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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32화 (33/128)

32화

보르도의 악몽-3

“안녕하신가. 그래, 팔 게 있다고?”

대머리에 뚱뚱한 체격을 가진 장물아비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에 무기를 지닌 덩치들이 둘러싸 은근히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래. 금속을 비롯해서 식량이나 술 같은 거지.”

브란트는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들은 1분 내에 모조리 도륙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브란트가 그들에게 겁먹을 리는 없다.

장물아비가 브란트에게서 묻어나오는 귀족적 억양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허허, 이거 귀한 분께서 오셨군요. 그럼 양은 얼마쯤이나......?”

“약탈을 거하게 했거든. 족히 마을 열 개 이상.”

“......!”

장물아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최근 이 주변에서 산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없다. 그렇게 많은 마을을 털었다면 이 앞의 인물의 정체는 하나다.

해적.

그리고 이렇게 얼굴도 안 가리고 당당하게 나오며 귀족 어투를 쓴다면 볼 것도 없이 귀족이 몰래 거느린 사략선단이 분명했다.

장물아비의 표정이 조금 더 비굴해졌다. 돈이 되는 물주로구나!

“그, 그럼 양은 얼마나.....?”

“잘 모르겠군. 배 세 척 분량인데 이것저것 털어서. 직접 확인해보겠나?”

“그거야 좋지요!”

배 세 척이라! 거기다 직접 확인이라니! 속한 파밀의 눈을 속이고 장물아비가 물건을 빼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장물아비는 흔쾌히 허락했다. 거래는 빠르고 간단하게 성사되었다.

***

벽을 파내 만든 방으로 들어간 브란트가 장물아비를 기다리고 있을 때, 홉킨스와 소년은 밖에서 가만히 서서 암시장 구경을 했다.

죽음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로브 쓴 암살자가 지나가고, 거드름 피우는 귀족 가문 하인이 지나가고, 절그럭거리며 일거리를 찾는 용병이 지나갔다. 수상한 짐을 옮기는 짐꾼 무리나 무기를 드러낸 파밀 조직원들 역시 둘 앞을 스쳐갔다.

그리고, 이 암시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둘 앞에 나타났다.

“어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사방을 둘러보며 우물쭈물 하는 것이 길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눈에 확 띄는 푸른빛에 곳곳에 달린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고 밝은 금발을 늘어뜨린 푸른 눈의 소녀였다.

소녀를 보고 여러 암시장 사람들의 눈이 번쩍였으나, 접근하는 이들은 없었다.

잡아다 노예로 파는 건 뒤탈이 없는 이에게나 그러는 거고, 저렇게 대놓고 ‘나는 귀족입니다’하는 사람을 잡으려 들지는 않는다.

대귀족의 자제기라도 하면 암시장 전체가 뒤집어질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암시장 토박이들이 소녀에게 멋모르고 접근하려는 이들에게 넌지시 경고할 정도였다. 괜히 귀족이 사병들로 들쑤시면 귀찮아지니까.

대신 소녀를 도우려는 이 역시 없었다. 귀족을 상대로 가장 좋은 결과를 맺는 방법은 애초에 엮이지 않는 것이다. 암시장의 그 누구도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귀족 모독죄니 하는 걸로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니 인생은 니 인생이다, 나는 신경 안 쓴다, 하는 분위기 속에 소녀는 아무에게도 도움 받지 못한 채, 암시장의 교차로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

소년은 자신의 삶과는 이역만리 떨어진 삶을 살아왔을 그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쓰레기통과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의 차이. 저 소녀는 앞으로 가문의 손을 타 더 아름답게 세공될 테지.

질투 같은 감정은 없었다. 소년은 난생 처음 보는 모습에 그저 신기해서 관찰만 할 따름이었다.

귀족이라. 그들은 얼마나 맛있고 다채로운 맛을 즐기고 살까? 평소에 뭘 먹고 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며 참았다. 대신 소년은 보르도의 저잣거리에서 먹었던 음식들의 맛을 떠올리며 혀로 이를 훑었다.

그때,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이 불안하게 이곳저곳을 훑다가 소년과 마주쳤다. 소녀는 자신과 키가 비슷한 아이에게는 어느 정도 용기가 생기는 모양인지 선뜻 다가왔다.

소년은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피했지만 소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소년은 소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가까이 다가오니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암시장과도, 소년과도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소년은 지금까지 맡아온 냄새들과는 다른 향취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귀족의 냄새라. 이상한 걸 뿌리고 다니네.

“어, 안녕......”

에크나르프 어로 쭈뼛거리며 손을 살짝 드는 부잣집 아가씨. 아직 아이라 그런 걸까 거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직 귀족은 평민보다 우월하다는 가치관이 덜 박힌 걸지도. 소년은 침묵한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저, 저기, 여기서 혹시 엘츠아 가문 사람 본 적 있어?”

모른다. 소년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소녀의 표정이 좀 더 어두워졌다. 그렇구나 하고 힘빠진 말을 한 소녀가 다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일행을 찾으려 애썼다.

