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보르도의 악몽-2
이 시대 사람들은 빈곤한 편이었다.
지역의 상황이나 자연 환경, 계급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리기는 하지만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혹은 그 이하의 사람들은 매우 부족하게 하루하루를 겨우 벌어먹고 산다. 도시에 진드기처럼 붙은 빈민가 사람들이 아니라도 말이다.
저 북쪽, 추운 지역의 시골은 농사도 제대로 안 되고 인구밀도가 적어 소일거리도 적은 지역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일부 지역은 오히려 빈민가를 부러워할 정도였다. 도시 근방 빈민가는 도시 사람들이 꺼리는 일거리라도 늘 들어오니까.
그런 면에서 소년의 일당이 보르도에 온 것은 소년에게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농사와 목축으로 삶을 겨우 이어 나가고, 그마저도 대부분 귀족들이나 상단의 손아귀 안에 있어 궁핍하게 사는 이들이 가득한 다른 에크나르프의 지방들과는 다르게, 보르도는 수도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한 지역이었으니까 말이다.
소년은 해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동안 자신이 몰랐던 신세계를 보고 듣고 맛보고 맡으며 빈민가 밖으로 나온 즐거움을 맛보았다.
***
중천에 뜬 해가 서산의 꼭대기에 걸리며 대다수의 가게들이 문을 닫을 즈음, 맛집 투어인지 시내 구경인지 모를 난리통이 끝났다.
“정말, 대단했어.”
세상에 이런 데도 있구나 하며 말을 덧붙이는 소년. 소년의 목소리에선 감탄이 서려 있었고 눈동자는 정말 이례적으로 기쁨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죽은 생선처럼 늘 무표정에 생기 없는 눈을 하고 있던 소년이다. 하지만 지금 소년은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질 만큼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건 소년의 어린 외모에 어울릴 법한, 아이가 응당 가질 법한 활달함이었다.
그 입가에는 이것저것 사먹느라 미처 닦아내지 못한 소스와 음식 부스러기가 조금 묻어 있었다. 지금은 사악한 마법사도 뭣도 아닌, 그저 세상 구경을 처음 나와 처음 보는 맛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호기심 많고 기쁨에 찬 소년에 불과했다.
‘왜 배에서 식사를 안 하시나 했더니 입맛에 안 맞았던 거였구만.’
홉킨스는 더럽게 맛없는 쉽비스킷 죽과 염장 고기 스튜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변변찮은 식재료가 없는 니아트리브라 장교인 홉킨스조차도 맛없는 식사를 해야 했는데, 그에 비하면 이곳 보르도의 음식들은 가히 천국의 맛이라 할 수 있었다.
에크나르프가 온갖 맛의 본고장이라더니, 그 말 한번 틀린 게 없다며 속으로 감탄했다.
다양한 식재료가 나는 에크나르프의 귀족 출신인 브란트가 만족한 둘의 표정을 보고 뿌듯해했다.
“많이 배우셨습니까?”
음식점을 더 집중적으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상식을 주입시키는 브란트의 입은 닫힐 새가 없었기에 소년은 세상에 대해 조금 더 배울 수 있었다.
“응. 브란트는 정말 많이 아는구나.”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은 브란트가 이어 말했다.
“그럼 이제 충분히 공부했으니, 이제는 어두운 쪽을 보실 차례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브란트의 얼굴은 다소 굳어 있었다. 약간의 혐오도 엿보였다. 건드리고 싶지 않은 해충을 잡아야 하는 이의 표정이었다.
“맛있는 거 좀 더 먹으면 안 돼?”
부모에게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소년의 눈썹과 눈매가 축 늘어졌다. 평소엔 표정 없이 무덤덤하던 소년인데, 다양한 ‘맛’을 경험하더니 표정도 풍부해진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돈이 없습니다.”
브란트가 멋쩍게 웃으며 가벼워진 돈주머니를 슥 들어보였다. 그들이 들린 음식점들은 값싼 노점상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귀족이나 상인을 위한 비싼 음식점들이라 고작 4곳 만에 주머니엔 먼지밖에 남지 않았다. 꽤 급료를 많이 받는 기사 둘의 쌈짓돈인데도 말이다.
“그럼 거래 끝나고 돈 생기면 다시 갈 거야?”
“물론이죠. 자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시간은 많지만 장물아비들은 시간대별로 움직이기 때문에 서두르는 게 좋습니다.”
셋은 마차를 타고 보르도의 근교로 향했다. 마차삯은 말없이 따라다니던 홉킨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소년이 아쉬운 표정으로 홉킨스의 주머니를 바라보자 홉킨스는 헛기침을 하며 ‘제 주머니는 행정비용입니다’하며 매정하게 끊어냈다.
건물로 가득 찬 도심과는 달리, 근교는 포도밭으로 가득했고 이따금씩 양조장 건물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브란트는 기억을 더듬듯 몇 군데의 양조장을 돌더니 어느 한 양조장 앞에서 멈추었다.
입구에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가 있는 양조장이었다.
“......에크나르프에서 양조장을 거점으로 하는 암시장은, 이렇게 마른 나무를 앞에 둡니다.”
그렇게 말한 브란트가 둘을 이끌고 양조장 안으로 들어갔다. 담벼락 안으로 들어오니 삼엄한 기세를 풍기는 이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무슨 용무십니까?”
양조장 일꾼이라기엔 너무 험악한 얼굴을 가진 덩치가 다가왔다.
“뭐겠나. 일 보러 왔지. 안내해라.”
브란트는 복장에 어울리는 귀족 특유의 오만한 자세로 일꾼을 대했다. 일꾼보다도 당당한 덩치를 가진 브란트가 그렇게 말하자 일꾼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슥 허리를 숙였다.
