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태동하는 재앙-9
자비는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아량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기사란 존재가 포함된 에크나르프 측은 명백히 강자였다.
“오늘은 사냥을 성공해 좋은 날이니 이쯤하고 물러가면 쫓지 않겠다.”
기사는 자비롭게도 퇴각을 허용해 주었다. 꿍꿍이가 있는지 아니면 저 말 그대로인지는 투구에 가려 표정을 알 수 없어 몰랐다.
홉킨스 선장의 얼굴이 굴욕에 일그러졌다. 니아트리브의 장교가 에크나르프의 기사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상황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 현 상황에선 거부할 수가 없었다. 기사가 하나도 아니고 둘인 데다, 상대 선원 수가 더 많아서 억지로 싸움을 이어가다간 필패였다. 하필 기사라니. 이길 수 있었는데 재수도 지지리 없지!
그렇다고 그 말에 곧바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에크나르프 놈들이 뒤통수에 포탄을 먹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장이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해 고민하며 양측은 쓸데없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제길, 기사라니. 왜 하필 이런 수송선 같은 데에 처박혀 있고 지랄이여.”
발렌타인이 투덜거리며 선장을 힐끔거렸다. 후퇴 명령을 원하는 눈치였다.
다 같이 달려든다면야 기사를 제압하는 게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건 이들이 죽는다는 두려움이 없을 때 얘기다. 분명 누군가는 죽을 텐데, 자신이 죽고 싶지 않아 서로 눈치만 보면서 주춤거리다가 기사들에게 하나씩 사냥당할 게 뻔하다.
그런데 갑자기 두 기사들이 자신의 몸을 더듬더니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니아트리브 놈들! 마법사가 있다! 죽여라!”
***
소년은 기사란 건 뺨을 때린 여자 호위기사 밖에 겪어본 적 없고 싸우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기사의 전투력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졌다.
‘어차피 슬슬 때도 되었고.’
소년은 고개를 돌려 홉킨스 선장을 내려다보았다. 돛대 위에서 본 선장은 엄지손가락만큼 작게 보였다. 선장에게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 정도의 짙은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다른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장교의 취미 호도, 에크나르프 선원들도.
심지어 저 두 기사들도.
‘이건, 내가 다 이길 거란 거겠지?’
소년이 보는 죽음은 정확했다. 행동에 따라 그 죽음이 비켜가기도, 더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그거야 선택지가 있어서 변수가 생겼을 때 얘기고. 어디 도망갈 데도 없는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일어날 일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는 오로지 소년의 선택에 따라 저들의 목숨이 좌지우지된다는 의미였다. 죽음을 보는 능력을 미래 예지처럼 사용한 소년의 마음이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소년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에게 데인 게 고작 일주일 전이다. 패배의 쓴맛을 잊기엔 일주일은 짧은 시간이었다.
로드릭과 다른 마법사들의 실력이 하늘과 땅 차이였듯, 소년이 저주로 죽인 호위기사와 저 기사들도 실력 차가 날 수도 있었다. 소년은 노인이 한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내 힘을 너무 믿진 말자. 아직은.......’
고위 마법사의 영혼을 일부 먹고 실력이 늘은 뒤로는, 가면 갈수록 다양한 사용방법이 생겨나 스스로도 뭐든지 다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이 들었지만 소년은 힘에 취하지 않았다.
쓰디쓴 약이 몸에 좋다 하듯, 패배의 쓴맛과 노인의 조언은 소년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신중함을 갖게 했다.
‘또 지긴 싫어.’
필요 이상으로 패배를 신경 쓰느라 위축된 게 좀 흠이긴 했지만.
우선 소년의 힘이 저들에게 잘 통할지를 봐야 했다.
두 기사들이 사냥 운운하며 후퇴를 종용할 때, 소년은 지긋이 두 기사들을 응시하며 힘을 발휘했다.
소년의 힘이 바닷속에서 하늘거리는 해초처럼 공기를 가르며 두 기사를 감쌌다. 기사들은 자신의 몸에 뭐가 들러붙는지도 모른 채 가만히 있었다.
