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자촌의 유령선장-27화 (28/128)

27화

태동하는 재앙-12

니아트리브의 남서쪽 끝에는 실리(Scilly)라 이름 붙여진 작은 군도가 있었다.

니아트리브와 25마일(약 4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 작은 섬의 무리는 니아트리브 근해를 오가는 배들에게 있어서 나름의 조그만 쉼터 역할을 했다.

어느 날 저녁, 배 두 척이 당도하기 전까진.

***

드드득거리는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로에 찌들은 두 배가 닻을 내렸다.

외딴 곳이라 한들 이곳은 엄연히 니아트리브의 영토이기에 항구라면 다 있는 항구 관리자가 존재한다. 이곳에서 태어나 관리자 역할을 물려받은 이가 배가 정박했다는 말이 들리자 낯선 배의 국적을 확인하러 터덜터덜 나왔다.

니아트리브 국기가 걸린 카락...... 인가? 체구가 큰데. 하여튼 개조된 걸로 보이는 배 한 척. 그리고 에크나르프의 향취가 진하게 풍기는 장식이 달린 갤리온 한 척. 에크나르프 국기가 없으니, 니아트리브 배에게 나포된 것이리라.

덜컹거리는 널빤지 내리는 소리와 절그럭거리는 쇳소리.

배와 지상을 잇는 두툼하고 넓은 널빤지에서 내려오는 이들 중에는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기사가 있었다.

배를 타는 기사라는 흔치 않은 광경에 항구 관리자가 놀란 눈으로 두 기사 앞의 선장이라 추측되는 이를 바라보았다. 푸른 외투라. 요즘 유행하는 장교 출신 사략선 선장인가?

“안녕하십니까, 선장님. 혹시 사략 허가를 받은 사략선입니까?”

“그렇소만.”

“그렇다면 니아트리브 법에 따라 항해일지를 제출해주십시오.”

니아트리브는 이처럼 배의 항해정보를 받아 여러 곳의 정보를 알아내곤 했다. 현재는 사략선 정도만 해당되었지만 예전엔 일반 어선은 물론이고 타국 국적 배라면 몰래 일지를 훔치기까지 해 한때 니아트리브의 항구는 정박하지 말라는 말이 타국 뱃사람 사이에 돌기도 했다.

-이는 여러 배에게서 정보를 모으는 수단입니다. 니아트리브가 해상강국이 된 배경에는 이 같은 수단도 있지요.

홉킨스 선장이 입과 턱을 손으로 감싸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예? 뭐라고 하셨는지요?”

“아무것도 아니오. 일단 여독도 풀고 묵을 곳을 찾아야 하니 시간 날 때 알아서 제출하겠소.”

“아, 예......”

장교 특유의 고압적인 태도에 항구 관리자는 아무 말 못하고 물러서야 했다.

-이는 좋은 방식입니다. 정보가 많으면 어떤 상황이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늘어나는 셈이니까요. 정보 수집에 게을리하지 않아야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겁니다.

홉킨스 선장은 계속 중얼거리면서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두 기사는 그 뒤를 따라다니는 들러리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흠. 바다에서 우리는 그렇게 쓸모는 없군. 왠지 슬픈걸.”

“헤헤 선배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섬과 바다 말고 다른 곳에선 저희의 지식이 충분히 주인님께 도움될 겁니다. 귀족을 상대한다던가 하는 예법은 우리가 이 뱃놈보다는 더 잘 알잖아요?”

니아트리브의 해군 장교로서 하급 귀족 칭호를 얻었다지만 홉킨스 선장은 말만 귀족이지 니아트리브의 귀족 명단에도 들지 못하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귀족이라 불리는 이유는 거친 선원들을 통제하기 위해선 쥐꼬리만 할지라도 권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니아트리브 해군의 요식행위 때문이었다.

이름만 귀족인 홉킨스 선장보다는 실제로 귀족인 이 두 기사가 상류층에 관한 지식은 더 잘 알고 있었다.

“다 들린다 에크나르프 촌놈아.”

“헹 들으라고 한 말이다 비열한 니아트리브 생선아.”

투닥거리긴 했지만 말에 적의는 없었다.

***

셋은 숙소를 찾는단 핑계로 한동안 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정찰했다. 항구 관리자의 집 위치, 여관의 위치, 선박 수리소의 위치, 인구 밀집 지역, 해안가에 숨을 곳이 있는지 등등. 그러면서 홉킨스 선장은 소년에게 빈민가 밖의 세상을 부지런히 설명해 주었다.

두 기사는 니아트리브의 영토고 섬이라 아는 게 없는 대신,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람이 숨을 만한 경로나 장소를 집중적으로 훑어보았다. 그건 유사시 빠져나갈 구멍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배가 정박한 섬 서쪽의 리틀 포쓰(Little porth)라 불리는 조그만 마을을 조사하고 해안가를 따라 남서쪽으로 온 셋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돌덩이들이 쌓인 곳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성벽을 쌓을 법한 돌덩인데.”

