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태동하는 재앙-14
머스킷 내부에서 터지는 폭약 소리는 작은 섬의 중앙 언덕 너머 남쪽의 마을에 닿기에는 충분히 컸다.
“무슨 일이지?”
섬 남쪽의 어촌, 올드 타운(Old town)이 멀리서 들려오는 조그만 천둥소리에 불이 켜지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선박에 남아있던 수병들 역시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총소리잖아?”
“오발 사고 아니야?”
“그렇다기엔 몇 번이고......”
이내 총소리가 멎었다.
“혹시 사격훈련?”
“그럴 리가 없잖아. 이 야밤에 웬 훈련?”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수병들이 이 섬에 타고 온 선박은 군용 함선이 아니라 해군 측에서 뱃삯을 지불한 민간 선박이었다. 이는 곧 수병 말고도 선원들이 같이 타고 있단 얘기이며, 수병들은 그들을 믿지 못했다.
선원들은 수병들의 물건을 호시탐탐 노리곤 했다. 선상 생활이 고되다한들 수병들은 엄연히 나라에서 어느 정도의(쥐꼬리만하지만)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선원들의 물건보다는 좋은 군용 물품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그런 개인사정과 총소리의 경중을 놓고 비교한다는 것은, 이 실리 제도가 얼마나 평화에 찌들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확인하러 가야되지 않나?”
수병들의 눈길이 이 배에 남은 가장 높은 직급의 장교에게 쏠렸다.
“하. 열 명만 나와.”
졸지에 야밤 행군을 하게 된 병사들이 계급이 낮은 순서대로 피곤에 구겨진 얼굴로 배에서 내려왔다. 주섬주섬 짙은 청색의 외투를 주워드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뭐 별 거 아니겠지 하는 감정이 짙게 묻어나왔다.
보나마나 사이 나쁜 녀석들끼리 눈 돌아가서 쐈거나 오발사고일 것이다. 아니면 난데없이 한밤중에 사격훈련이라도 했겠지. 장교들은 병사들이 노는 꼴을 못 보니 가끔 엉뚱한 일을 시키기도 하니까.
총소리를 들었음에도 그들의 눈에는 긴장은커녕 피로감만 가득했다.
상황을 확인하러 출발하는 일단의 무리를 한 쌍의 검푸른 눈빛이 바닷가 바위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
요새로 향하는 길목.
무거운 발걸음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는 와중, 열한 명의 수병은 마주 내려오는 횃불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엇, 제임스 대위님!”
맨 앞에서 횃불을 든 낯선 푸른 외투의 중년 사내 뒤 그림자가 진 곳에서 제임스 대위의 얼굴이 보였다.
“아. 튜터 소위. 마침 잘 왔군. 나도 그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총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일입니까?”
“아 그거 말인가? 손님이 찾아왔는데 소소한 장난을 좀 쳤어.”
“총을 쏘는 게 장난이라니요?”
제임스는 대답 대신 뒤로 손짓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무장한 두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이 분들이 기사가 총알을 정말 피할 수 있다고 자랑하기에 시연을 해달라 했거든. 그래서 들린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아 예. 알겠습......”
튜터 소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려다가 멈추었다. 소위가 제임스 대위를 다시 바라보았다.
“왜?”
대위는 여전히 횃불을 든 이의 뒤쪽에 있었다. 그림자가 진 곳에서 머리만 내민 채.
“대위님. 왜 그렇게 계십니까?”
“뭐가?”
“죄송하지만, 앞으로 나와주시겠습니까?”
험한 뱃사람들을 휘어잡기 위해, 배의 선장이나 장교 등은 항상 당당하고 위압적이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때문에 그런 교육을 받은 장교들, 특히 배 하나를 이끌고 있는 직위를 맡고 있는 이들은 교육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지 않는 편이었다.
제임스 대위 역시 이 섬의 수병들을 통솔하는 이라 이렇게 다른 이의 뒤에 몸을 숨기지 않는 이였다.
소위의 손이 허리의 머스킷 권총으로 향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횃불을 들고 있던 홉킨스 선장의 손이 쉬리릭 움직였다. 동시에 뒤에 있던 두 기사가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뽑았다.
스릉하는 쇳소리와 뒤이은 살 베는 소리는 콰앙하는 화약 폭발음에 묻혔다.
선장의 권총알은 튜터 소위에게, 두 기사의 칼날은 각각 두 명의 수병을 찌르고 베었다. 나머지 수병들이 기겁하여 급히 머스킷을 더듬거렸다.
“으, 으아!”
“쏴!”
하지만 수병들은 코앞의 기사들에게 무력했다.
행군 때문에 머스킷을 등 쪽에 매고 있던 데다 그들의 반응속도는 기사에 비하면 너무나 느렸다.
비명과 살을 베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언덕은 다시 한밤중의 조용한 섬의 일부로 돌아갔다.
“쯧. 자네같이 눈치 빠른 장교는 싫어.”
홉킨스 선장의 그림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제임스 대위의 목 아래는 핏물이 흥건해 푸른 외투는 검게 물들었고 그 밑의 흰 셔츠는 새빨같게 염색되어 있었다. 그걸 보이지 않으려 홉킨스의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눈치 빠른 장교 친구는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거야.”
