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태동하는 재앙-10
또 한 명의 희생자가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풍덩 하고 바다에 빠졌다. 크게 베인 가슴의 상처에서부터 피가 물속으로 흩어져가고, 시체는 이내 바닷물을 들이마시며 깊은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주변에는 두 배에서 떨어진 시체 몇 구가 둥둥 떠 있었다. 방금 떨어진 이 역시 같은 신세가 되리라.
피비린내와 짙은 화약 냄새가 뒤섞이며 비명과 고함이 갑판 위에 가득했다.
“버텨! 버텨!”
“절대 네놈들에게 항복 따윈 안 한다!”
“저, 저주라니, 우린 다 죽었어!”
“으악 내 팔!”
공포에 젖어든 에크나르프 선원들이 제각기 혼란에 빠졌지만 그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니아트리브와 에크나르프는 오래 전부터 꽤나 원수지간인 나라다. 섬과 대륙이라는 지형 특성상 서로가 서로를 침공한 역사가 있어 굳이 권력자 사이의 정치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두 나라의 국민감정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사략 허가가 남발됐고, 서로에게 붙잡히면 어떤 운명이 되는지는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홉킨스 선장은 사략선은 국제적 협약을 지킨다고 떠들었지만, 사실 그 두 나라 사이에서는 법도고 뭐고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붙잡힌 선원들을 노예로 팔아버리기가 일쑤였고 학살도 다반사였다. 왜냐면 바다에 빠뜨려버리거나 저 멀리 신대륙 농장으로 향하는 노예선에 팔아버리면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굳이 두 나라 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바다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포로를 먹여 가면서 상대 국가에 인도하는 것보다 다 죽이거나 파는 게 더 나으니까. 그런 경향 때문에 사략 사업은 따지고 보면 해적질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국가가 주관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뿐.
그렇게 에크나르프 선원들이 악에 받쳐 저항하자 장교의 취미 호의 약탈 성공 가능성이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두 기사에게만 선원이 스물 넘게 줄어버린 까닭이었다.
안 그래도 인원 차 때문에 다소 걱정되었는데, 기사가 껴버리자 장교의 취미 호 입장에서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치게 될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상황을 극적으로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일어나라]
섬뜩한, 하지만 모두의 귀에는 그저 산들바람이 부는 것으로만 느껴지는 선언과 함께 일순간 전장의 분위기가 조금 어두워진 느낌이 들었다.
“으으으......”
“어? 너 괜찮아?”
총알이나 칼에 맞아 쓰러졌던 선원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일어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으악! 목이 없는데 살아 움직인다!”
“분, 분명 죽었는데 어떻게......?”
두 배 위의 죽은 이들이 모두 비척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저주!”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저주야!”
“히이익!”
모두가 죽었다 살아난 선원들에게 집중할 때, 갑자기 니아트리브 선원들이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크악! 왜 날!”
“피터, 왜 그래!”
“으악!”
장교의 취미 호 선원 일부가 같은 편에게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되살아난 이들도 아군적군 가릴 것 없이 칼과 석궁을 겨누었다.
불시에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은 이들 역시 잠시 후 다시 되살아나 동료였던 이들에게 무기를 들이댔다.
“이것들이 미쳤나, 정신 똑바로 차려 이것들아!”
홉킨스 선장이 적으로 돌변한 부하들의 칼을 받아치며 외쳤으나 동공이 활짝 열린 그들의 멍한 눈빛을 보자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법사가 있다 했지!’
에크나르프 쪽에 기사까지 있는데 몰랐을 리는 없고, 그럼 우리 쪽에서.......
“꼬맹이 네노오옴!!”
그의 배에 새로 들어온 이는 그 꼬마 하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것처럼 분노에 찬 외침을 들었지만 소년은 귓등으로 흘리고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돛대에서 저만치 밑의 선원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은 그저 벌레가 서로 싸우는 것처럼만 보였다.
이 얼마나 하찮은가.
판자촌의 빈민들을 사냥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칼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미지의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무너지는, 참으로 별 것 없는 것들. 그러면서 자신이 최고라 주장하는 것들. 저들의 행태는 빈민가의 빈민들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돛대 위에서 조그맣게만 보이는 산 자들은 참으로 작은 존재들이었다.
빈민가 밖의 세상에 나름 동경을 품었건만. 정작 밖에 나와 보니 빈민가와 근본적으로는 같았다.
남의 것을 빼앗고, 별 것 없는 명분으로 죽이고, 더 강한 자에게 사냥당하는 세상.
‘세상이 다 이런 걸까.’
벌써부터 빈민가 밖 세상에 대한 실망을 품은 소년이 턱을 괴고 벌레처럼 버르적거리는 큼직한 점들이 뒤엉키는 것을 구경했다.
“네놈을 배에 싣는 게 아니었어!”
저 밑에서부터 홉킨스 선장의 절규가 들려왔다.
