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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유령선장-22화 (23/128)

22화

태동하는 재앙-7

전투 준비가 끝나고, 선원들은 다시 퍼질러졌다.

이제 약탈 상대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배를 만나도 서로 붙으려면 또 한참 걸리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해 체력을 보존해야 했다.

소년은 가장 높은 주 돛대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견시병을 위한 큼직한 나무 바구니 초소가 있었다. 안색이 거무죽죽한 견시병이 망원경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약탈 상대를 탐색하고 있었다.

“어, 꼬마. 견시병 역할 한다며?”

견시병은 어제까지만 해도 소년에게 욕설을 해대고 저주받은 놈이라 궁시렁댔지만 지금은 그런 기색은커녕 오히려 소년을 반기고 있었다. 햇볕에 탄 피부가 왠지 모르게 혈색이 안 좋아 보였다.

“......”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위를 슥슥 둘러볼 뿐이었다. 소년의 건방진 행위는 이미 배 안에서 유명했으므로 견시병은 별 말 않았다. 그저 망원경을 내리고 잠시 휴식을 취할 뿐.

“백합이 뭐야?”

“응? 백합? 에크나르프 문장 얘기하는 거냐? 어, 글쎄다. 나도 실제로 본적은 없고 그냥 에크나르프 국기에 그려진 그림만 아는데.”

“어떻게 생겼어?”

“어어, 그러니까...... 짚단? 나뭇단? 그거 세운 것처럼 생겼어. 가운데에 세로로 두꺼운 줄이 있는데, 아래보다 위가 더 굵어. 양옆엔 또 얇은 선 두 개가 있고, 그 셋을 합쳐서 줄로 묶은 것 같이.”

“묶는 줄이 가운데보다 살짝 밑에 묶였어?”

“그렇지.”

“그럼 저 배는 에크나르프 배겠네?”

“뭐? 배?”

견시병이 황급히 망원경을 들어 소년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보았다.

동그란 시야 안. 절반을 차지하는 푸른 바다 위로 배 한 척이 큰 돛을 수평선 위로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돛대 위에 걸린 어렴풋이 보이는 깃발은......!

“일거리다아-!”

견시병이 그렇게 외치며 옆에 걸린 종을 흔들었다.

땡땡땡땡

이내 쿠당탕 하는 나무갑판 울리는 소리와 함께 선원들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수평선 너머에서 배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전투의 열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제발 황금!”

“제발 신대륙 무역선!”

“제발 기사나 해군 선박은 아니길......!”

선원들이 저마다 다른 소원을 빌면서 무기를 고쳐 쥐고 목책처럼 생긴 구조물 뒤로 숨었다. 대포는 가리고 있던 기름천을 벗기고 벌써부터 장전에 들어갔다.

선장이 외쳤다.

“자, 돛 풀어! 좀 더 접근해서 무슨 배인지 확인하고 돌입한다!”

밧줄이 풀리고 펄럭하는 소리와 함께 돛이 바람을 머금고 팽팽하게 살이 쪘다. 상대 선박 위치는 남서쪽. 완전한 순풍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속도로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흐흠......”

홉킨스 선장이 망원경으로 ‘일거리’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갤리온. 돛대의 깃발은 파랑 바탕에 흰 백합 깃발. 파란색 바탕을 가진 나라 깃발은 흔치 않아 멀리서도 에크나르프 배라는 걸 구분할 수 있었다. 사략선이 난립하는 시대라 근방에 나타난 낯선 배를 경계하는 모양인지 포문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돛대는 3개. 체급 자체는 오히려 마개조된 카락인 선장의 취미 호보다 조금 작았다. 건조된 연한이 좀 된 배란 것이다. 요즘은 돛대 3개짜리 갤리온은 건조되지 않으니까.

선장은 그 점에 안심했다. 상대는 군선이 아니다.

갤리온은 원래 군용 선박이다. 하지만 연한이 된 배는 물자수송용 등으로 돌려지기 때문에 저건 군선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대포였다.

