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28화 (29/128)

28화

태동하는 재앙-13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싼 소년이 바윗돌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횃불과 모닥불로 환한 주둔지가 보였다. 넓은 군사용 천막들이 높은 그림자를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마법을 걸어 이들을 바깥과 차단하고 절벽에서 올라온 선원들로 초병들을 기습해 대포만 빼가면 되는데, 뭔가 이상했다.

킁킁

‘왜 이렇게 향긋하지?’

여러 사람이 죽은 것 같은 향기가 소년의 코를 간질였다. 지금 니아트리브 수병들이 딱히 공포를 느끼는 것도 아니고 죽은 이도 없는데 왜 벌써부터 향기가 풍겨오고 있는 걸까.

좋은 외눈으로 주둔지를 살폈으나 누군가 구타당한다거나 죽어간다거나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았다. 이 향이 사람에게서 근원한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소년이 홉킨스 선장에게 생각을 전달했다.

[선장, 여기서 죽음의 냄새가 짙어. 무슨 일 있었나 물어봐.]

소년의 지령을 받은 선장이 마저 잔을 비웠다. 술 냄새가 슬슬 올라왔지만 죽은 몸이라 그런지 취하는 느낌은 없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니아트리브 해군에는 차에 럼 등의 독한 술을 타 몸을 데우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장교 천막 내부의 분위기는 벌써부터 술기운에 무르익고 있었다.

적적했던 차에 선장과 얘기를 하면서 기분이 좋아져 얼굴이 풀린 제임스 대위를 비롯한 하급 장교들이 사람이 더해져 흥미진진해진 포커판 앞에서 경계심을 푼 채 낄낄댔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이 섬을 들른 지 4년이 되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요새가 세워지고 있는 겁니까? 그다지 요충지도 아니고 외딴 곳인데.”

질문을 슬쩍 흘리는 홉킨스. 술기운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장교들이 카드를 내밀면서 한 마디씩 말했다.

“아, 듣기로는 해적 놈들이 여기 몰래 숨어들었답니다.”

“그래서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새로 마을도 세우고 해적 막으려고 요새도 세우는 거라 들었지요.”

“내가 들은 건 좀 다르긴 한데, 요즘 해적이 많이 돌아다닌대서. 어쨌거나 과정은 비슷합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같은 나라 장교라는 신분 때문인지 장교들은 경계라곤 한 치도 하지 않으며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홉킨스는 하급 장교들의 서로 다른 말에, 정확히 얘기해줄 수 있겠냐는 의도를 담아 장교들의 상급자인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씩 웃더니만 홉킨스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해적이 아니라 섬놈들입니다.

섬놈들.

섬나라인 니아트리브가 섬놈이라고 낮잡아 부르는 곳은 딱 하나였다.

니아트리브 옆에 붙은 큰 섬. 아이리시.

-여기에 놈들이 마을을 꾸렸더군요. 주제에 건방지게 감히 니아트리브 땅에서...... 그래서 싹 쓸어버렸다고 합니다. 4년 동안 안 들렀으면 몰랐을 수도 있지요. 작년 겨울에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까요. 개월로 따지면 얼마 안 되었네요.

-아, 그래서 요새를......?

-그렇지요. 어딜 감히 천박한 섬놈들이. 뭐 요즘 해적들도 얼쩡거린다니까 그런 이유도 있고요. 듣자하니 요즘은 신대륙에서 온 요상한 식물을 먹고 있다더군요. 니아트리브에선 가축 사료로나 쓰는 걸 말입니다.

죽인 이들을 어디에 파묻었는가, 라는 질문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대한 원한과 죽음의 향기가 여기서 풍기고 있으니 대답은 뻔했다.

이들은 아이리시 인들의 무덤 위에 그들을 죽인 해군의 요새를 건설하고 있던 것이다.

-아, 그렇군요. 잘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홉킨스의 표정은 억지로 웃는 모양새였다. 상대방은 술에 취해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홉킨스가 딱히 인본주의자라거나 지역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역시 아이리시 놈들을 니아트리브 인보다는 아래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한 처사였다. 단지 살 곳을 찾아 진출한 것뿐인데 그 대가가 죽음이라니.

그에게 니아트리브는 바다를 주름잡을 위대한 국가였다. 하지만 이게 뭔가. 타국인도 아니고 지배한 지 수백 년이나 되어 자국인이나 다름없는 이들에게 학살을 해?

평생을 나라를 위해 군인으로 살았지만, 지금 와서는 실망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충성을 바친 대상이 자신이 생각하던 자랑스러운 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탈을 쓴 괴물인 것만 같았다.

좋은 청력으로 둘의 대화를 들은 두 기사도 투구 아래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되었건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였으니.