“아, 손님이셨군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야, 너! 이분들 좀 안내해드려!”
셋은 한 일꾼의 안내를 받아 양조장의 지하로 향했다. 포도주 양조장이면 있어야 할 포도 냄새나 나무통 냄새는 없었다. 소년이 코를 킁킁거렸다.
‘......향기.’
오직 소년에게만 향긋하게 느껴지는 공포와 죽음의 냄새가 벌써부터 계단에 자욱했다. 낮 동안 음식점에서 먹었던 산해진미들의 맛과 향을 단번에 덮어서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의 진한 향이었다.
과연 저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기대가 소년의 검은 눈에 가득해졌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빈민가와 갑판의 전장보다도 짙은 걸까?
정상적인 양조장이라면 한창 숙성되고 있는 포도주통이 있어야 할 지하보관소로 내려가자, 소년은 그곳이 다른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벽에 군데군데 걸린 횃불에서 올라오는 그을음 아래, 금화가 짤랑이고 은밀하고 불법적인 대화가 수도 없이 오가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더 깊게 땅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흙빛의 벽 위로 수많은 그림자가 춤을 추며 낄낄거렸다.
누군가의 삶이 사고 팔리고, 떳떳하지 못한 주머니가 거래되는 어두운 곳.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몰리며 생긴 린던의 빈민가와는 차원이 다른 음습하고 거대한 늪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추악한 인간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며 한 번 잘못 발을 디디면 빠져나오기 요원한 질척이는 사회적 늪지.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고 새로 유입되는 문명 속 야생.
바로 뒷세계의 암시장이었다.
***
흙과 돌, 나무기둥 등으로 이뤄진 벽은 횃불이 걸린 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지하공간은 다른 곳까지 거미줄처럼 퍼진, 일종의 지하도시였다.
향락과 사치가 가득한 지상과 대비되는, 고통과 음습함이 가득한 지하.
지하창고는 단지 그 거대한 암굴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했다.
족쇄와 수갑으로 손목이 묶인 이들이 흙을 파내 쇠창살만 박아 만든 간단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는 절망의 냄새가 자욱하게 풍겨왔다.
몸을 가리는 옷을 입고 나다니는 몇몇 사람에게는 아주 짙은 죽음의 향이 풍겼다. 곧 죽을 이라서가 아니라, 하도 많이 죽이고 다녀서 남의 죽음의 향이 몸에 밴 것이었다.
지하라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부정적인 감정의 냄새 말고도 온갖 냄새가 소년의 코를 찔렀다.
습한 흙내, 암시장 노점상들의 음식 냄새, 벽에 걸린 횃불의 그을음, 보풀 가득한 옷을 입은 이들의 먼지 냄새......
귀 역시 어지러웠다.
허름한 갑옷을 입은 방랑기사나 용병 등이 고용을 원한다는 팻말을 들고 병장기를 절그럭거리며 어슬렁거렸다. 이따금씩 흥정과 말싸움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노예의 비명이 음식점에서 문을 열리는 걸 알리는 조그만 종소리처럼 얇게 들려왔다.
그런 혼란한 불법적인 시장거리를 많은 이들이 활보했다. 대놓고 고급스런 의복을 걸치고 호위병을 대동한 이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상인이고 손님이고 할 것 없이 로브 같이 몸을 가리는 옷을 입고 다니고 있었다.
‘흐으음.’
소년이 깊이 심호흡을 했다. 땅 밑의 습기 찬 흙냄새보다 더 짙은 공포와 죽음의 냄새가 소년의 코 점막을 간질였다. 소년에겐 여기는 향기로운 꽃밭 한가운데나 마찬가지였다.
소년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저마다의 용무로 북적이는 암시장 거리를 훑었다. 소년의 시야에 있는 이들이 모두 이유 모를 오한을 느끼며 흠칫 놀라거나 부르르 떨어야 했다.
“재밌는 곳이네.”
-여기가 암시장입니다.
사람이 몰려 가까이 스쳐 지나가는 탓에 브란트의 목소리는 조그마해져야 했다. 귀족이 시종에게 존대를 하는 걸 들켜서는 안 되었으니.
-노예나 장물이 오가는 건 물론이고 암살의뢰까지 오가기도 합니다. 마법사나 귀족들도 암암리에 사용하는 곳이라 알면서도 잡지 않습니다. 에크나르프의 수도 파리에도 이런 곳이 있지요. 대도시라면 다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규모가 크네. 언제 다 이걸 지은 거래?”
-고대의 ‘위대한 제국’ 시절, 모두가 믿는 카톨릭은 한때 박해받았습니다. 그 때 카톨릭 신자들이 몰래 지하로 숨어들어 예배당이나 무덤을 만들면서 점차 확장한 것을, 시대가 지나 이들이 차지한 것이죠.
“그렇구나. 사람이 정말 많네.”
-불법적인 일을 하는 이들은 모두 여기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개중에는 여러 지역을 아우르는 범죄조직도 있는데, 그걸 파밀(famille, 가족)이라 합니다.
린던의 빈민가에도 범죄조직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양아치 무리를 그러모은 단순 깡패집단이었다면, 파밀은 준군사조직에 가까운 거대 집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린던의 빈민가는 사회 조직의 변화로 농민들이 수도로 모여들며 급조된 것이지만, 에크나르프의 뒷세계 암시장은 역사가 깊다. 그러니 린던 빈민가 따위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의 세력이 크고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개중엔 용병이나 방랑기사 등을 거느린 파밀도 있단다. 일부는 귀족의 뒷배가 있어 귀족의 음지쪽 세력을 대행하기도 한다고.
-저희는 장물을 거래하는 파밀과 접선할 겁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물건을 대량으로 사줄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