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태동하는 재앙-11
영혼. 많은 이들이 존재를 믿긴 하나 실증되지는 않은 것.
많은 이들이 곳곳의 유령 목격담 등을 환각이나 헛소리로 치부하곤 한다. 유로파를 지배하는 카톨릭의 교리에 따르면, 영혼은 보이진 않으나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신의 심판대로 올라간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영혼에 설명하는 관점에 대해선 지중해 너머 술탄국 역시 동일했다. 다만 유령을 완전히 부정하는 카톨릭과는 달리 이슬람은 유령은 누군가의 영혼이 아니라 악마의 장난 혹은 악마의 꾐에 빠져 심판대에 올라가지 못한 영혼이라고 말하며 두루뭉술 설명을 넘기곤 한다. 누가 봐도 유령과도 같은 존재, 진(jinn)을 다룸에도.
실증주의를 지향하는 마법사들조차도 공식적으로 영혼은 존재는 하나 확인되진 않았다라고 변명처럼 덧붙이곤 한다.
하지만, 소년은 영혼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인간이 죽으면 빠져나오는 희끄무레한 무언가. 얕게 비명을 지르는 그게 영혼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오로지 소년의 눈에만 보이는 영혼. 때문에 소년은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이 영혼이 몸을 탈출하느냐 아니냐는 것을 안다.
사람과 동물을 일으키는 방식의 차이 역시 영혼의 유무에 따라 다르다.
로드릭은 이는 지능과도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을 내놓았다.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소년은 이 지능이 낮다는 ‘짐승’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눈치 볼 것도 없겠다, 소년은 즉시 이 트롤이라는 괴물을 되살려보기로 했다.
[일어나라]
예의 그 소름끼치는 명령과 함께, 소년의 기운이 트롤의 죽은 몸뚱이에 파고들었다.
트룰의 두꺼운 거죽을 뚫고, 완전히 말라 버린 핏줄 하나하나에 소년의 알 수 없는 힘이 들어차며 완전히 죽어 조금씩 썩어 가던 거대한 몸뚱이를 서서히 박동시켰다. 트롤의 머리가 몸뚱이에 시간이 되감기듯 스르륵 붙어 제자리를 찾아갔다.
“크, 크어으......”
큼직한 체구의 트롤이 팔을 꿈틀거리고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오 세상에.”
트롤을 처음 보는 홉킨스 선장이 감탄을 내뱉었다.
“트롤은 마법사가 아닌 이상은 쉽게 상대하지 못합니다. 오르네리도 올가미를 걸었으니까 잡은 거지 안 그랬으면 힘들었을 겁니다. 선상 싸움에서는 제격이겠군요.”
“어, 브란트 선배님. 문제는 저거 좀 많이 무겁지 않습니까? 갑판 꺼질 각오는 해야 할 거 같던데요.”
“아 그렇지......”
트롤의 피투성이 머리가 소년을 쳐다보았다. 트롤의 공허한 눈에서는 살아있을 때와 같이 ‘먹이’에 대한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등불의 불빛이 희미해지는 천장의 어둠 속에서 큼직한 검푸른 안광이 번득였다. 상체만 일으켰는데도 등불을 머리 위로 올려야 할 정도로 트롤은 상체가 길었다. 그 대신 다리가 좀 짧았다.
“일어나봐.”
소년이 명령하자 사람 말을 알아들을 지능이 없는 트롤이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다 천장에 머리를 찧었다.
“크우우.”
그러면서 조그만 소리를 내는 게 ‘어떻게 해요?’하고 묻는 듯했다. 얼핏 들으면 곰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나가자.”
갑판 위로 나가 태양빛을 받자 트롤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진한 갈색이라 나무껍질처럼 보이는 우툴두툴한 피부가 햇빛 아래 드러났다.
완전히 선 키는 사람보다 대충 두 배 정도 되는 게 약 4야드(약 3.65m)는 되는 것 같았다. 덩치는 키에 걸맞게 사람의 서너 배 정도는 넘어 보였다. 죽은 지 좀 되어 근육이 축 늘어지긴 했지만 통나무 한두 개 정도는 능히 옆구리에 낄 수 있을 단단한 팔, 짧지만 그만큼 굵어 쉽사리 넘어뜨리지 못할 다리. 얼굴은 귀와 턱 쪽이 크고 주름이 가득 진 데다 표정은 멍청한 것이 숙취에 시달리는 고집 센 대머리 늙은이 같았다.
툭 튀어나온 주걱턱과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날카로운 이빨 때문에 아무리 잘 봐줘도 못생겼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외모였다.
“이야, 저게 뭐야!”
“아아, 저건 트롤이라는 거다. 저 두 기사님께서 잡으신 거지!”
국가 간 감정은 모두 죽음으로 씻어낸 건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며 선박 보수를 하던 선원들의 눈길이 트롤에게 집중되었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이들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영혼의 반이 없어 그만큼 무언가가 거세된 것일까. 그들에겐 트롤에 대한 공포심보단 그저 호기심만이 엿보였다.