천막 밖의 소년이 이 가득한 향취의 이유를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맡아보니 짙은 죽음의 향기 사이로 진득하고 톡 쏘는 냄새가 느껴졌다.

원한의 냄새였다.

원한은 빈민가에서도 맡아 보았지만 이건 그 농도가 차원이 달랐다.

한둘도 아니고 족히 수백 명에 달하는 원한. 불시에 기습을 당해 여기까지 몰려 떼죽음을 당한 이들의 진한 한이 땅 밑에서 흙을 뚫고 공기 중으로 퍼지고 있었다. 죽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는 죽음의 냄새를, 원한이란 것이 몇 개월 동안이나 잡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 그 흙 밑에 집중하자, 소년의 머릿속 어둠을 뚫고 나온 지식이 뇌리에 안착했다.

‘영혼이 없어도...... 사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이 진한 원한을 영혼 대신 이용한다면 말이야, 라고 무언가가 속삭였다. 아니 속삭이는 듯했다. 누군가 귓가에 소곤거리는 것 같은 지식과 더불어 그걸 이용해서 니아트리브 수병과 실리 제도의 영혼들을 갈취하자! 하고 무언가가 속에서 꼬드겼다.

억울함,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일정 수준 이상 품고 죽어 원한이 남은 시체를, 영혼을 대신해 원한으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소년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소년은 문득 시선이 느껴져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반짝이는 빛이 더 매서워져 있었다. 만약 그러면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호통을 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속으로 별을 비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별에게 조그맣게 선언했다.

-하늘에 붙박여 반짝이기만 하는 불빛 주제에. 애초에 나를 세상에 내놓지 말았어야지.

대답이 전달되기라도 한 걸까. 바람이 불며 소년의 시야에 보이는 밤하늘 전체가 수다를 떨듯이 소란스러워진 것만 같았다.

소년은 그 자신조차도 원리를 정확히 모르는 힘을 뽑아냈다. 그 힘은 목소리라는 전달매체를 통해 공기 중으로 녹아들어갔다. 힘의 움직임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별들이 항의하듯 더욱 세차게 반짝였다.

[원한 품은 이들아. 복수를 할 때가 왔다.]

알 수 없는 지식의 인도에 따라 소년이 중얼거리자 공기가 한층 싸늘해지며 주변 풀잎에 이슬이 맺혔다. 수병들이 피우고 있는 모닥불과 횃불의 밝기가 조금 줄어들었다. 열기가 줄어들며 수병들이 팔을 슬슬 쓸더니 오늘 바닷바람은 유난히 춥다며 투덜거렸다.

무언가가 알려준 대로, 땅 속의 시체들에 깃든 검보라색 사념이 시체 안에서 뭉쳤다. 이는 소년이 거의 다 먹어치워 조각만이 남은 영혼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원통함에 눈을 뜬 시체들이 눈을 썩은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 썩어버린 눈알에 원념이 깃들며 몸 안에 들어찬 시체 파먹는 벌레들이 우수수 죽어나갔다.

복수! 복수! 복수! 복수!

왜죽였어제발이아이만은악독한니아트리브놈들죽기싫어제발아파먹고사는것도죄냐우리도니아트리브사람인데아파증오한다저주한다천벌을받을것이야엄마살려줘우리도사람이야나쁜놈들곱게죽지못할것이야살려줘신이시여엄마우리가뭘했다고우리도힘만있었더라면그저뱃일을하러온것뿐인데아파증오한다복수해버리겠다죽여버리겠다복수하겠다찢어죽일것이야엄마살려줘죽일거야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아이리시 인들이 죽기 전에 남긴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땅에서부터 지하수가 올라오듯 분출되었다.

소년이 감탄을 흘렸다.

빈민가에서 누군가 죽을 때 꽥꽥대는 저주스런 말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명 하나하나가 선율을 이루어 소년에게는 한 폭의 연주처럼 들려왔다. 연주회는커녕 제대로 된 악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영혼이나 냄새보단 못하네.’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여 시끄러웠고 난잡했다. 지직거리는 불쾌한 잡음까지 섞여 생전 처음 악기를 잡는 이들이 끽끽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처럼 마냥 듣기 좋지만은 않았다. 사념이란 것은 어지간하면 개인보단 집단의 원한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니만큼 정갈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수백의 시체들을 깨운 소년은 어찌된 일인지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내면의 속삭임이 뭐하냐고 독촉했고 장교 천막 안의 하수인들이 조그맣게 어떻게 하냐고 속삭였지만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땅 밑에서 위로 나가고 싶다며 발버둥치는 시체들이 한가득인데도 소년은 커다란 짐승을 앞에 둔 채 숨어있는 사냥꾼처럼, 무언가를 면밀히 계산하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소년의 고민은 하나였다.

