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33화 (34/128)

33화

보르도의 악몽-4

밤중의 보르도 강가.

세 척의 배에서 선원들이 부지런히 큼지막한 짐들을 옮기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장물아비 측의 직원들이 열심히 무언가를 옮겨 적고 있었다. 한 장은 정식 장부, 한 장은 수치가 살짝 조작된 장부. 제대로 된 장부는 장물아비가 개인 소지하고, 조작된 건 상부로 제출될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값을 후려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브란트의 위협 섞인 말에 대머리 장물아비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굽신거렸다.

자고로 장물은 시세보다 싸게 거래된다. 사는 쪽이 장물이 추적될 위험성과 몰래 파는 수고를 짊어지니까. 보석이나 세공품 등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비밀 사략 선단(?)에게는 그런 걸 바랄 수도 없었다.

그들이 가져온 건 말 그대로 금속이었다.

그것도 통짜 괴!

금속류는 장물업자들도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어 핑계로 값을 깎을 수 없는 품목이었다. 암시장에 가져온 것이니만큼 떳떳하지 못한 거라는 건 알았지만 푼돈 때문에 귀족을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 선단에게 에누리를 바랄 수 없는 점은 하나 더 있었다.

괴의 형태를 잘 살펴보니 못이나 망치, 끌 등의 형태가 이리저리 비틀린 형상으로 누가 조각한 것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 금속 괴들은 녹여서 만든 게 아니라 각종 쇠붙이들을 압착시켜 만든 거라는 의미였다. 그것도 균일한 크기로 바짝 압축시킨 것이 절대로 평범한 수법으로 그렇게 만든 건 아니었다.

‘빌어먹을, 마법사가 있다고 자랑하는 건가?’

그건 틀림없이 마법사의 솜씨였다. 장물아비는 마법사를 만나본 적도 없고(공개된 신분으로는) 마법사의 마법 또한 본 적이 거의 없지만, 고작 사략 선단 약탈품 정리용으로 사사로이 마법사를 쓰는 가문의 앞에선 몸을 낮춰야 한단 것쯤은 알았다.

때문에 장물아비는 금속 괴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는 허리가 더 유연해져야 했다. 아무거나 뭉친 거라 제련 비용이 따로 들게 뻔한데도.

-브란트, 쟤 왜 저렇게 비굴해?

-주인님의 멋진 솜씨 덕분이죠.

-응?

브란트는 약탈한 금속의 부피를 줄일 수 있는 방도가 없나 논의하던 중 그걸 들은 소년이 그 자리에서 쇠붙이들을 모조리 손짓만으로 압착하는 기적을 보았다.

기사 수업 중에는 마법사를 더 수월하게 상대하기 위해 몇 급의 마법사가 어떤 수준의 마법을 얼마나 쓰면 지치는지에 대한 정보가 많이 있었다. 물론 마법의 종류가 너무나 많아 전부는 알 수 없지만 기사와 마법사가 투닥거리면서 쌓아온 역사가 깊으니 어느 정도는 파악 가능했다.

소년이 보인 마법을 일반적인 수준의 마법사가 펼친다면 몇 번 하면 기진맥진하겠지만, 소년은 그걸 평범한 가내수공업을 하듯이 연속적으로 뚝딱 해냈다.

경험 많은 마법사도 아니고 열일곱이 갓 된 꼬마가 말이다.

입을 떡 벌리며 감탄하는 선원들 앞에서 소년은 별거 아니란 반응이라서 브란트는 소년이 자신의 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을 못하시는구나!’

아예 체감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니아트리브의 최정예 마법사들에게 화끈하게 데인 뒤에는 소년은 소심하다고 할 정도로 모든 사안에 신중하게 접근하며 소심하게 힘을 쓰곤 했다.

그 예로 실리 제도에서 아이리시 인들의 시체를 일으키자고 마음먹기까지, 자신이 그 일을 한 뒤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고 혹시나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을 점치면서 무려 20분에 달하는 시간을 소요했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전력을 쓴다던가 그런 적이 없다 보니 소년은 뭔가 실제로 대단한 일을 해도 소년 입장에서는 힘들지가 않으니 ‘어 그냥 간단한 거 아냐?’하는 식으로 넘기기만 했다.

이는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 한계에 걸려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오히려 한계를 알고 자신을 이해하여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하는 것이 기사고 마법사고 마력을 가진 이들의 보편적인 수련방식이다.

‘마법사가 있어야 한다.’

브란트는 마법사의 필요성을 느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그 자신만의 노력뿐 아니라 올바르게 이끌어줄 수 있는 스승 역시 필요하다.

소년의 육체적 능력과 관련해서는 브란트와 오르네리가 있으니 소년의 범상치 않은 육체적 능력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지만, 마법 부문은 당연히 마법사가 봐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구하지?’

마법사는 용병으로 나오는 경우가 적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여러 국가에서의 마법사 보호 정책 및 마법사 집단의 싸고 돌기 때문에 떠도는 마법사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자국민 남성 전부를 용병업으로 내모는 산골짜기 국가 스위체조차도 마법사는 별도의 기관에 모조리 모아놓을 정도다.

