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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23화 (24/128)

23화

태동하는 재앙-8

선제 공격은 에크나르프 쪽이었다.

쿵쿵거리며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에게서 대포알이 날아왔다. 하지만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쏴서 그런지 열여섯 개의 포탄은 모조리 빗나갔다.

“당황하지 마라! 저놈들도 결국 에크나 놈이야!”

바다에서 포를 잘 못 쏜다는 에크나르프 선원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외치며 홉킨스 선장이 선원들을 독려했다.

장교의 취미 호는 무장상선 등록이 까다로웠던 때에 만들어진 거라 포갑판을 없애 옆구리의 포문이 없었다. 대포는 모두 갑판 위에 얹혀 있어 선원들이 공격에 취약했으나, 선장은 이를 개조로 해결했다.

“보드 올려!”

선원들이 배 가장자리의 난간 역할을 하던 널빤지를 들어올렸다. 배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나무와 재질과 두께가 같은 두툼한 나무판자는 완전히 고정된 게 아니라 한쪽만 고정되어 있었다. 난간으로 막혀 있던 뱃전은 난간 널빤지가 올라가자 대포를 쏠 공간이 만들어져 포문처럼 바뀌고 선원을 넉넉히 가릴 간이 성벽이 되었다.

선수와 선미에 있는 독특한 목책 형태의 구조물 역시 선원들이 이것저것 만지자 헐거워져 조금만 건드려도 배 밖을 향해 툭 넘어지게 되었다.

그 널빤지들은 상대의 총알을 막아내는 방패임과 동시에 근접 시에는 적의 배로 넘어갈 수 있는 보드 역할을 했다.

끼기긱

급격한 변침으로 인한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긴장 가득한 배 위를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침내 장교의 취미 호가 45도 각도가 되었다.

“발사!”

포갑판 없이 뱃전에서 쏘는 대포의 장점은 포문에 걸친 상태라면 불가능할 각도로 사격할 수 있단 것이었다.

코앞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대포들이 덜컹하고 뒤로 밀려나갔다. 대포 밑을 받친 포가의 바퀴가 덜그럭거리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밧줄이나 선원의 발등을 밟았다.

제대로 된 포문에 걸치지 않은 대포와 포가는 이처럼 자리를 잘 이탈하여 장전 및 재조준에 시간이 걸리곤 했다.

하지만 장교의 취미 호는 상관없었다.

“접근! 보딩 준비!”

“준비!”

“준비이잇!”

“순순히 항복해라 이것들아!”

사략선인 장교의 취미 호는 백병전이 주였으니까.

에크나르프의 함포보다는 니아트리브의 함포가 더 좋다는 상식은 장교의 취미 호에도 통용되었다. 에크나르프 함선이 모조리 빗나간 것에 비해 장교의 취미 호는 열 발 중 무려 다섯 발을 명중시킨 것이다.

한 발은 적의 세 돛대 중 오른편 작은 돛대 하나를 운 좋게 부러뜨려 기울였고, 세 발은 옆구리에 틀어박혀 구멍을 냈다. 나머지 한 발은 배의 하부에 맞고 튕겨나갔다.

“야! 어떤 새끼가 흘수선 밑에 겨눴어!”

입이 걸은 조타수 발렌타인이 뒤늦게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다섯 발 중 하나가 에크나르프 함선의 흘수선 근방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구멍이 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만일 흘수선 밑으로 구멍이라도 났다면 상대편 배를 꼬로록 수장시킬 수도 있었다.

보딩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무색하게도, 두 배가 접근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각도를 틀어 대포를 겨눈 채 서로를 견제하면서 빙빙 돌면서 접근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달팽이의 껍질처럼 나선형으로 돌며 접근하는 장교의 취미 호를 쏘기 위해 에크나르프 선박 또한 제자리에서 돌며 배 옆구리를 보였다.

두 배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포격이 한 번씩 더 교환되었다. 에크나르프 선박 쪽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장교의 취미 호는 포갑판이 없어 어차피 다 갑판 위에 있었는지라 배에 구멍은 뚫렸어도 사상자는 없었다.

서로의 복장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양측의 배가 어느새 가까워져 있었다. 석궁 화살과 총알이 슬슬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사수를 제외한 나머지 선원들은 몸을 잔뜩 굳힌 채 곧 있을 칼날을 교환하는 전투를 대비했다.

서로의 눈에서 탐욕이 어른거렸다. 공격 측에서는 두말할 것 없이 약탈한 뒤의 두둑하게 된 주머니를 기대했고, 방어 측에서도 역시 역으로 방어에 성공한다면 곧 공격자를 약탈하는 것이 되므로 역시 주머니가 무거워지는 꿈을 꾸었다.