‘잠깐. 엘츠아?’

유로파에서 굉장히 세가 세다는 그 가문?

소년이 홉킨스를 보고 속삭였다.

-홉킨스, 들었지?

-예.

-데려다 주면 돈 좀 받을 수 있을까?

돈이 많으면 더 많은 맛있는 걸 사먹을 수 있다는 판단에 소년이 군침을 삼켰다.

-글쎄요, 니아트리브 귀족과는 어떻게 다를지 모르겠지만 니아트리브 귀족은 그냥 오만하게 고개 까딱하고 끝나는 편입니다. 고마움의 대가니 뭐니 그런 건 없죠. 유로파 대륙 귀족이라고 그다지 다를 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엮일 구석도 없으니 그냥 냅두죠?

‘흠.’

소년은 뒤집어쓴 검은 후드 밑으로 왼눈만 빼꼼 내놓은 채 소녀를 지켜보았다. 귀족이라면 지켜주는 호위병이라도 있을 텐데, 어딜 내버려두고 이런 데 돌아다니는 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브란트 나오면 얘기해보자.

소년이 슥 소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옷깃을 잡아당기거나 팔을 잡거나 하진 않았다. 귀족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아니까. 소년이 다가가자 소녀는 주춤거리면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소년이 앞을 막아선 건 아니었다. 그저 자박거리며 일부러 발소리를 내면서 근처로 다가간 것뿐이다.

“......”

“......”

소년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소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 말이라도 해주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둘이서 만들어내는 어색한 분위기에 소년은 소녀가 자신의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음에도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하거나 인상을 찡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귀족에게 막 말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답답하네.’

옆에서 그걸 보는 홉킨스 선장은 도와줄 수도 없고 에크나르프 어도 할 줄 몰라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가만히 굳은 둘을 보기만 했다.

“일 끝났다. 가자.”

때마침 브란트가 장물아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거래가 잘 성사되었는지 장물아비의 표정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깨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년이 소녀에게서 떠나 브란트에게로 다가갔다. 소년의 빠른 발걸음에는 살았다 하는 느낌이 돌았다.

-브란트, 쟤 엘츠아 가문 사람이래.

“......뭐?”

브란트가 놀란 눈으로 아직도 주변에서 서성이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브란트는 가벼운 미소를 띠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꼬마 아가씨. 어쩐 일로 여기 계시는지요?”

“아, 그게, 음. 분명 가문 사람들이랑 같이 왔는데, 뒤돌아보니까 없어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지만 애써 울음을 참는 표정으로 소녀가 설명했다.

“허, 저런. 혹시 어느 쪽에서 오셨습니까?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예에 그럼요.”

빙긋 웃으면서 뒤로는 홉킨스와 소년에게 손짓하고 앞으로는 귀족 가문의 아가씨를 호위한다는 의미로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다행이라며 맑게 웃었다. 브란트는 그 모습에 속으로 감탄했다.

‘다 크면 사교계를 휘어잡고 다니겠군.’

아직 앳된 티가 여기저기 있는 지금도 한 떨기의 백합 같은 모양새이거늘, 어른이 되면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아, 그리고. 저 애요.”

“애요?”

소녀가 문득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혹시 주인님이 실수를 저지른 걸까?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혹시 막 그 신기한 힘을 쓰는 사람인가요?”

“신기한 힘이라 하면......?”

“손에서 불을 일으키고 손이 닿지 않아도 물건을 움직이는 사람들이요.”

아. 마법사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브란트는 하하 웃었다.

“아닙니다. 그저 시종일 뿐입니다. 잘못 아셨겠지요.”

“이상하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얼른 가문을 찾으러 가자는 브란트의 종용에 관심이 돌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를 찾는 엘츠아 가문 문장을 단 호위병들이 이리저리 암시장 거리를 쏘다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브란트는 소녀를 그들에게 인계했고 보수는 없이 소녀에게 고맙다는 미소만 받고 헤어지게 되었다.

가문 이름은 대지 않고 그냥 허허 웃으며 넘겼다. 암시장에 왔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단 뜻이니 암시장에서는 암묵적으로 서로의 가문을 묻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왜 보수 같은 걸 요구하지 않느냐는 소년의 물음에 브란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굳이 보수 같은 걸 타내려고 노골적으로 구는 건 귀족적이지 못하게 여겨집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저쪽이 은혜를 잊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지요. 명예의 문제가 있으니 모른 척 한다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사교계에 안 좋은 소문은 치명적이거든요. 이렇게 연을 한 가닥이나마 맺었으니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겁니다. 언제쯤 도움이 되돌아올지 요원하긴 하지만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대체 엘츠아 가문이 뭣 때문에 암시장에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며 중얼거렸다. 저 멀리 암시장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엘츠아 가문 사람들을 보며 소년이 긴장을 비로소 풀었다.

‘......역시. 세상엔 예외가 많아.’

자신이 마법사인걸 알아보다니. 지금까지 그 어떤 이들에게도 자신의 마력을 들키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더 조심해야겠어.’

짧은 만남은 그렇게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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