트롤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그대로 갑판 한복판에 주저앉고는 벌렁 드러누워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원래 저런 성격인가 봐요! 사냥할 때도 싸움 전까지는 엉덩이나 긁적거리면서 하품이나 해댔거든요. 진짜 곰 같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선원들 가운데 한 명이 다가왔다.
“아따 등치도 크네! 니 말 할 줄 아나?”
웨스트에일스 출신 빅커스였다.
“킁.”
트롤은 힐끔 보더니만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하지만 빅커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이제부터 니 이름은 스프링밀(springmeal)이여! 모두들 앞으로 그렇게들 아드라고!”
거친 피부를 탁탁 두드리더니 빅커스가 트롤의 이름을 제멋대로 지어주면서 깔깔거렸다. 대체 왜 저런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감은 나름 괜찮아서 선원들이 킥킥댔다.
“주인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홉킨스 선장이 물었다.
상관을 마주했을 때처럼 공손하고, 또한 열정으로 빛나는 눈을 하고 있었다. 바다를 누비며 무엇을 할지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그는 그저 한 명의 사략선 선장이자 소년의 하수인일 뿐이니, 과거가 어찌 되었건 미래를 바라보고자했다.
“글쎄. 잘 모르겠네. 일단은 돈을 모을 생각이야.”
“제 배에 타고 싶어 했던 이유가 그거셨습니까?”
“대충은.”
“그 다음은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지. 나는 세상을 잘 몰라. 뭐가 얼마나 하는지, 얼마나 받는지.”
“그건 저희들이 맡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모르는 것이야 저희가 가르쳐 드리면 되고요. 일단 제 1순위는 돈을 모으는 것이다, 이것이지요?”
“응.”
“흐흠. 그렇군요.”
소년의 말에 홉킨스와 두 기사가 시선을 교환했다.
“돈을 모을 수 있는 곳은 많지.”
“땅에서도, 바다에서도요.”
“하지만 바다는 운이 다소 필요해. 무슨 배가 지나갈지는 미리 정보를 알지 않는 한은 모르니까.”
“그러니 항구 습격이라던가 그런 게 나을 텐데.”
“그러려면 사람이 많아야지요!”
“그러니 제일 시급한 문제는 선원이야. 선원과 선박을 늘려야 습격도 수월하고 약탈한 것도 듬뿍 싣지.”
셋은 주인을 모시는 충직한 가신으로 탈바꿈하여 소년에게 도움이 되도록 머리를 맞댔다.
과거가 어떻게 되었든, 지금은 소년이 그들의 모든 것을 가진 주인이었다. 소년은 적이었던 이들이 자신을 위해 상의하는 모습을 보며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난생 처음 느끼는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어색해하면서 그저 듣기만 했다. 기분 나쁘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교육이 시급합니다.”
홉킨스 선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로 검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강조했다. 소년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교육?”
“예. 주인님께서는 어리시고, 아는 게 많이 없으시지요. 빈민가 출신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자고로 세상은 아는 것이 힘입니다. 선장이라는 지위도 수많은 경험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날씨가 될지 징조를 알고, 이맘때쯤엔 바람이나 해류가 어디로 가는지, 이 시기엔 무슨무슨 배가 오가고, 선원들의 상태가 안 좋으면 왜 그런지, 물자의 흐름을 판단하여 보급품을 싸게 살 수 있는 방식이라던가 하는 것 등등 수많은 경험들이 뒷받침됩니다. 그런 경험들을 선원들이 존중하여 선장이라는 권위가 유지되기도 하지요.”
브란트 역시 거들었다.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힘이나 기교만으로 기사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장에서 순간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도 중요한데, 이른바 전술적 판단이란 겁니다. 그런 판단 역시 다양한 지식을 알아야 발휘될 수 있습니다. 지형의 상태, 자연환경, 날씨로 인한 영향 등을 모두 합쳐야 적의 정보, 아군의 정보, 물자 흐름과 지역 정세에 따른 적의 상태 변화 등을 알게 되고, 따라서 전장에서 당장 해야 할 일이 더 똑바로 보이는 법입니다. 바다인 만큼 제 지식은 일부만 적용될 테지만 보편적으로 상응하는 지식은 늘 있는 법이니, 자신의 눈과 손이 닿는 곳에 대한 정보에 무지하면 안 됩니다.”
알고 있는 것이 브란트보다 적은 오르네리는 그저 맞다면서 브란트의 말에 격한 동의를 보냈다.
“......”
셋의 눈이 과도한 의욕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제가 아는 모든 걸 가르쳐드리지요. 선장으로서의 지식, 니아트리브 인으로서의 지식, 바다의 대한 지식 전부! 저희가 섬기는 이가 아는 게 없다는 건 곧 불경한 일입니다. 저희가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단 말이니까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칼과 몸을 쓰는 법, 귀족의 법도, 에크나르프의 지식 같이 아는 것을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주인님께서 지식부재로 곤란해지는 것은 상관을 모시는 기사로써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 거기다가 마법사에 대한 정보도 조금 얻어들은 거 있어요!”