두 배가 옆구리를 마주보며 한층 더 가까워지는 순간 장교의 취미 호가 다시 한 번 공격을 날렸다.

“산탄!”

홉킨스 선장이 외치자, 열 문의 대포가 재장전을 위해 뒤로 물러난 사이를 비집고, 나머지 열 문의 대포가 포가를 타고 드르륵 굴러왔다.

“발사!”

열 문의 대포가 뱃전 너머를 향해 불을 뿜었다.

산이 무너지는 듯한 포성과 함께 주먹만한 돌덩이와 쇠구슬, 나무 파편과 쇳조각 등이 난잡하게 섞인 결과물이 화약의 폭발을 타고 에크나르프 함선 위로 흩어졌다. 사람이 많은 만큼 더 많은 짐을 싣고 있어 에크나르프 선박은 흘수선이 높아져 장교의 취미 호보다 갑판 높이가 다소 낮아져 있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각종 파편들이 갑판 위를 휩쓸었다. 쇠구슬에 팔다리가 부러지고, 돌덩이가 몸통에 직격해 갑판 위를 구르고, 파편이 살에 박혀 피를 흘리고, 돛대와 난간 등에서 부서진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장교의 취미 호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갑판 위의 선원들 일부가 무력화되고, 배가 더 가까워져 얼굴도 구분할 수 있게 되자 장교의 취미 호는 보딩을 시도했다.

선원들이 갈고리 달린 밧줄이나 석궁을 쏘아 상대 배의 구조물들을 붙잡았다. 몇 개는 에크나르프 선원들에게 끊겼지만 날아오는 것은 끊어지는 것보다 많았다.

회심의 일격인지 포성이 울리며 장교의 취미 호의 옆구리가 코앞의 대포에 직격당했으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갑판 밑에는 선원이 아무도 없어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것 외의 피해는 없었다.

포갑판은 없지만 포문처럼 생긴 구조물을 옆구리에 달아 놔 상대방을 헷갈리게 하는 술책 때문에 상대는 계속해서 의미 없는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포갑판 내부의 포수들의 시야는 사격으로 인한 포연 때문에 제한적이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요즘 시대에 포갑판 없는 배는 거의 없기도 했으니.

이내 쿵하고 배 옆구리끼리 충돌했다. 반동으로 양측의 바닥이 요동쳤다.

선수루와 선미루의 벽처럼 보이던 목책 구조물이 덜컹하면서 바깥으로 내려왔다. 그 뒤에 숨어 있던 선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총알과 화살로부터 중앙 갑판의 선원들을 보호하던 뱃전의 난간 널빤지 역시 바깥으로 넘어지며 두 배를 연결했다.

“돌격!”

“이야아아아아!”

홉킨스 선장의 외침과 함께 장교의 취미 선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에크나르프 선박의 갑판 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

금속 부딪히는 소리와 머스킷 권총의 폭음과 연기로 갑판 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석궁 화살에 맞아 바다에 빠지는 선원, 권총을 어깨에 맞고서도 분투하는 선원, 어버버하다가 걷어차여 배 아래로 떨어지는 선원 등 배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죽음과 싸움의 유형은 다 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돛대 위 견시병용 전망대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략선이나 해적선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다. 실제로 해적들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어 확실한 비교는 어려웠으나, 배싸움이 다 이렇게 진행되는 거면 해적의 습격도 이 모습과 그다지 다르진 않으리라.

남의 것을 뺏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은 그저 한낱 도적떼와도 같았다. 도적까지도 가지 않고 그냥 빈민가의 일상의 확장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소년은 조금 실망했다. 빈민가 바깥의 세상도 빈민가와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

잘 사는 것들의 거리처럼 빈민가 밖에 다소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경비병한테 걷어차이는 한이 있더라도 잘 사는 것들의 거리에 한번 들러볼 걸 그랬나?

소년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석궁을 전혀 쏠 생각 없다는 듯 발치에 떨어뜨리며 전장을 주시했다.

‘그나저나. 배 밑에 있는 저것들은 언제 올라오려나.’

배 밑에 있는 마력 품은 이들은 선박 위의 소란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설마 포로로 잡혔다거나 그런 건가? 아니면 마력을 가진 만큼 아랫것들의 싸움에는 끼지 않겠다는 걸까?

소년은 다시 갑판을 보았다. 초반의 산탄으로 많은 사상자가 생겨서 전의가 꺾였음에도 에크나르프 선원들은 격렬히 저항하고 있었다. 애초에 수도 많았으니 장교의 취미 호가 에크나르프 선박을 제압하기란 요원해 보였다.