“이미 늦었어.”
갑판 위에 있는 이들의 감정은 자신에게 전혀 자극을 줄 수 없다는 듯, 나른하고 나지막한 소년의 목소리와 함께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해온 선원들과 갓 살아난 시체들이 산 자를 밀어붙였다.
“죽어라......”
“흐으으......”
쓰러져 있다 죽은 기사들도 결국 소년의 꼭두각시로 거듭나 산 자를 도륙하는 데 거들었다. 상황은 금방 정리되었다. 상대는 죽지 않고 아군은 죽으면 적군으로 살아나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허억, 허억......”
가슴에 총알을 맞아 거친 숨을 내쉬는 홉킨스 선장이 애써 내뱉었다.
“네놈을 태우는 게 아니었어.”
시체가 된 부하들에게 포위된 채, 홉킨스 선장은 시체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소년을 씹어죽일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불안한 감각을 믿었어야 했다.
“늦었대두.”
그런 선장의 뒤에서는 목이 베여 검은 피를 뚝뚝 흘리는 조타수 발렌타인이 칼을 높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약자는 강자에게 먹히는 비정한 바다 위의 규칙에 따라, 장교의 취미 호는 자신들이 약탈해 온 배들처럼 결국 누군가에게 장악되는 결말을 맞았다. 과거 군선으로 쓰였던 에크나르프 선박 역시도 강자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피가 흥건하고 나뭇조각이 흩어진 갑판은 230여 명에 달하는 살아 있는 시체들이 부지런히 움직여 보수 작업을 실시했다. 흩어진 파편과 쓸모없는 덩어리들을 모아 산탄용 주머니에 채워 넣고, 구멍 난 곳에 판자를 덧대고 상처난 돛을 기웠다.
칼과 칼 대신 못과 망치가 부딪히는 쇳소리가 피비린내와 화약 탄내가 채 씻기지 않은 배 위를 채웠다.
한편 소년은 에크나르프 선박, 바다의 진주 호의 짐칸에 들어와 있었다. 자신의 것이 된 선박이 뭘 싣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군용 선박인 낡은 갤리온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 이유는 이 배를 사들인 귀족 가문이 붙인 이름이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된 거지요. 하하! 참 어색하지 않습니까? 이 칙칙한 배가 진주라니. 물론 겉은 잘 도색해서 말끔하긴 하지만 정작 안은 돈이 아깝다고 개보수를 안했습니다. 돈도 많은 대귀족이 그렇게 쩨쩨해서야 어디 쓸는지 원.”
젊은 기사, 오르네리 경이 투구를 벗고 금발을 드러낸 채 하하 웃으며 자신이 충성하던 귀족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금발에 푸른 눈. 전형적인 귀족 도련님의 얼굴을 한 이 기사는 높고 쾌활한 목소리로 살아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댔다.
“조용히 좀 해라 이 녀석아.”
다른 한 기사는 갈색 머리칼과 바싹 자른 수염을 가진 덩치 큰 중년 남자였다. 죽어서 동공이 풀리긴 했지만 깊은 푸른 눈에서 발하는 현기는 여전한 사내였다.
“너는 이름이 뭐랬지?”
소년은 중년 기사에게 물었다.
“브란트라고 합니다. 성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어지지 않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이 생겨도 침착함을 유지할 것 같은 브란트가 외모에 맞게 차분히 설명했다.
귀족 자제라고 해서 다 가문을 잇는 것이 아니며, 정식 상속자가 되지 않은 이들은 대부분 다른 길을 택한다고 한다. 가신이 되거나 분가하여 재능에 따라 상업이나 마법, 검술 등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중 기사의 길은 일단 성을 버리고 일개 견습 기사로 기사 양성소에 들어가게 되며, 차후 정식 기사가 되었을 때 왕국 혹은 주군으로부터 성을 하사받는다고 한다. 대부분은 원래 가문의 성을 그대로 받는 대신 방계로 돌려진다고.
“저희가 섬기기로 한 귀족은 괴수 사냥으로 유명한 가문이라 기사가 가문에 입문하는 조건도 괴물을 잡아오는 것입니다. 저희가 운반하던 것 역시 괴물이었죠.”
“어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에크나르프 남부 산골짜기까지 내려오는 게 더 힘들긴 했지만요 히히.”
“오르네리. 넌 어떻게 된 게 주인님 앞에서도 이렇게 경박하나.”
“뭐 어때요. 미니에 백작 가문은 계속해서 근엄하게 있어야 되는 게 저랑은 늘 안 맞았어요. 괴물 사냥을 동경하지 않았으면 거기엔 들어가려도 안했을 거예요.”
“하긴. 그 집안이 딱딱하긴 했지.”