이런.
당분간 방대한 지식이 우겨넣어질 것 같았다.
“어, 응......”
소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하기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일전의 패배로 인해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절절히 동의하고 있었고 저들의 말에서 틀린 말 하나 없었으니까. 확실히 소년은 빈민가 외의 지식은 많이 부족했다. 마법사 로드릭이 설명하는 것의 태반을 뭔 소린가 하고 알아듣지 못했지 않은가.
그저 자신을 위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처음 겪는 상황에, 마음 한쪽이 간질거리고 실실 웃음이 나오는 이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 어색해서였다.
뭘까 이 기분은.
소년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이 생소한 현상에 의문을 가지며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어두운 밤. 수많은 백색 기둥이 떠받친 건물의 기둥 사이로 군데군데 쇠그릇에 담긴 불씨가 붉은 빛을 토해냈다.
해는 이미 졌지만 수없이 켜진 촛불로 인해 건물 내부는 주황빛을 띤 은은한 따스함을 지니고 있었다. 곳곳에 밝혀진 촛대 옆으로 수많은 이들이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의자에 줄지어 앉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쓰거나,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웅얼거리는 무리들이 경건한 얼굴로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귀를 간질이는 낮은 기도문 외는 소리 가운데,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바닥에 틈 하나 없이 깔린 돌판을 밟으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발소리는 길쭉한 흰 모자를 쓰고 희고 긴 옷차림을 한 이들을 지나치고,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곳곳을 경계하는 하얀 갑옷의 기사들 사이를 거쳤다.
다리를 감싼 품 넓은 감색 사제복이 계속해서 빠르게 출렁이는 것이 다급하게 걷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발걸음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멈추었다.
문은 마치 권위를 상징하듯 위로 길쭉했고, 나무덩굴을 형상화한 조각이 가장자리에 양각되어 있었다. 가운데는 험상궂은 사자가 둥근 철고리를 꽉 물고 있었다. 발걸음의 주인은 금속 문고리를 이용해 문을 툭툭 두드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들어오라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흰 서코트(surcoat) 밑으로 은백색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가 문 뒤에서 문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발걸음의 주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기사가 문을 슥 닫았는데 그 동작이 군더더기 없고 조용한 것이 마치 유령 같았다.
정적이란 느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조용한 방이었다. 매끄러운 흑단나무 탁자 위 밝혀진 촛불의 빛에 음영이 진 늙은 얼굴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방의 주인이 말했다.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길고 하얀 수염에 축 처진 눈초리는 나이든 현자를 연상케 했다. 입고 있는 흰 옷의 가슴에 박힌 십자가와 그 주변의 수놓아진 나무덩굴, 탁자에 놓인 얇고 납작한 붉은 모자가 노인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추기경.
교황청의 권력기관의 상층부를 이루는 고귀한 사제였다.
“별빛께서, 위대한 주님께서 제게 속삭이셨습니다.”
붉은 서코트 밑의 사제복의 가슴팍은 굴곡이 있었다. 목소리 또한 남자라기엔 가늘었다. 수녀인데도 고위 사제직을 의미하는 붉은 서코트를 입고 있는 걸 볼 때 평범한 이는 아니었다.
그 말에 추기경이 편히 앉아 있던 허리를 세웠다.
“별빛?”
노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별빛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앞에 있는 이는 단순한 수녀가 아니게 되었다. 붉은 서코트를 불안한 시선으로 쓸어내리며, 추기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별빛지킴이께서 이 야밤에 무슨 일이신가.”
노인의 목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명주실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노인의 심경을 아는지, 별빛지킴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다른 이가 조종하는 것처럼.
“재앙이 태동하였다.”
“......!”
재앙.
별빛지킴이가 직접적으로 재앙을 입에 담았을 때는 말 그대로 재앙이라 할 수 있는 격변의 시대가 열렸다.
고대의 ‘위대한 제국’이 둘로 갈라졌을 때, 거대한 용이 이끄는 작은 말을 탄 엘프들이 물밀 듯 밀려오며 세상을 불태웠을 때, 검은 역병이 온 유로파를 뒤덮었을 때.......
추기경의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다를 뒤덮을 죽음의 안개가 몰려온다.”
바다? 지중해 너머 이교도? 아니면 신대륙에서 문제가 생기나? 추기경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금기를 저질렀다.
“어디, 어디서?”
그리고 그 직후 입을 콱하고 손으로 막았다.
이, 이런!
“그, 그, 커억!”
추기경이 실수로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금기를 저지름과 동시에 별빛지킴이가 풀썩 쓰러졌다. 의자에 넘어져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한 걸, 뒤에 있던 기사가 받아주었다.
추기경의 시선이 기사를 향했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별빛지킴이를 들쳐 업고 조용히 추기경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 발걸음은 별빛지킴이가 여기로 올 때처럼 다소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