‘역시 못 느끼네.’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기사들 역시 소년의 힘을 감지할 수 없었다. 로드릭은 선천 마력이라곤 하는데 정작 소년의 힘은 로드릭이 설명해준 마력의 특징과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어쨌건 자신감이 좀 더 붙은 소년은 더 나아가 연결된 힘을 통해 곧바로 저주를 걸었다. 질척한 느낌의 힘이 두 기사의 갑옷과 투구를 파고들어 그들의 신체에 영향을 끼쳤다.
“......?”
“음?”
두 기사들이 이상반응을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자신의 몸 상태가 달라졌음을 인지한 것이다.
‘통한다!’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아냈으니 더 적극적으로 저주를 걸려고 할 때, 기사 하나가 외쳤다.
“니아트리브 놈들! 마법사가 있다! 죽여라!”
그 말과 함께 기사 둘이 장교의 취미 호의 선원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어갔다.
소년이 혀를 찼다. 행동도 빠르네.
앗 하는 사이에 넷이나 되는 선원의 목이 날아갔다.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까 전과 비슷한 싸움 양상이었지만 기사들의 참전으로 인해 아까 전과는 전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흔들리는 배 위를 평지처럼 거닐었다. 화살처럼 선원 사이에 파고든 기사는 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하나의 목숨을 날렸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검의 광택이 번쩍하면 팔이 날아가 있고, 또 번쩍하면 목이 떨어져 있었다.
선원들도 나름 싸움에 일가견이 있다지만, 전문적으로 인간을 상대하는 데 일평생을 수련한 기사들을 막기엔 무리였다. 더구나 두꺼운 전신갑옷까지 입고 있으니 백병전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머스킷 권총을 장전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기사는 그 선원부터 양단해, 함부로 총을 쏠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어쩌다 총알이 날아와도 몸을 비틀거나 하여 총알이 갑옷 면을 따라 비껴가도록 했다. 그럴 것도 없이 권총 총알은 질 좋은 갑옷에 그냥 튕겨나갔지만. 에크나르프 선원들 역시 놀고만 있던 건 아니기에 기사에게 유효타를 입힐 기회는 더 적었다.
선원들이 서로를 밀치며 기사들에게서 떨어지려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상대를 죽일 가능성이 있어야 달려들 자신감이 생기는데, 그런 게 없으니 돌격은커녕 물러나기에 바빴다.
두 기사의 참전은 고양이가 쥐떼를 휘젓는 것과 같아 장교의 취미 호는 금방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기사들의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기사 브란트는 갑옷 안에서 비 오듯 땀을 흘렸다. 근력이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힘이 없어 금방이라도 칼을 놓치고 쓰러질 것 같아 안간힘을 써야 했다.
기사 오르네리는 눈앞이 침침해지며 이상한 그림자가 시야에서 일렁이는 동시에 환청이 들려왔다. 급격한 체력 소비로 인한 현기증 따위는 아니었다.
‘저주다!’
두 기사는 아까도 그랬지만 갑작스런 몸 상태의 악화를 저주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화약 무기의 발명 이전부터 기사들은 마법사와 오랜 경쟁관계였다. 일부 근접전에 특화된 마법사가 아닌 이상은 마법사는 기사에게 근접전에서 이기지 못하고, 아무리 실력이 좋은 기사라 하더라도 재빨리 붙지 못하면 다 외울 수가 없을 만큼 방대하여 대처법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마법에 파묻힌다.
때문에 기사들은 두 가지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는 마법사가 있는 전장에선 무조건 마법사를 목표로 삼아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방식을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법을 쏘기 전에 죽이는 것.
또 하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마법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눈치였다.
전장에서 마법사는 기사들로 단단히 호위될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병사들로 위장하여 부대 사이사이에서 마법을 쏘곤 한다. 눈치 훈련은 마법사가 누군지 단번에 구분이 불가능할 때 최소한 마법의 징조라도 알아채고 피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었다.
마법의 종류는 너무나도 많아 모든 마법을 구분할 순 없지만 최소한 상식에 벗어나는 현상이 마법일 가능성이라 판단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어디냐! 마법사는 어디에?’
‘빨리 찾아야 한다. 시간을 끌면 당한다!’