수송용이라지만 군선은 군선. 대포가 양쪽 합해 30문이 넘어 보였다. 현재 뱃머리 쪽을 보고 있기에 확실하진 않지만 구형 에크나르프 갤리온 규격이 그쯤 되었으니 맞을 것이다. 대포가 많으면 당연히 운용병도 많을 테니 선원 수도 장교의 취미 호보단 많을 게 분명하다.

상대편의 선원을 아군 선원이 다 죽기 전에 제압하는 것이 선상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니만큼 선원 수 차이가 곧 전투력이었다.

하지만 홉킨스는 자신의 선원들을 믿었다. 평균적으로 니아트리브 선원들이 에크나르프 선원보다 숙련도 면에서 위인 데다, 홉킨스는 사략선 선장이 된 지 3년째고 해군 경력까지 합하면 12년, 선원들의 평균 경력은 무려 5년이었다.

사략 사업에 나간 선원의 생존 평균 기간이 1-3년인 것을 감안하면 장교의 취미 호의 선원들은 충분히 베테랑 딱지를 붙일 법했다.

‘보딩(boarding)이 제대로 된다면 어찌 해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신속하게 붙어서 백병전으로 들어간다면 승산은 있어 보였지만, 대포가 신경 쓰였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와 그의 선원들은 60문의 대포를 가진 군용 갤리온도 약탈한 적 있었다. 비록 전염병 때문에 골골거리던 배여서 가능했던 거지만 말이다.

“얘들아, 가자!”

선장이 약탈 결정을 내리자 선원들이 환호했다. 그들의 눈앞엔 벌써부터 손에 쥐어질 금화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와후!”

“약탈이다!”

“한몫 잡아보자고!”

돛을 조정하는 밧줄들이 제 위치를 찾아가고, 큼직한 돛이 완전히 펴지며 제 위용을 자랑했다. 돛이 풀려나니 자연스레 속도도 빨라졌다. 돌격을 위해 바람 방향으로 미리 위치를 잘 잡아두어 배는 최고 속도로 순식간에 올라갔다.

두 선박은 서로 뱃머리를 마주본 상태. 배를 돌려서 대포를 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빨리 돌진해야 했다.

장교의 취미 호의 돛이 활짝 펴지고 속도가 올라가자 상대편 선박도 화들짝 놀라 배의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낮아서 중앙갑판이랑 높이가 별 차이 없는 선미루에 선장이 올라 키를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때 묻은 나무 느낌이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선장.”

그때, 소년이 홉킨스에게 말을 걸었다.

“뭐냐 꼬마.”

소년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름을 몰랐고 그냥 선원들이 꼬마, 꼬맹이 등으로 통칭하곤 했다. 키가 작아 꼬마라고 불리던 선원이 자유를 찾았다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이 배가 사략선이라며? 사략선은 뭘 하는 거야?”

“사략 사업은 국가의 허가를 받아 타국의 배를 약탈하는 사업이다. 니아트리브가 지정하는 특정 국가의 배를 공격해 모든 걸 뺏는 거지.”

“해적이랑 똑같은 거야?”

“무슨 소리! 해적이랑 우리는 엄연히 다르다!”

홉킨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해군 장교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

“우리는 틀 안에서 법도를 지킨다. 싸움 이후 상대방이 항복하면 국제적인 조약에 따라 상대방의 목숨을 보전하고 필요 이상의 살상은 하지 않으며, 니아트리브가 정한 국가의 배만 약탈하면서 국가에 세금도 낸다. 나포한 배 역시 다른 국가에 팔지 않고 니아트리브에 팔지. 하지만 해적은 아니야. 놈들은 돈이 되는 거면 뭐든지 한다. 선원들을 노예로 팔아 버리는 건 예삿일이고 피해가 크면 항복한 상대방을 화풀이로 모조리 죽이기도 하고 출신 국가의 적국과도 기꺼이 손을 잡는 것들이야. 그래서 좀 나대는 큰 해적단이 있으면 여러 나라가 합동하여 토벌하기도 한다.”