적이 많아 성을 쌓을 일이 많았던 에크나르프에서 자주 본 적 있는 돌들을 보곤 브란트가 의문을 가졌다. 돌들은 네모나게 가공되어 있었다. 주변에 기름먹인 천과 나무기둥, 각종 공구 등이 나뒹구는 것으로 볼 때, 무언가 공사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언덕을 넘어 해안가를 좀 더 따라가자, 명백히 성벽이라 불릴 만한 구조물들이 띄엄띄엄 지어진 것이 보였다. 군데군데 대포를 설치할 바닥이 조성된 곳으로 보아 이는 요새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요새라...... 이곳에 대포가 있을 겁니다.”

홉킨스 선장이 턱수염을 문질거리며 말했다.

니아트리브는 요새를 지을 때, 특히 해안 방어용 요새는 대포가 설치될 공간을 먼저 잡는다. 대포를 설치하여 포각을 미리 정해둔 뒤 본격적으로 다른 구조물들을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절벽이 천연 성벽 역할을 해서 벽 자체는 높이 쌓지 않았네요. 아니면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던가. 저기 포가를 둘 돌바닥을 미리 깔아둔 게 보이시지요. 그 앞에는 벽돌을 딱 한 줄만 표석처럼 깔아뒀고요. 그리고 저 멀리, 대포로 보이는 게 어렴풋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길 습격해서 질 좋은 니아트리브 함포를 약탈하는 것도 좋겠군!”

브란트가 기회 하나 잘 잡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정작 홉킨스 선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문제가 있습니다.”

니아트리브 해군은 요새가 지어질 곳에는 당연하게도 대포를 지키기 위해 미리 군대 약간을 주둔시킨다.

소년이 물었다.

[많아?]

머릿속으로 은은히 울리는 목소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홉킨스가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요새의 규모에 따라 다릅니다만, 벽 길이를 보니 큰 요새는 아니라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새야 얼마든지 벽을 더 쌓아 확장할 수도 있는 거라서 기초공사도 되지 않은 걸로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제 생각엔 문제없을 거 같은데요?”

오르네리가 손을 들었다.

“다 죽이고 아군으로 만들면 되죠! 군대가 있으면 그걸 싣고 온 배가 있을 테고, 그러면 배도 먹고 함포도 먹고! 좋잖아요?”

브란트가 고개를 저었다.

“오르네리. 한 번만 더 생각해 보게나. 우리가 도착한 마을에 군함이 있었나?”

“어. 없었죠?”

“그래. 가버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섬의 다른 마을에 있을 수도 있지. 이 섬은 적당히 큰 섬 같던데, 마을 한두 개가 더 있기엔 충분해. 우리의 전력으로는 저 조그만 마을 하나라면 모를까, 마을 두 개를 모두 습격해 묻어버리기에는 역부족이야. 싸움이 일어나면 필히 다른 마을이 소리나 불길을 듣고 알아챌 테고, 배를 타고 탈출할 이가 생기겠지. 선원 수가 지금의 두 배쯤 된다면야 괜찮겠지만.”

그들의 힘은 아직 부족했다. 잘못 건드렸다가 니아트리브의 전열함이 그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걸 원치는 않았다.

더구나 니아트리브의 수도 린던의 한복판에서 소년이 난리를 친 전적도 있으니 수상쩍은 사건이 생기면 니아트리브의 해군이 득달같이 달려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소년에게는 은밀함이 최우선이었다.

“그러면 결국 도둑질만 해야 되겠네요.”

오르네리가 김샜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래. 보초 몇 죽고 함포만 사라진 정도면 니아트리브 해군이 눈에 불을 켜고 쫓으려 하진 않을 거다. 목격자도 없으면 우리를 특정하지도 못하고 어디 간 큰 해적들의 소행으로 여기겠지. 재빨리 도망가면 문제없을 거야.”

“원래는 마을만 하나 습격해 아군만 늘릴 예정이었는데, 의외로 상황이 커졌군.”

홉킨스 선장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 실리 제도로 이끈 장본인이 바로 홉킨스 선장이었다. 차후를 위해 선원을 늘려야 할 필요성이 있어 외딴 이곳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홉킨스 선장이 이곳을 들린 건 무려 4년 전. 사략 사업을 하기도 전이며 그때는 리틀 포쓰 어촌 하나만 있던 때였다.

사람만 다수 동원된다면 마을이나 요새가 더 생기는 건 순식간이다. 실제로 선원으로 정찰한 바에 의하면 야트막한 언덕 너머 섬 남쪽에는 항구마을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럼 그렇게 시행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아직 많이 경험이 부족한 소년은 스승 같은 이 부하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그날 밤.