몸에 갑작스런 이상이 오도록 저주를 건 마법사를 찾기 위해 기사들의 손이 다급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이미 다급함에 시야가 좁아지고 선상 전투는 처음인 그들로선, 돛대 위에 있는 조그만 머리를 볼 순 없었다.
소년은 기사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방에 자욱한 죽음의 향기 속에서, 선원들의 긴장과 공포에 범벅된 향기들 속에서, 마력을 담은 이의 감정이 뚜렷하게 코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의 감정. 그것이 기사들에게서 기사들의 마력이 묻은 채 옅게나마 풍기고 있었다. 긴장 역시 두려움에 속한다. 두려움의 바로 전 단계가 긴장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확실히 통하긴 한단 얘기인데. 어디 그럼......’
기사들에겐 불운하게도, 소년은 모든 힘을 다한 게 아니었다. 기사들에게 들러붙어 있는 저주의 기운이 더 강하게 기사들을 옭아맸다.
그러자 잘도 선원들을 베어 넘기던 덩치 큰 기사가 갑자기 한쪽 무릎을 쿵 꿇었다. 챙그랑하며 꽉 붙잡고 있는 칼이 손과 함께 바닥을 짚었다. 숨이 거칠고 몸이 좌우로 다소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탈진이 온 모양이었다. 투구 안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을 게 뻔했다.
무력이 얼마나 강하건, 기사들은 마법에 취약했다.
‘잘 먹히네.’
생각보다 이 저주란 게 굉장히 쓸모 있다는 걸 소년은 다시금 깨달았다. 예전에 기사 하나를 죽이는 데 몇 주가 걸렸던 건 한 번 걸고 관찰만 했기 때문인 걸까? 혹 앓다가 죽으라는 저주라서 시름시름 죽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마법이 마법사의 마력과 의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듯, 소년의 기이한 능력 역시 의지가 강하게 개입하는 편이었다. 소년이 지금 저주에 담은 의지는 탈진과 혼란이었다.
탈진의 저주에 걸린 기사는 결국 힘이 떨어져 무기를 놓치고 그대로 갑판에 엎어지고 말았다.
“브, 브란트 경을 부축해! 어서!”
에크나르프 인들이 적 한가운데 쓰러진 기사를 구출하려 하였으나, 나머지 한 기사의 행동 때문에 불가능했다.
“으아아아아!”
혼란의 저주에 걸린 기사가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으악! 기사가 미쳤다!”
“뒤로 빠져!”
“오르네리 경! 정신 차리십시오!”
“당황하지 마라!”
“으아! 으아! 으아아! 이놈들! 저리 꺼져라아아!”
대체 뭘 보고 있는 건지 광란에 빠져 허공에 칼춤을 추는 기사의 주변에서 선원들이 급히 물러나면서 졸지에 다시 전장이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소년은 작게 감탄하면서 전투 상황을 관망했다.
“마법사! 저주다! 마법사의 짓이야!”
그 와중에 쓰러진 기사가 외쳤다. 에크나르프 선원들이 마법사와 저주라는 무섭기 그지없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놈! 어디서 소문을 듣고 온 건진 모르겠지만 사냥감은 넘겨줄 수 없다!”
사냥감이라. 소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어떻게 알아들은 거지?’
방금 말은 니아트리브 어가 아니라 에크나르프 어였다. 니아트리브 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인데도 소년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다만 에크나르프 어를 그대로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하겠는데 단어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
‘설마 이거 때문인가?’
소년은 주먹을 쥐고 있는 자신의 왼손을 슬쩍 보았다. 죽은 선원들의 영혼들이 한데 뭉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의 심판대인지 뭔지로 가고 싶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장교의 취미 호 선원은 물론이고 에크나르프 선원까지.
나중에 되살리기 위해 절반씩만 뚝 잘라서 먹고 남은 것들이었다.
‘나중에 더 실험해봐야겠어.’
철커덩
밑에서 육중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혼란에 빠진 기사가 완전히 지쳐서 누워버린 것이다.
“밀어붙여!”
때를 놓치지 않고 홉킨스 선장이 외쳤다. 악에 받친 양측 선원들이 다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