‘이것들을 일으켜서 병사들을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최대한 흔적을 숨기려 노력하겠지만 니아트리브의 마법사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것이다. 소년은 선원을 얻으러 왔고, 따라서 시체들이 사라질 것은 자명한 일. 호기심과 지식욕이 왕성한 마법사들은 이 일에 개입하여 빈민가의 사령술사가 실리 제도에 왔었다는 결과를 도출해 낼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일을 저지른 소년에게 반드시 추적이 붙을 것은 누구라도 생각해 낼 수 있는 결과이다.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흔적을 최대한 지워 상대방이 소년을 쫓아올 가능성을 지연시킬 수 있는가?

빈민가에서 겪었던 마법사들이 대거 몰려온다면 그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있는가?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과연 자신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능력이 충분한가?

스스로의 역량에 대한 의문이 소년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고민은 꽤 길었다.

일을 벌임으로써 일어날 여파는 소년의 기준에서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갓 세상에 나온 터라 그렇게 많은 걸 알지는 못하지만, 잘못을 하면 누군가 쫓아온다는 간단한 공식은 빈민가에서 일찍이 배웠다.

그렇게 한참. 소년의 눈이 한밤중의 숲 속 같은 어둠을 머금었다. 별빛 한 점 없는 칠흑같이 검고 음침한 동기가 소년의 마음 속 톱니바퀴를 힘차게 돌렸다.

톱니바퀴가 꽉 맞물려 돌아가며 그 사이에 껴든 자신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분쇄했다.

그 둘이 부서지자, 확신과 자신감이 대신 빈 곳을 채웠다.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그리고 복수를 행하라]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죽은 이들에게만 들리는 섬뜩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흙으로 스며들었다. 별빛이 탄식하는 하늘 아래, 썩은 손길이 잘 다져진 흙을 파내고 지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장교 천막의 하수인들에게 생각을 전했다.

[얘들아. 잠입은 됐다. 그냥 없애자고.]

소년은 계획을 바꾸었다. 홉킨스 선장과 두 기사의 나름 잘 짜여진 작전이었지만 시체가 새로이 생겨난 이상, 더 이상 은밀함을 유지할 필요는 사라졌다. 아이리시 인들의 시체는 약 이백여 구. 선원이 두 배 가량이 되었으니 이 숫자라면 도망치는 이 없이 완벽하게 마을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도둑질 준비하던 애들도 올라와라.]

소년의 명령에 절벽 끝에서 검푸른 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나 싶더니, 이내 쉭쉭거리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보초병들이 화살에 꿰뚫려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보초병들이 일순간에 처리되자 안광들이 우르르 위로 올라왔다. 고함 없이 숨죽인 발소리만이 조용한 밤중에 울려 퍼졌다. 얼마 뒤 포가에 거치된 대포들이 하나둘씩 절벽 아래 깊은 바닷속으로 던져졌다.

장교 천막 안에서도 칼 뽑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안에 있던 다섯의 장교는 모조리 죽음을 맞이했다. 바로 옆에 붙은 무방비하며 술에 취하기까지 한 이들을, 기사는 얼마든지 소리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죽음은 주둔지의 수병들에게도 닥쳐왔다.

“음? 뭐야 이거?”

땅이 들썩이는 걸 보고 수병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더지인가?”

하지만 땅 속에서 솟아오른 건 두더지보다 훨씬 크고 무서운 것들이었다.

“으, 으아악!”

“손이잖아?”

“이게 뭐야!”

살아있는 시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흙을 헤치며 수병 주둔지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 썩어 백골을 내보이며 살점이 덜렁거리는 아이리시 인들이 수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총검에 몸이 꿰뚫려도 상관없이 억센 손으로 목을 졸랐다.

키에에에

크으어어어

마치 복수하겠다! 라고 외치는 것처럼 시체들의 썩은 성대에서 나는 기괴한 소리들이 주둔지 위를 가득 채웠다. 모닥불이 경악한 수병들과 시체들에게 밟혀 사방으로 불똥을 튀겼다. 횃대가 쓰러지며 천막 하나에 불이 붙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비명에 수병들이 급히 일어나 천막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왔지만 그들은 이미 독안에 든 쥐 신세였다. 그들 발밑에 잠들어 있던 원통한 시체들은 그들보다 훨씬 많았다.

“쏴! 쏘라고!”

“살려줘!”

“으아아아!”

거친 머스킷 발사 소리와 살을 베어내는 날붙이의 소리는 산 자의 비명과 죽은 자의 괴성에 덮여 점차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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