적의 품은 별빛이 반짝이며 초승달 주변을 호위하는 밤하늘 아래, 요새 공사가 멈춘 채 고요함만을 유지하고 있는 바닷가 절벽이 있었다.

절벽 저 밑에서 돌에 부딪혀 어둡게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아래로 검푸른 빛들이 다닥다닥 떠올랐다. 밤에 자극이 있으면 빛을 내는 조그만 바다생물의 군집에 의해 생겨나는 빛이 아니었다. 한 쌍이 서로 몰려다니며 이리저리 살피는 수상한 빛무리는 서서히 절벽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거친 일로 굳은살 가득한 손들이 수면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익사한 것처럼 창백한 손들이 거친 절벽을 붙잡고 그 밑의 몸뚱이를 끌어올렸다.

검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선원들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소금물을 뚝뚝 흘리며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1야드도 오르기 힘들 거친 바위 절벽이었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친 기색도 없이 절벽을 올랐다.

한편, 요새가 건설되고 있는 뒤편으로 돌아간 선장과 두 기사는 요새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을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니아트리브는 천막 하나당 수용량이 얼마 정도 하지?

-열쯤. 좀 우겨 넣으면 열두셋까지는 돼. 밖에 있는 것들이 계속 움직여서 몇 명인지를 모르겠는데. 이봐 기사, 얼마인지 알겠나?

-천막 안에 몇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와 있는 인원은 대략...... 서른쯤 되네.

-잘 세는 걸?

-기사의 훈련에는 적의 수를 단번에 파악하는 게 포함되어 있거든.

-어쨌건 그 숫자라면 소리 없이 제압하는 건 무리겠어.

-어차피 우리는 제압이 아니라 시선을 끄는 걸로 왔잖나. 자, 나가세나.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절그럭대는 갑옷소리가 들리자 저마다 잡담이나 군것질을 하던 니아트리브 수병의 시선이 돌아갔다.

“누구냐!”

“경계할 것 없다. 니아트리브 해군 장교 대위 홉킨스라고 한다. 우연히 이 섬에 정박했다가 산책 겸 나왔는데. 여기 책임자가 누구지?”

수병들이 눈치를 보더니 한 천막을 가리켰다. 하도 당당하게 나오니 그런가보다 하며 경계심이 금방 사라졌다. 홉킨스의 옷이 실제로도 장교 복장이기도 했고.

갑옷을 입은 기사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수병들을 지나쳐 셋은 장교용 천막으로 들어갔다.

“누구요?”

난잡한 짐이 쌓여 있는 천막 안에선 배 한 척에 있는 숫자만큼의 장교들이 한데 모여 포커를 치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금은 휴직 상태지만 사략선 하나를 이끌고 있는 대위 홉킨스라 합니다.”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찬가지로 배 한 척을 맡은 대위 제임스라 합니다.”

선장끼리 간단한 악수를 나누고, 제임스 대위가 뒤편의 두 기사에게 의문을 가졌다.

“실례지만, 저 두 기사 분들은......?”

“아, 오며가며 만난...... 에크나르프 기사요.”

“에크나르프? 허. 골치 아픈 동료를 두었습니다그려. 그런데 여기는 엄연히 군사작전 지역이라 타국 사람들은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아 걱정 마시지요. 이들은 에크나르프 인이지만 방랑기사이기도 하고 니아트리브 쪽에 귀화 의사를 밝혔으니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귀화? 이거 참 신기한 말을 다 듣는군요. 어디에서부터 오셨는지요?”

“사략선 경로야 뻔하지요. 니아트리브에서 에크나르프 왔다갔다하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허탕만 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렀는데, 예전에 왔을 때와 많이 달라져서 산책을 좀 하다가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적적하다면 얘기라도 할까요?”

“그렇다면야 저도 환영입니다. 여기 처박혀서 공사나 감독하자니 좀이 쑤셔서 말이지요. 여기 저 멀리에서 가져온 차가 하나 있는데, 앉아서 얘기라도.....?”

이런 조용하고 볼 거 없는 섬구석에서 지내는 것이 심심했는지 제임스가 먼저 호의를 보였다. 같은 니아트리브 장교라는 친근감도 한몫했다.

“아, 차 좋지요. 어디 차입니까?”

“북에프레카 지방에서 시험 삼아 재배한 차라고 하덥니다. 저 멀리 힌디나 동방 엘프의 차보다는 못하지만 값도 괜찮으면서 향도 나름 나쁘지 않아 가성비는 좋더군요. 그래서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 척박한 땅에서 차가 자란다고요? 거 신기한 일이네. 그럼 어디 맛도 볼 겸 한 잔 하지요. 두 분도 앉으시게나.”

그렇게 장교 천막 안에서 시간 끌기용 이야깃거리가 풀어지는 사이, 주둔지 근처로 조그만 그림자가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