마법사 집단에 들어가지 않고 떠도는 마법사들 중 사정이 있는 건 극소수가 대부분이 수배자거나 불법 마법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지나가던 마법사를 죽이고 데려오기에는 문제가 많다. 거의 모든 마법사가 단체에 속해 있다 보니,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소년의 위대한 마법적 능력을 제대로 봐주려면 수준 높은 마법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데, 그런 이를 죽이는 것도 힘들고, 추적을 피하기 위해 몰래 죽여야 하며, 그렇다고 되살려서 탈퇴를 시켜도 강한 마법사가 갑자기 왜? 하면서 마법사 사회의 관심이 끌릴 게 뻔하다.

이래저래 곤란한 일 투성이다.

‘골치 아픈데.’

소년이 멍하니 짐이 왔다갔다하는 걸 구경하는 동시에 브란트가 속으로 고민하는 시간이 지나고, 장물아비가 굽신거리며 물품목록과 돈주머니를 내놓았다.

“다 끝났습니다 나으리.”

브란트는 묵직한 주머니의 무게를 느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짭짤했다.

실리 제도의 크고 작은 마을을 모조리 습격하여 대장간의 모루에서부터 표지판에 박힌 못 하나까지 금속이란 금속은 죄다 긁어왔다. 금속만 가져온 것도 아니고 술통이나 식량 등의 물자도 약탈했으며 니아트리브 수병들의 물자들도 같이 넘겼기에 주머니는 묵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요새의 질 좋은 니아트리브제 대포도 다 쓸어오고 나무판자 등 배 수리용 자재도 잔뜩 챙겨 배도 무거워졌는데 주머니까지 두둑해진 판이니 첫 약탈은 여러모로 남는 장사였다.

무엇보다 선원 수가 대폭 늘었다. 소년의 하수인 숫자는 이미 훌륭한 군대였다.

기존에 있던 이백 오십여 명 가량 되는 장교의 취미 호와 바다의 진주 호 선원들에, 이백 이상의 아이리시 인들의 시체가 더해졌다. 거기에 오백이 넘는 실리 제도의 니아트리브 남성들이 더해지고 143명의 수군 및 민간 함선 선원이 합쳐져, 총인원이 무려 천 명을 훌쩍 넘겼다.

거기에 다 합쳐 백 문에 가까운 니아트리브제 대포와 화약 및 대포알, 이백 정의 머스킷까지.

전열함급도 되지 않는 배 세 척에 있는 전력치고는 너무나 과했다.

‘배의 척수가 모자라 한계는 있지만 어지간한 포격전에서도 괜찮을 거고 선상 백병전은 필승이다. 앞으로 웬만한 약탈 전투에선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거야.’

약탈 전투는 고사하고, 작정하면 조그만 도시 하나도 털어버릴 수 있는 숫자에 브란트가 앞으로의 밝은 미래를 기대했다. 돈주머니를 받고 다음 약탈지를 어디로 할까 생각하던 브란트의 어깨를 홉킨스 선장이 두드렸다.

“이봐, 뭔가 분위기가 안 좋은데.”

홉킨스의 시선을 따라가니 거리 곳곳에 횃불을 든 이들이 눈에 띄었다. 횃불 아래로 보이는 복장은 가슴팍과 배는 흰색이고 옆구리와 팔은 푸른색인 외투였다.

“군대? 무슨 일이지?”

명백한 에크나르프 군복이었다. 그들은 머스킷 한 정씩을 팔에 매고 거리를 이리저리 쏘다녔다. 단순한 순찰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사람들에게 탐문을 하는 것이, 소년은 그들의 움직임이 린던 빈민가에서 탈영병을 찾아다니던 이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누굴 찾는 거 같은데.”

“예.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만......”

“가슴팍에 그림이 보여.”

“그림? 그럼 가문 문장일 겁니다. 사병인 모양이군요. 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상한 새가...... 으음. 뭘 물고 있는데 뭔지를 모르겠어. 나뭇가지? 잎? 이상한 천 같은 것도 있고.”

소년은 아직 상식이 많이 부족해서 별별 것을 그려넣는 문장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새가 뭘 쥐거나 물고 있는 문장은 넘치고 넘쳐 그것만으로는 어느 가문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색깔은요?”

“흰색이랑 검정색.”

색깔이 있다면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지만, 기사라면 모를까 일개 병사에게까지 색실로 문장을 수놓지는 않아 대체로 흑백 도장을 찍은 천조각을 붙이는 편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문들이 일선에서의 흑백문장의 모호함을 해결하기 위해 문양이나 상징 등을 마구 넣어 문장의 복잡함을 더욱 부추겼다.

“그냥 제가 가까이 가보겠습니다.”

기사양성소의 수업에는 각종 가문의 문장을 외우는 것 역시 포함되었다. 잘못해서 대가문에게 결례를 저지르면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게 되니까.

그저 지나가는 사람인 척, 그늘진 담벼락 안으로 숨어들어간 브란트가 스쳐지나가는 병사들의 가슴팍을 주시했다.

“!”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미 죽어 살짝 하얘진 얼굴에서 핏기가 더 가셔서 흡사 유령같이 보였다.

‘미니에 가문!’

병사들의 문장은 미니에 가문의 문장이었다. 브란트와 오르네리가 속했던 그 가문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