건 마법사마다 달라서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만약에, 우리가 가진 전력으로 상대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소년은 마법사에 대한 무서움은 뼈저리게 알지만 기사에 대한 무서움은 그렇게까지 겪어본 적이 없어서 질문했다.

“제 실력이 미니에 가문에서 중간에서 살짝 높은 수준입니다. 제 위쪽으론 제가 몇 명이 달려들어도 모두 죽일 수 있는 이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건 기사랑 기사끼리 싸울 때잖아. 나랑 싸우면?”

“......”

브란트는 입을 우물거렸다.

마법사와 기사의 싸움은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수많은 요소와 변수가 둘의 싸움의 승패를 좌우한다. 더구나 세상엔 수많은 마법과 수많은 기사가 있기에 예외는 어디든지 있어, 초짜 마법사에게 불운하게 죽는 검호가 있을 수도 있고 신입 기사에게 대마법사가 죽을 수도 있다.

일반적인 경우로 따진다면, 기사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싸우는 환경과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경험이 많거나 근접 계열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을 제외한다면 기사가 붙으면 어지간한 마법사는 다 죽으니까.

그럼 소년은 어떨까?

소년은 시체를 되살릴 줄 알며, 저주를 걸 줄 알고, 트롤과의 팔씨름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소년이 일으킨 시체들이 가진, 지치지 않는 체력과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다는 점은 전투에서 많은 변수를 불러올 것이다. 그런 그들이 뭉텅이로 몰려간다면?

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방을 농락하는 무기술을 지닌 기사들일지라도 원활히 상대할 수 있는 보증수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정은 할 수 없다.

기사들이 살인병기라 불리고 있지만 단지 놀라운 수준의 무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마력.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마력을 다루어 신체 능력을 높일 줄 안다. 힘, 속도, 내구, 체력에 마력을 얼마나 잘 분배하느냐에 따라서도 기사의 급이 갈린다. 개중에는 비정상적인 위업을 가진 이들도 심심찮게 나오곤 한다.

미니에 가문은 대가문에 들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기사 입문 특성상 기라성 같은 기사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 전투력만큼은 대가문을 뛰어넘는다고 한다.

그런 가문이 기사 중에 어떤 인물을, 얼마나 동원했는지도 모르고, 기사들이 마법무구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며, 소년은 박투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자칫 근접을 허용해 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여러 가능성을 점친 브란트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 의견은 되도록이면 싸움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뒤에서 펄럭하고 돛이 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홉킨스 선장의 지휘 아래 배들이 출항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기사들은 할 만 할 거 같기도 하고......”

살인병기라 불리는 기사도 사람이다. 수로 찍어 누르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죽은 기사들을 일으키면......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저도 압니다. 죽지 않는다는 강점으로 밀어붙이면 가능은 하겠지요. 미니에 가문이 여기에 투입한 인원이 적어서 패퇴시킬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다음은요?”

“......”

“이길 가능성은 높을 겁니다. 미니에 가문이 여기에 모든 힘을 결집시켰을 리도 없으니까요. 문제는 다른 쪽입니다. 귀족 가문을 적대시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닙니다.”

문제는 싸움의 승패가 아니라 귀족 가문과의 관계적 문제였다.

“미니에 가문은 괴물 시체 판매로 금전 쪽에서도 힘이 센 편입니다. 그 가문과 여기서 부딪혔다가 잘못해서 주인님에게 앙심을 품고 계속 쫓아온다면 향후 주인님의 힘이 강대해지기 전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힘을 드러내 적으로 인식되는 것보단 차라리 도망쳐서 귀찮은 녀석 정도로만 보이는 것이 더 낫습니다. 괴물 시체 하나 때문에 넓은 바다까지 나오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으음......”

“저희의 ‘세력’은 아직 모자라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인님.”

“으으......”

소년은 이례적으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갈팡질팡했다. 평소에 어지간하면 표정이 별로 없는 소년이었기에 브란트는 소년의 상태가 뭔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주인님께서는 신중하게 행동하시잖습니까. 갑자기 왜 이렇게 싸움을 원하시는 겁니까.”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눈썰미 좋은 브란트는 소년의 성정을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기사를 채점해와 사람을 파악하는 데는 자신이 있는 브란트다.

소년은 표정을 짓는 것이 드물고 잔잔하고 깊은 물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동기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배우려 노력하며, 모르는 것은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년보다 아는 것이 많은 두 기사와 선장의 말을 잘 따르며 논리적이고 넓게 생각하려 드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논리적 타당성이 높은 주장 앞에서 갑자기 고집을 부리다니. 이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성격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었다.

“그게......”

소년은 답할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으니까.

소년의 본심도 사실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볼일도 다 끝났겠다, 보르도에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옳은 말만 하는 브란트의 조언을 듣는 게 맞다. 하지만 계속 머릿속에서 무언가 소년을 싸우라고 떠밀고 있었다.

이는 함정을 파놓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마법사들을 상대했을 때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때는 무지를 바탕으로 무작정 이길 것이라 자신하여 들이박은 거라면, 지금은 근본 없이 뇌리에서 튀어나온 알 수 없는 충동이었다.

바로 앞에 수많은 생명이 있다!

영혼을 먹고 시체를 다루며 모든 걸 지배해라!

바로 앞에 만찬이 가득하잖나! 그걸 왜 버리려 하는 거지?

소년의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붉은 안개가 성질을 부렸다.

“주인님. 주인님께서 신중히 행동하는 버릇을 들인 계기를 생각해 주십시오.”

소년의 조그만 양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마주친 브란트의 깊은 목소리에 소년은 그 충동이 살짝 옅어지는 걸 느꼈다.

계기.

그 말에, 니아트리브에서 겪은 쓰디쓴 패배의 아픔이 소년의 마음속 상처를 자극했다.

비록 할만 해 보이지만 실제 힘은 현재 보이는 것보다 큰 적. 그걸 이미 니아트리브에서 그 결과까지 몸소 겪었기에, 소년은 무모한 도전에 달려들라는 충동을 힘껏 뿌리쳤다.

소년의 심적 거부와 브란트의 설득에 소년의 뇌리를 감싸려던 붉은 안개가 혀를 차며 쑥 들어갔다.

소년의 검은 눈이 살짝 맑아지며 초점이 돌아왔다. 소년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나.

소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작전상 후퇴였다는 듯 내면의 붉은 안개는 다시 거세게 몰아쳐 소년을 점령했다.

“아니. 싸운다.”

그 목소리는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평소의 소년보다도 더.

“......예. 알겠습니다.”

브란트는 소년의 명령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속으로 걱정하면서도 소년의 제정신 아닌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영혼은 눈앞의 주인에게 매여 있었으므로.

생명이 가득한 대도시 보르도를 바라보는 소년의 외눈에서 불길한 핏빛 기운이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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