모두의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뭔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일어나라]
그 말과 함께 소년이 무언가를 놓는 듯 주먹을 폈다. 스산한 바람이 스치며, 쓰러졌던 수병들이 꿈틀거리며 슥 몸을 일으켰다. 목이 떨어진 이는 스스로 목을 주워 자신의 몸에 붙였다.
“다시 뵙습니다, 대위님.”
되살아난 튜터 소위가 그렇게 말하며 척하고 경례를 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총알을 맞은 가슴팍이 붉게 물들어 가는 소위가 꾸벅 목례했다.
***
활짝 핀 거대한 돛에 어울리는 거대한 선박들의 행렬은 가히 거인이 행군하는 것처럼 당당하고 위압적이었다. 고작 네 척인데도 그 덩치와 흉험함은 바다를 제패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항구에 도착한 70문이 넘는 대포를 지닌 니아트리브의 3급 전열함 네 척이 돛을 접으며 닻을 내렸다.
땅에 발을 디딘 엘리자 스펠위버는 눈살을 찌푸렸다. 코를 찌르는 탄내가 미간을 절로 좁아지게 만들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광경은 불탄 폐허였다.
하얗게 변해 부러진 기둥, 불타다 무너져 형체만 간신히 유지한 지붕의 잔해, 까맣게 그슬린 어구. 화마가 휩쓸고 간 어촌은 무심한 파도소리와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죽어 있었다.
“여기가 올드 타운인가?”
“예. 그리고 제보에 따르면 조금 더 올라간 곳에 리틀 포쓰라는 마을 역시 불탔다고 합니다.”
엘리자가 장교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있었지?”
“예. 제일 큰 이 섬 말고도 주변의 크고 작은 섬 대부분이 약탈당했다고 합니다.”
“약탈이라......”
엘리자가 수하들을 이끌고 불탄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탄 지 오래되어 연기도 더 이상 나지 않고 열기조차도 모조리 사라져 차가워진 잿더미 곳곳을 뒤적거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한참을 훑은 엘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들. 이 마을을 쭉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나?”
병사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았지만 그들보다 영민한 마법사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보고받은 대로 시체가 없다.’
아이와 여성들의 시체는 있었지만 어른 남성의 시체만 전혀 없었다. 마치 실리 제도가 여인과 아이들만 사는 섬이었던 것처럼.
평범해 보이는 약탈 현장에 제독에 대마법사 씩이나 되는 엘리자가 직접 온 것은 이런 기이한 점 때문이었다.
“린던의 그놈이다.”
“사, 불법 마법사 말입니까?”
마법사가 사령술사라고 답하려다가 아차하고 말을 바꾸었다. 시체를 일으키는 실전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가 있다고 소문이 퍼지면 사기에 좋지 않을 게 뻔하니까.
엘리자는 자신과 가까이 있는 마법사들에게만 들리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해적이 시체 하나하나를 바다에 빠뜨려주겠나? 분명 되살린 거겠지.
마법사들이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보고서에 의하면 철저히 쓸어갔다고 했지. 어떻게 그랬겠나?
제독이 된 엘리자의 곁을 부관 형식으로 따라다니던 마법사들 역시 그녀가 보고받은 모든 정보를 같이 공유했기에 ,그들 역시 실리 제도 조사 보고서를 알고 있었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지하창고건 뭐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모두 불태웠다.>
잠시 조용하던 마법사들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설마, 시체로......
귀중품의 위치는 숨긴 당사자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다. 엘리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걸까요? 놈은, 그, 그거잖아요. 무덤에만 가도 인력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데 왜 약탈을......?”
“당연한 거 아니겠나? 돈이지. 놈은 돈을 모으려 하고 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악착같이.
엘리자는 이 마을에서 금속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자고로 바닷가 마을이라고 하면 어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어구나 선박을 관리하고 수리하기 위한 공구들이 다수 필요하다.
하지만 마을 전체가 불탔는데도 그런 금속들이 녹아내린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불타 무너진 건물 잔해에 묻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장간 특유의 화로 구조물이 남아 있는 건물의 잔해를 뒤적거렸는데도 금속은 부스러기조차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겨우 벌어먹고 사는 이들에게 금붙이나 보석이 있을 리는 없으니 그나마 돈이 되는 금속을 싹 쓸어간 것이다.
일반적인 도적들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 이유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령술사는 시간은 들지언정 노력은 많이 필요하지 않다. 죽인 이를 시키면 되니까.
“놈은 우리 생각보다 이미 세력을 많이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
배 한 척 만으로는 그 많은 시체들과 어촌 여러 개에서 뜯어낸 각종 물자와 금속들을 싣기엔 부족했을 것이다.
아니지. 이젠 그 이상이겠군.
실리 섬에 수병 수송용으로 민간 카락 한 척이 있었다니까.
“어쩌면 배가 두 척보다 많을 수도 있을 거야. 여기 지어질 예정이던 요새의 대포도 모조리 가져갔다잖나.”
“그렇다면 대포 무게를 따지면 최소한 배 서너 척은 가지고 있단 얘기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가 놈을 본 적 없으니 확신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찾아야 될 곳은 대충 알겠어.”
“어디 말입니까?”
나포한 선박을 검증 없이 쉽게 팔 수 있는 곳. 물건의 출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들이는 암거래상들이 득실거리는 곳.
“아소르스 제도겠지.”
해적들이 들끓는 대서양 초입의 마굴.
놈은 약탈한 것들을 팔기 위해 그곳으로 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 외에 다른 암시장이 있는 곳을 모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