아까 전만 해도 적이었건만, 생전의 인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전 주군을 그저 얘깃거리로만 여기며 눈앞의 소년을 당당히 주인님이라 칭하는 두 기사. 그 모습은 소년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영혼의 절반이 없는 것.
그건 엄청난 변화를 동반했다.
한 입만 먹으면 일전의 두 마법사처럼 반항심까지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이 부여되며 살아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외모를 유지할 수 있다.
두 입을 먹으면 배신이니 뭐니 생각할 수도 없이 지능이 떨어지고 몸이 썩는 하자가 생긴다.
하지만 두 입이 조금 안 되는, 영혼의 딱 절반만 남기는 것은 장점만을 합하는 황금비율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그 비율은 이미 빈민가에서 많은 빈민들을 잡아먹으며 알아냈었다.
3급 마법사가 자폭한 건은, 반항이라면 모를까 소년에게 해를 입히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몰랐고, 살릴 때 향기에 취해 대충 한 입 먹고 살린 것이기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 씁쓸한 경험으로 인해 소년은 부하들이 또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까 그 황금비율을 지키고 있었다.
소년은 두 기사의 옆을 보았다.
홉킨스 선장이 흥미로운 눈으로 에크나르프 선박에 실린 화물을 살피고 있었다.
“홉킨스.”
“예. 부르셨습니까.”
죽기 직전 원망과 분노를 가득하게 품고 죽은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공손하고 차분한 대답이었다. 영혼의 절반이 종속된다는 것은 생전의 감정과도 관계가 없어지는 걸까.
“그냥 불러봤어.”
홉킨스 선장은 별 감정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려 화물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좋은데?’
소년은 자신의 힘에 대해 쾌감을 느꼈다.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다. 몸뿐 아니라 마음조차도!
이는 남에게 두려움은 줬지만 노골적으로 남의 것을 탐하지는 못해온 소년의 보상심리를 자극했다. 소년은 이 힘으로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을지 아직은 몰랐다. 그저 순수하게 당장 일군 결과물을 보며 뿌듯해할 뿐이었다. 소년은 이제 갓 세상으로 나온 아이였으니.
“아, 맞다.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브란트 경이 등불을 화물에 가까이 대며 소년을 짐칸으로 데리고 온 이유를 보여주었다.
불빛에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피가 덕지덕지 붙은 피부였다. 음영이 잔뜩 지는 걸로 보아 매끄러운 피부는 아닌 듯했다. 브란트는 ‘화물’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아래에서부터 찬찬히 쓸어올리듯 등불을 비추었다.
사람과 비슷하지만 훨씬 두껍고 근육질인 팔다리. 소처럼 갈라진 굵은 두 개의 발가락과 사람 같지만 훨씬 굵은 네 개의 손가락. 떡 벌어진 어깨와 목이 베여 죽었는지 잘려 있는 목. 사람과 비슷하지만 말단부가 비대하여 흉측한 머리.
키는 사람의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창에 찔린 자국과 길게 베인 상처, 아직도 박혀 있는 화살 등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몸에 그대로였다.
“이게 뭐야?”
“이게 바로, 트롤입니다.”
“트롤?”
“숲 깊은 곳에 사는 식인 괴물이지요. 이놈을 잡기 위해 백 명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올가미를 걸고 그 상태에서 오르네리가 족히 삼십 분은 싸웠습니다. 일격에 죽이기 힘드니 상처를 계속 내 실혈로 죽이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힘이 세다기보단 맷집이 좋은 그런 괴물이었는데 그렇다고 힘이 약한 건 아니고 소 한 마리는 번쩍 들어서 저 멀리 날려버릴 수도 있대요!”
브란트의 설명 뒤로 오르네리가 다소 촐싹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호오, 트롤......”
백 명의 힘을 견디고 그 상태에서 사람 수십은 우습게 죽이는 기사와 한참을 싸웠다고?
“뭐 중간에 위험한 적이 몇 번이고 있어서 저와 병사들이 견제를 해줘야 했지만요. 통하지도 않는 화살을 쏴대 신경을 분산시키고 투창을 몇 번이고 해야 했습니다.”
“헤헤 면목 없네요.”
오르네리가 멋쩍게 웃었다.
“처음에는 마법사가 트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뺏으러 왔나 했어요. 트롤은 마법사들에게 비싸게 팔리거든요. 세상에 금화로만 몇 주머니였는지 들었을 때 정말 식겁을......”
“얘는 지능이 있어?”
수다를 떨려는 오르네리의 말을 자른 소년의 물음에 브란트가 답했다.
“아니요. 그저 짐승입니다. 말을 못하니 협상도 못하고 길들일 수도 없지요. 사람을 보면 그저 먹이로만 여기고 달려들려는 곰 같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지능이 없다고? 소년이 눈을 반짝였다.
사람과 동물을 일으키는 차이는 영혼이다. 로드릭은 이는 지능과도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을 내놓았다.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소년은 이 지능 낮은 짐승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