해적 얘기가 나와서 그런지 홉킨스의 말에는 해적의 나쁜 점을 말하라고 하면 몇 시간동안 연설을 할 것만 같은 은은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그런 차이가 있구나. 그런데 약탈하는 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걸.”

“다르다고 얘기했잖나. 우리는 해적이 아니야.”

돈이 필요해 사략 사업에 뛰어들긴 했지만 퇴역이 아니라 휴직을 낸 장교라 홉킨스는 여전히 해군 장교였다. 그러니 해적과 같다는 소리는 당연히 듣기 싫을 수밖에.

“진짜 해적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알 거다. 놈들은 모조리 교수대에 매달아버려야 돼.”

해적 얘기가 나와서 그런지 얼굴이 좀 더 굳어진 채 앞을 보는 선장. 그런 선장을 바라보는 소년은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략선이나 해적이나 다를 바는 없어 보이는데.’

그 둘의 차이점은 국가에 충성을 바치냐 안 바치냐로 갈리는 듯했다. 아, 세금도.

사략 사업을 하는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사략선에 당하는 국가 입장에서는 사략선 역시 결국엔 해적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략선에 피해를 입은 국가가 사략선을 사로잡고 니아트리브에 항의를 한다고 하자.

‘니아트리브가 자기들 나라 배가 아니라며 시치미를 떼면?’

적국의 선원을 고이 보내줄 일은 없을 테니 그 사략선은 고스란히 해적 취급되어 목매달리지 않을까? 국제적 조약이니 뭐니 하는 것은 그 주체인 국가가 지켜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선장은 국가란 존재를 너무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뢰 없는 빈민가에서 자라온 소년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든 배신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뿐. 그래서 소년은 선장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빈민가 바깥의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참 순진하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소년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상대편의 배를 보았다.

‘......이런.’

소년의 시선이 장교의 취미 선원들에게 향했다.

‘제법 죽겠네.’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줄 아는 소년의 시야에는, 상대편 배 밑에 마력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

“선장님! 놈들이 생각보다 일찍 방향을 틀었습니다!”

반도 가까이 가지 못했는데 에크나르프 선박이 선체 옆구리를 보이고 포문을 겨누었다.

“에크나 놈들 의외로 손이 빠른데.”

“선장님. 지금 물이 2피트 찼습니다. 선수 펌프가 파괴되면 곤란합니다.”

때마침 갑판 아래에서 보고를 위해 나온 함선 목수가 말했다.

나무로 만든 배는 끊임없이 물이 샌다. 구리판을 덮거나 마법사가 동원된다면 걱정이 없겠지만 구리판은 비싸고 마법사는 정말로 비싸기 때문에 보통은 나무판 사이에 밧줄 부스러기를 때려넣거나 타르를 바르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틀어막아도 낡으면 결국 새게 되고, 안 낡아도 재수 없으면 어딘가에서 물이 질질 새기 때문에 함선에는 물을 퍼내는 펌프가 필수였다.

그런데 장교의 취미 호는 개조 때문에 선수와 선미 둘 다 있어야 할 펌프가 선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1피트 이하로 물이 고인 게 정상인데 바닥에서 뭔가 잘못된 모양인지 2피트나 찼단다.

대포의 명중률이 좋진 않다지만 재수 없이 펌프가 파괴된다면 전투에서 이기고도 배를 잃을 수가 있다. 충각용이자 펌프 보호용으로 선수에 철판을 붙여 놓긴 했으나 선장은 배가 침몰할 수도 있을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물이 1피트 미만이었다면 그냥 돌진했을 텐데. 칫, 어쩔 수 없다. 포격하면서 접근한다!”

선원들이 배 양편에 모여 있다가 헐레벌떡 중앙 갑판으로 가 대포를 부여잡았다.

장교의 취미 호가 오른쪽으로 변침하며 조금씩 왼쪽 옆구리를 드러냈다. 오른쪽의 대포들을 서둘러 반대편으로 옮기는 선원들이 무겁다며 욕을 내뱉었다.

빠르게 접근하여 옆구리를 보이는 것은 명백한 적대 행위. 두 선박 간의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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