‘그래도 내 것이 될 것들인데. 좀 도와줄까.’

소년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어두워지며 소년의 힘이 전장에 깔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저주가 에크나르프 선원의 몸에 침투해 에크나르프 선원들의 근력과 운을 깎아냈다.

칼을 든 팔에서 힘이 빠지고, 운 없게도 울퉁불퉁한 갑판에 걸려 넘어졌다. 머스킷 권총이 불발 나거나 적을 겨누고 날린 단검이 바람에 궤도가 휘어지는 등, 온갖 불운으로 인해 에크나르프 선원들은 실수를 남발하고 공격 기회를 잃으며 하나씩 죽어갔다.

소년의 저주로 인해 저울추가 한쪽으로 슬금슬금 기울었다.

갑판 절반 이상이 장교의 취미 호 선원들에게 장악당하고 에크나르프 선원들이 선미루의 배 안으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몰리자, 배 안에 있던 마력 품은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입맛부터 다셨다.

마력 품은 자의 영혼 맛은 각별하기 때문이다. 마력 품은 장본인이 바깥으로 나오자 에크나르프 선원들이 환호를 질렀다.

“브란트 경께서 나오셨다!”

“이길 수 있어!”

“오르네리 경이시다!”

에크나르프 인들의 환호에 장교의 취미 호 선원들이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바깥으로 나온 둘은 육상의 기사들이나 입을 두툼한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

사람들은 기사를 ‘충성의 상징’, ‘기사도의 수호자’ 등의 좋은 표현으로 부르지만, 뒤로는 이렇게 부른다.

살인병기.

밥 먹고 무기만 휘두르는 이들은 근접전에서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상대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병기 그 자체였다. 일부 기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 곳곳에 도사리는 괴수를 잡아 명성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세간에 용을 잡은 기사나 거인을 단칼에 벤 기사 등등의 신화에 가까운 무용담이 돌아다니는 이유는 기사들의 실제 무력이 엄청나다는 것이 널리 퍼져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총의 발전으로 갑옷 따위는 무시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나, 전장에서 기사와 기병의 의존도는 여전히 높았다. 특히 마력을 몸에 품어 전투력을 대폭 늘릴 수 있는 기사의 필요성은 아직 건재했다.

돈과 시간이 많이 들긴 하지만 잘 키우면 총알도 튕겨내 암살을 막을 수도 있고, 일단 붙기만 하면 거의 필승이라, 총병에 의한 기병 무용론이 나오는 현 시대에서도 기사 무용론이라는 말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이런 백병전 한정 만능 해결사지만 해상전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은 대부분이 귀족 출신이라 방랑기사라던가 하는 경우 외엔 구질구질한 선상 생활을 어지간하면 기피하는 편이었고, 포격전이 벌어지면 기사는 그저 힘만 센 선원에 불과하며, 귀한 인재를 물에 빠뜨려 죽일 멍청한 주군은 없었으니 기사는 바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왜 그 기사가 여기서 나오냐고!’

장교의 취미 호 선원들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가볍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저런 두꺼운 갑옷을 입고도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암암리에 풍기는 분위기로 봤을 때, 가짜 기사는 확실히 아니었다.

투구까지 써 사람의 모습이 금속에 완전히 가려진 모습은 안 그래도 드높은 기사의 악명과 겹쳐 저 놈이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게 느껴졌다.

높은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고, 무기의 달인이다.

이는 고작 갑판 두 개 넓이의 선상 백병전에서는 무적이란 얘기였다. 우리가 더 많다 같은 소리는 기사 앞에선 사기를 높일 말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아주 잘 만든 갑옷은 머스킷 권총 탄환 정도는 튕겨낼 수 있다. 저들이 입은 갑주가 번쩍거리는 것이 질 좋은 물건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홉킨스 선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찬가지로 장교의 취미 호 선원들도 공포에 질렸다. 아무리 무지렁이들이라 해도 기사의 무서움은 소문으로라도 들어서 안다. 저 미친 살인병기를 상대해야 한다고? 하나도 아니고 둘을?

전투가 중단되었다.

70여명의 선원과 150여명의 선원들이 뒤섞이던 전장이 고작 둘의 등장으로 인해 중지된 것이다.

“니아트리브 놈들이군.”

투구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에크나르프 억양이 섞인 니아트리브 어였다.

“오늘은 사냥을 성공해 좋은 날이니 이쯤하고 물러가면 쫓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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